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14 03:49
[29] 이사야 17:1-14
제목: 가진 자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심
묵상 포인트: 다메섹이 주님을 찾는다면 예루살렘은 더더욱 그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열국심판신탁의 이번 차례는 다메섹입니다. 시리아 혹은 아람으로도 불립니다. 특별히 다메섹으로 언급되는 이유는 재앙이 도시에 임한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모압에 임한 심판은 주로 시골 농촌 지역이었습니다. 침입자들이 국토를 휩쓸고 가면서 농작물들을 탈취하고 파괴하였습니다. 이와는 달리 시리아의 경우 파괴가 주로 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다메섹뿐 아니라 시리아의 최남단에 위치한 아로엘 지역의 성읍과 도시들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유별난 것은 에브라임과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3절)입니다. 그들이 시리아와 동맹 관계를 맺고 함께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7장에서 들었습니다. 즉 시리아와 에브라임을 동맹을 맺고 유다를 침공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다메섹에 관한 심판의 메시지는 자연히 에브라임에게도 해당되고 있습니다. 사태가 아주 악화되어 아람이나 에브라임이나 똑같을 것입니다. 마치 어떤 유명한 사람이 병들어 초췌해지고 시들어 가듯이, 아니면 이삭 하나 남김이 없이 싹쓸이하는 추수처럼 아무 것도 건질 것이 없게 되는 것처럼, 아니면 손에 닿지 않은 나무 끝자락에 남겨진 열매처럼, 아니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처럼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4-6절).
다메섹은 무서운 심판을 경험한 후에 비로소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은 자신들의 비참함을 보면서, 자신들이 만들어 섬겼던 우상들(아세라, 태양상)이 얼마나 무익하고 쓸모없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는 모두 자신들이 자신들 위해 ‘만든 것’(made)들이었습니다. 우상이란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참 종교는 하나님이 ‘만드시는 분’(maker)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창조주를 섬기는 것과 피조물을 섬기는 것이 참 종교와 거짓 종교를 구분하는 근본적 기준입니다.
다메섹을 심판하고 그들의 죄악을 고발한 후에 이사야 선지자는 고개를 돌려 예루살렘을 향해 말씀합니다(10-11절). “너, 봤지! 네 이웃나라들에 임하는 심판의 중대성과 혹독함을 봤지?” “그렇다면 너는 어떻지? 너는 심판의 형벌에서 열외인줄 알아? 아니거든!” “이방 나라인 다메섹도 마침내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바라보게 된다면, 유다와 예루살렘은 더 더욱 그러해야지 않겠는가? 그런데 너희는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능력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았지 않아!” 그러니 그들이 치러야할 심판의 값이 얼마나 비싸겠습니까? 하나님은 많은 것을 받은 자에게 많은 것을 찾으실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만이 구원이며 영원한 반석이며 요새라는 사실을.
| 기도 | 당신만이 우리의 구원이시며 우리의 반석이심을 잊지 않게 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