Rainbow Bible Class

신앙 에세이: "죽음과 결승선"

2010.07.18 13:47

류호준 조회 수:6361

 “죽음과 결승선”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히 9:27)

“man is destined to die once”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금지된 습관입니다. 심지어 죽음을 코앞에 둔 불치병 환자나 그의 배우자 혹은 가족들은 결코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속으로는 죽음에 대해 말하면서도 입 바깥에 내놓기를 두려워합니다. 부부지간에서조차도 죽음은 금지된 화두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현상은 아주 슬픈 일입니다. 오히려 그런 상황을 두 사람이 종말과 죽음에 직면하는 기회로 사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두려운 감정들과 생각들을 서로에게 말하고 나눔으로써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서로를 더욱 풍요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때론 서로 흘리는 눈물들이 모여 분수가 되고, 뿜어내는 분수가 햇살에 반사되어 오색 창연한 무지개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과 희망을 제공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관해 말하는 것은 불편하거나 부적절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한곳에서 엄숙하게 말씀하기를 우리 각 사람은 죽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이 사람에게 정해진 이치요”(히 9:27)라고 하니 크리스천보다 이 사실을 정직하게 직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죽음을 만난 사람”(The Man Who Met Death)이란 단편 이야기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죽음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언젠가 둘이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 사람이 죽음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합니다. “저는 갑작스런 일들은 싫어하거든요. 그러니 제발 부탁인데 당신이 저를 데리러 올 즈음에 미리 몇 가지 경고들을 주시고 오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그의 요청이 합리적이라 생각한 죽음은 그리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푸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는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반드시 충분한 사정 경고를 보낸 다음에 찾아오겠다고 했습니다. “한 번만 아니라 여러 번 경고를 주겠노라”고 죽음이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 사람은 아주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헤어져 자기 갈 길을 갔습니다. 더 이상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이지요. “경고 사인이 올 때 죽음에 대해 생각해도 충분해.”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사전 경고를 준다고 했잖아.” 그리고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죽음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너무 황당하고 놀란 나머지 죽음에게 항의했습니다. “이건 공평치 않습니다. 약속 위반입니다. 찾아오기 전에 충분한 사전 경고들을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아무런 사전 경고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찾아옵니까? 이건 약속위반입니다!”


그러자 죽음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오. 나는 내 약속을 지켰소.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당신에게 경고를 주었소.” “아니 언제요? 언제 당신이 제게 사전 경고를 하셨단 말입니까?”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당신에게 경고장을 발송하였소,” 죽음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계속해서 말하기를, “당신의 첫 번째 흰 머리카락을 기억하오? 그것이 내가 당신에게 준 첫 번째 경고였소. 어느 날인가 귀가 잘 안 들린다고 하던 때를 기억하오? 아니 또 있었지. 그 후에 당신이 의사를 찾아갔더니 그가 당신에게 이젠 너무 무리하지 마시라고 하던 말을 기억하오? 기억나지요? 몇 번인가 숨을 길게 쉴 수 없다고, 가슴이 묵직하고 답답하게 느껴진다고 고통을 호소하던 때를 기억하오? 한번인가는 가슴의 통증을 느낄 때도 있었지요? 이래도 기억못한다고 하겠어요?” 결국 그 사람은 죽음이 그에게 사전 경고문을 수없이 보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좀 더 빨리 올지도 모릅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시간은 기어갑니다. 청년 때는 시간은 걸어갑니다. 바쁘고 분주하게 사는 중년에 시간은 뛰어갑니다. 나이를 먹어 늙어 가면 시간은 날아갑니다. 세월이 흐르는 물(流水)같다느니, 혹은 시위를 떠난 화살 같다느니 하는 말이 이런 뜻일 것입니다. 시편 90장의 모세도 이 사실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날들은 수고와 눈물뿐이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10절) 인생이 날아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인들의 흥미로운 표현이 ‘날아가다’는 단어입니다.


