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17 00:42
“해시태그(hash-tag)가 된 여인 라합”
누군가에게 별명을 짓는 일은 인간사회에서 흔한 일입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 대부분 한 두 개 정도의 별명을 가져보았을 것입니다. 별명을 붙이는 사람이야 재미로 하겠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선 별로 기분 좋지 않게 들리거나 거북스런 경우가 대부분일 겁니다. 많은 경우 어딘가 그 사람의 결점이 될 만한 특징을 꼬집어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평판이 나쁜 유명 인사일 경우 듣기 거북한 별명으로 대신하기도 합니다. 불행한 처지에 놓인 이전 대통령들을 우회적으로 조롱하는 별명으로 2MB이니 503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그런 예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고대의 성경기록자나 당대의 서기관들, 그리고 그 당대 사람들의 편견이 얼마나 지독하고 강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예가 있습니다. 라합의 경우가 그런 케이스입니다.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의 초기에 등장하는 여리고 성의 그 여인 말입니다. 여호수아에서 그녀를 소개할 때 뭐라고 소개했지요? “여리고 성에 라합이란 여인이 살고 있었다.” 라고 소개하던가요? 아닙니다! 처음부터 대놓고 “창녀 라합”이라고 소개합니다. 물론 그녀의 직업이 창녀였으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창녀 라합”이란 합성어는 그 후로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 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도 여리고 성의 라합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창녀”라는 단어가 아닙니까? “창녀”와 “라합”은 바늘과 실처럼 언제나 같이 갑니다. 지금까지도 그렇지 않습니까? “창녀 라합.” 그녀의 이름이 “라합”이라면 그녀의 성은 “창녀”인 셈입니다. 이름은 갈아도 성은 바꾸지 못하지 않습니까? “창녀 라합.” “창녀”는 라합에게 껌 딱지입니다. 창녀는 그녀의 가슴에 있는 문신이며 스티그마(stigma)입니다. “창녀 라합”을 떠나서 라합이란 여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성경안에서도 말입니다. 라합을 언급하는 신약성경은 두 곳입니다. 이 두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라합을 믿음의 여인이라 칭송하면서도 “창녀 라합”이라 부릅니다(11:31). 야고보서 저자는 라합의 행위에 대해 극찬을 하면서도 “창녀 라합”이라 부릅니다. 참 서글프고도 씁쓸한 대목입니다.
인터넷을 사용하여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소셜 네트워크(SNS)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해시태그(hash-tag)가 뭔지 아실 것입니다. 해시태그는 #(샤프 기호)와 특정 단어(들)을 붙여 쓴 것으로, 해시태그는 소셜 미디어에서 특정 핵심어를 편리하게 검색할 수 있도록 하는 메타데이터의 한 형태입니다.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에는 라합과 그녀의 소셜미디어의 계정에 “창녀”라는 단어를 해시태그 해 논 셈입니다. “라합 #창녀” 이렇게 말입니다.
종교적 순혈주의자, 신학적 전통주의자, 신앙적 엄숙주의자들이 종종 의식적으로 때론 무의식적으로 라합에게 #창녀라고 해시태그를 붙입니다. 이게 과거의 일만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라합에게 창녀라는 해시태그를 붙이지 않은 곳이 딱 한 군데 있습니다. 구원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의 예수의 족보에서입니다. 거기엔 “#창녀 라합”이 아닙니다. 그냥 “라합”입니다. 룻의 시어머니, 다윗의 고조할머니입니다! 아니 예수님의 조상 할머니이며, 여러분과 저의 조상 할머니입니다. 예수 안에서 종교, 인종, 성별, 신분, 학벌, 지방 등의 모든 인간적 경계선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라합과 그녀의 백성들은 그 후로 오늘까지 이스라엘 안에 살더라!”(수 6:25)
해시태그를 떼어버리고, 고유한 이름 라합을 회복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립니다!
Crystal Clear Water at Lake Superior(Crisp Point Light) MI. Credit Tom Sovereign
아멘입니다.ㅎㅎ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붙어있는 껌딱지를 때어내고
홀가분하게 살아가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