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월드컵 에세이: "우루과이 유감"

2010.07.03 20:38

류호준 조회 수:6340

 “우루과이 유감”



우루과이,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를 것입니다. 남미의 브라질 바로 밑에, 옆으로는 파라과이, 그리고 아래로는 아르헨티나가 있습니다. 남북한을 합친 면적 보다 약간 작은 나라지만 인구는 겨우 400만 명이 안 되는 나라입니다. 부산 인구 정도랄까?


나에게 우루과이는 언제나 가슴 설레는 나라로 남아있습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나라와 붙었을 때, 그리고 16강에서 아프리카의 강호 가나와 붙었을 때, 나는 의외로 우루과이에게 소리 없는 응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루과이의 선수들이 마치 내 식구나 동생들이 되는 듯이 말입니다. 그 이유를 이야기하자면 거의 45년 이상으로 거슬러가야 할 것 같습니다. 1961년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얼마 있지 않아서 그의 혁명 동지며 충실한 부하였던 김종필은 남미 우루과이를 방문하게 됩니다. 소위 ‘남미농업이민’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는 그 멀고도 먼 남미의 우루과이를 찾은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박정희 정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남미영농이민 정책을 추진하게 됩니다. 농업이민 바람은 내가 살던 동네와 교회에도 불었습니다. 당시 40대에 들어선 우리 아버지는 교회의 다른 젊은 집사님들 몇 분과 의기투합하여 남미 농업이민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나는 당시 어린 나이의 초등학생이었지만 ‘이민’이란 말에 가슴이 똑딱거렸습니다. 지도책이 너덜너덜할 정도로 열심히 열었다 닫았다 했습니다. 남미의 나라들을 하나 씩 공부하고 또 공부했습니다. 각 나라들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을 습득하고 암기했습니다. 기껏 암기라고 해야 고작 그 나라 수도가 어디고, 면적이 얼마고 주요 산업이 무엇인지에 관한 것 정도였지만, 지도를 펼칠 때마다 온 세상을 얻는 듯한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언제나 지도책을 펼쳤습니다. 당시 우루과이로 이민을 가려면 부산에서 배를 타고 약 1달 반 정도 걸려서 간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나른한 봄 녘 학교에서 돌아오면 일장춘몽에 빠졌습니다. 이민선을 타고 뱃고동소리와 함께 떠나가는 이민선 위에서 손수건을 휘날리며 작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뱃고동소리는 상상만 해도 낭만적이었습니다.


어느 날 집안 모퉁이에 있던 책상 위에 책 한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서반아어(西班牙語) 교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가족이 미리 서반아어를 조금이라도 배워야한다며 사 오신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저자의 이름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것을 보면 어린 나도 흥분했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책은 김춘배 씨가 지은 서반아교본으로 책 표지에 적힌 한국 외대 서반아교수라는 직함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서반아어는 스페인어인데 당시 아버지는 철자부터 발음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미리 배워야한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책속에 드문드문 들어있는 흑백화보를 보며 이국에 대한 아득한 동경심을 차곡차곡 쌓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 왔는데 집안 분위기가 영 이상했습니다. 방은 어두웠습니다. 창문은 모두 천으로 가려져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제일먼저 반기던 어머니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불을 쓰고 어머니가 누워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애들은 부모님들이 심하게 다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부싸움을 하신 것입니다. 부부싸움의 주제는 ‘이민’! 그동안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다가 그만이야 언성이 높아졌던 것이었습니다. 아마 며칠 동안 집안에 북극의 냉기류가 싸늘하게 흘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우리 자녀들은 부모님의 눈치를 보며 아침에 일찍 일어나 제각기 학교 갈 준비를 하고 단정하게 인사하고 집을 벗어났습니다. 이북 출신이신 아버지는 어차피 남한도 낯선 땅이고, 당시 정부의 그럴싸한 이민 정책에 홀딱 반해서 이민을 결정하셨지만, 어머니는 서울 출신이고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 친척들이 다 한국에 있으니 도저히 이민 갈 수 없다고 버틴 것이었습니다. 아마 몇 주 이상 냉전은 계속되었는데 결국 화해의 제스처를 내민 쪽은 아버지였습니다. 단식투쟁을 하던 어머니에게 백기를 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루과이로의 이민 꿈은 접게 되었습니다. 어린 나였지만 너무도 아쉽고 허전했습니다.


작년인가 우리나라 모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우루과이 이민사”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그 방송을 보면서 웃음과 울음이 함께 두루뭉술하게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마터면 나도 갔을 그 이민자들의 한 맺힌 고난의 세월들을 보면서 그러했습니다. 정부의 말만 듣고 무작정 갔던 그곳, 거대한 농장을 무상으로 임대해 주겠다고 해서 갔던 그곳은 농장이나 초원이 아니라 버려진 땅이었고 인고와 슬픔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민자들은 온갖 고생을 하면서 눈물로 떡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농사를 포기하고 행상을 하며 근근이 살아갔습니다. 방송에 나온 어떤 노인을 보니 우리 아버지와 같은 80대 후반의 연배셨고 아마 우리가 그 때 눈물의 부산항을 떠나 이민선을 탔더라면 그분의 자녀와 함께 내가 텔레비전에 나왔을 것 같았습니다.


엊그제 우루과이와 우리나라와 축구경기를 보며 잠시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하고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 때 이민선을 탔더라면 지금의 나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지금의 아내는? 지금의 네 자녀들은 있었을까? 어제 저녁 입덧이 심한 큰 딸아이와 함께 한 커피숍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웠습니다. “아빠가 그 때 이민을 갔더라면, 너는 이 세상이 있었겠니? 그 때 네 할머니의 단식투쟁 덕분이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네가 내 딸이 될 수 있겠니? 하하하” 이런 저런 이야기 옛 이야기를 하다 보니 미시간의 시원한 밤은 깊어만 갔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왜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일까?” “꼬모 에스따스”(스페인어로 ‘안녕하세요’이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안녕하세요”라고 말하고 있는 내가 이상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합니다. “왜 나는 우루과이가 아니라 한국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왜 나는 스페인어(서반아어)를 말하는 대신에 한국어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인생은 내가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연이거나 아니면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거나 둘 중에 하나겠지요. 그런데 나는 후자라고 꼭 믿습니다. 굳이 찍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섭리'라고 해야겠지요. 


[미시간의 잠 못이루는 밤에: 시차로 인해 새벽 2시에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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