예전에 여름 휴가철이 되면 나는 집 문 바깥에 의자를 놓고 애니 딜라드나 프래드릭 뷰크너의 책을 읽거나 넓은 정원 잔디밭을 내려다보며 다람쥐들이 연상 우람한 나무 위로 오르락내리락 분주한 모습을 물끄러미 보곤 했습니다. 그러다 종종 붉은 배 지빠귀 새가 지붕에서 순식간 사뿐히 잔디에 내려앉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뿐사뿐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이른 아침에 준 물을 흠뻑 먹은 잔디 속에 있는 벌레들을 꼭꼭 찍어 먹는 모습이 아주 신선하고 귀여웠습니다. 넋을 잃고 쳐다보다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작은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립니다. 집안 어디에선가 점심 간식이 준비되었다는 아내의 목소리입니다. 속으로 알았다고 대답을 한 후에 다시 고개를 돌려 방금 전 내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저 작은 딱새를 쳐다봅니다. 그런데 아뿔싸, 그 순간 애잔하고 착한 나의 지빠귀 새는 어디론지 훌쩍 떠나버리고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허망하고 허전한지요! 그 여름철 오전의 호젓한 평온과 넉넉한 순간이 잔인하게 낙아 채여 간 것이 못내 아쉽고 서럽기까지 합니다. 위에서 히브리인들이 “우리의 인생은 날아갑니다!”라고 말했을 때의 뜻이 바로 이런 순간을 포착한 것입니다. 인생의 덧없음을 방금 전 내 눈으로 보던 그 새가 훌쩍 날아가 버렸을 때의 그 허무함에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덧없는 인생, 있는 듯한 데 없는 것 같은 인생의 날들을 되돌아보면서 시편 90장의 모세는 “우리의 날수를 셈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라고 애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모세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를 낳은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 채 애굽 황실에 입양되어 자란 그 사람, 훗날 자신의 혼란스런 정체성으로 인해 어려움과 시련을 겪게 되었던 그 사람,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스라엘 민족으로 구원자 역할을 하게 되었던 그였습니다. 홍해도하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을 경험하고도 목이 곧아 교만하기 그지없던 이스라엘 민족, 황소고집에 배은망덕하기까지 한 그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광야 40년 생활을 견디어냈던 그 사람,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도 그곳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비통한 모세로서는 지나간 세월을 뒤돌아보며 인생의 덧없음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시간 너머에 또 다른 실체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실체였습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단명한 인생의 덧없음을 렘브란트 적으로 극명하게 대조함으로써 우리의 시야를 지상에서 천상으로, 시간의 트랙에서 영원의 트랙으로 전환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고 인생의 덧없음을 알아가고 있는 시점에 내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이 다시금 우리네 인생의 본질을 생각하게 합니다. 최근 나는 한명의 친구와 다른 한명의 친척 - 이 두 사람은 이제 50대 중반에서 60대 초반에 이르는 사람들 - 이 모두 치명적인 암과 투병하고 있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무력감에 분노하면서 그저 속절없는 눈물을 지울 뿐입니다. 죽음에 직면하여 대항하면서도 그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는 그들의 태도를 바라보면서 내 머리로 가슴으로 마음으로 많은 것들이 프리즈비 날아다니듯이 혼란스럽게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황이 없는 이 불안한 시간 속에서 다시금 조용히 하나님의 가르침을 되새겨 봅니다.


흙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네 인생은 언젠가 반드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가르침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말하자면 ‘아다마’(흙)로 빗어진 ‘아담’(인간)들은 언젠가 다시 ‘아다마’(흙)로 돌아간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이것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아다마’(일본어로 ‘머리’)가 안 돌아가는 개념 없는 사람들이 아니겠는지? 물론 우리는 흙덩이 같은 인생에 하루에도 수없이 이것저것으로 화장하고 변장하고 위장하고 포장합니다만 그렇게 대중 앞에 나타난 우리가 우리자신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흙일뿐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라틴어 humus(‘흙’)에서 유래한 영어 단어가 humility(‘겸손’)이라고 하니, 결국 사람은 자신이 흙임을 인식하고 사는 것이 참된 겸손함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거울을 봅니다. 눈가에 이마에 주름이 하나둘씩 늘어납니다. 피부와 손과 얼굴에 검은 반점들이 하나둘씩 생깁니다. 누군가 이것을 aging spot이라고 한다지요? 벗겨진 머리를 조금이라고 가리려고 빗질을 합니다. 머리숱이 좀 더 많은 쪽의 머리를 긁어다가 뒤쪽 벗겨진 부분을 덮으려고 여간 애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기를 씁니다. 아니면 색 바랜 결혼식 사진첩을 들여다봅니다. “아하, 나도 저럴 때가 있었네.” 마치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라도 발견한 듯이 놀라 소스라칩니다. 그리고 결혼 30년이 지난 어느 날 아침 푸시시한 얼굴로 아내와 함께 앉아 있었는데 아들 녀석이 디지털카메라로 장난삼아 갑작스레 찍은 스냅사진을 그 옆에 가지런히 놓아봅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인가? 결혼식 사진 속의 내가 나인가 아니면 30년 후 사진 속의 내가 나인가? 정말 헷갈립니다. 전문가들은 말하기를,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은 좀 더 자기 자신이 되어간다고 합니다. 달리 말해 자신들의 신체적 특성들이 나이가 들수록 좀 더 돋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늙어갈수록 젊은 날의 자신들의 특징적인 모습이 풍자적으로 돋보이게(caricature)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엊그제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골프장에 나갔습니다. 미시간의 한적한 시골동네에 자리 잡고 있는 골프코스의 경관은 한 폭의 그림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골프장에서의 나의 습관 중에 하나는 몇 홀을 지난 후에는 반드시 지나온 홀들을 뒤돌아보는 일입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홀들의 생김새와 지형은 언제나 도전적이지만 지나온 홀들은 언제나 애잔함과 아쉬움과 그리움을 가져다줍니다. 특별히 18홀 중에 16번 홀에 이르면, 그것도 석양과 함께 맞는 17번째 홀의 그린에 올라서면 이상야릇한 설움과 아쉬움이 가슴에 사무칩니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18번째 홀입니다. 지나온 발자취가 마음에 묻어납니다. 이 시간은 재고품 목록을 조사하는 시간입니다.


오래전 젊은 시절 오하이오 주에서 목회를 하였을 때입니다. 한 번은 나이가 50대 후반에 이른 김 선생님의 호의로 미국 오대호 중 하나인 이리 호에 자리 잡은 한 골프장에서 있었던 경험이 문뜩 생각이 납니다. 때는 저녁 시간이었고 해는 저 멀리 이리 호 수평선 너머로 떨어져가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우리가 서있던 곳은 16번째 홀이었습니다. 이제 3홀을 남겨둔 상태였습니다. 주변에는 고운 치마를 활짝 펼쳐놓은 듯한 넓은 갈대숲과 정겹게 흐르는 시냇물, 가끔 찾아오는 외로운 갈매기의 까악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그린 위에 서 있었습니다. 시심(詩心)에라도 잠기셨는지 김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우리네 삶은 마치 지금 이 자리처럼 생각됩니다. 너무 빨리 달려온 것 같습니다. 이제 잠시 숨을 고르고 뒤를 보아야할 시간 같습니다. 저기 해가 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이지요?” 그리고 김 선생님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티를 꽂았습니다. 그리고 골프채를 휘둘렀습니다. 창공을 가르며 공은 무심하게 석양을 향해 날아갔습니다. 이제 나도 그분의 나이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걸어왔던 뒤를 볼아 보면서 얼마 남지 않는 앞으로의 삶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가오고 있는 자신의 종말을 무시하거나 모른 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마지막 시간들을 재고품목록(inventory)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가졌습니다. 그동안 그가 갖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으며, 그동안에 그가 사용했던 것들이 무엇이었으며, 이제 남아 있는 것들이 무엇이며, 남은 것을 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마지막을 깨끗하게 정리할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은 것입니다. 이것이 재고품 목록을 작성하는 시간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나는 달리기 경주를 마쳤습니다. 나는 믿음을 지켰습니다.”(딤후 4:7)


나도 바울처럼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뒤돌아보면 볼수록 나의 실수와 잘못들, 단견과 편협, 옹졸함과 편견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저 부끄러울 뿐입니다. 마땅히 선한 싸움을 싸웠어야 했는데도 그렇지 못하고 언제나 좋지 못한 싸움에 매달린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했던 것보다 더 잘 신앙을 잘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착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를 확신합니다. 우리의 실수와 잘못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신실하게 대우하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매일 아침바다 동녘이 밝아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타나심도 여명(黎明)처럼 일정하실 것입니다. 아침마다 그분의 성실하심이 새롭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헐떡거리며  사력을 다해 달리는 우리 인생의 마지막 구간에서 그분은 우리가 완주할 수 있도록 함께 달리며 도우실 것입니다.


1992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하계 올림픽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르셀로나의 몬주익 언덕을 힘차게 달리던 우리의 영웅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따던 그 올림픽 말입니다. 그러나 당시 육상 경기의 진정한 영광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440미터 준결승 계주에 출전한 한 영국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킬레스 건 파열로 인해 22번의 수술을 하고도 올림픽 출전권을 따낸 집념의 사나이였습니다.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와 함께 선두로 달리던 그가 갑자기 트랙에 쓰러졌습니다. 다리에 근육통에 생긴 것입니다. 돌처럼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에게 경기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끝까지 완주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는 듯이 분명했습니다. 응급 치료진들이 달려왔지만 그는 손을 내저어 거절했습니다. 그는 다시 일어나 끝까지 달릴 것을 결심했습니다. 일어나 몇 발자국을 뛰었지만 다시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기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때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관중석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관중석에 있던 어떤 한 사람이 뛰쳐나와 그를 부축하여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모두 궁금했습니다. 그 다음날 신문에 그 사람의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다름 아닌 그 선수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팔로 아들의 허리를 감싸 부축이고 함께 결승선까지 천천히 달렸습니다. 물론 다른 선수들이 결승선을 통과한지 한참 후였습니다. 구름 같은 관중들이 일어나 환호하며 격려하였습니다. 결승선에 이르자 아버지는 손을 놓아 아들이 혼자 결승선을 넘도록 하였습니다. 아들 데렉 레드몬드(Derek Redmond)와 그의 아버지 짐 레드몬드(Jim Redmond)가 만들어낸 눈물겨운 감동의 드라마였습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아들은 끝까지 완주하였던 것입니다.


아마 우리에게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크리스천들로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어가는 과정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견딜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을 수반하는 과정일지 모릅니다. 머리가 빠지고 심한 구토를 수반하고 정신을 잃기도 하고 세상 어디에서도 아무런 도움이 오지 않는 고통스런 과정에서 무저갱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경험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도움은 여호와의 이름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마음으로 아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데렉 레드몬드와 같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결승선을 넘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이와 동일하게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시편 23장의 마지막 말씀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 동안 우리를 따를 것입니다.” 그분은 넘어지고 쓰러진 우리를 우리의 마지막 순간에 까지 우리의 팔을 자기의 어깨에 얹으시고 우리를 부축이어 결승선을 넘도록 하실 것입니다.


[미시간의 깊어가는 여름밤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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