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차정식 교수가 인터넷상에 요약된 강의 내용이 혹시라고 잘못 전달될 수도 있다고 해서 강연 원문을 보내왔습니다. 각주까지 보려면 첨부화일을 사용하십시오. - 류호준.]

 

 

신학담론 형성 및 유통의 한국적 현실과 과제

차정식 교수

(한일장신대 신학부)

 

 

I. 이 땅에서 ‘신학’은 어떻게 신학이 되는가?

 

먼저 전제해야 할 첫 번째 사항은 이 글이 본격적인 연구의 밑그림을 그리기 위한 것이고 따라서 이 글의 개략적인 분석과 해석의 보다 정밀한 근거는 앞으로 더욱 보충되리라는 점이다. 아울러, 이 글에서 말하는 ‘신학’ 관련 제반 어휘들은 내가 신학이란 명패를 내걸고 살아온 이 땅, 남한사회를 그 지리적 문화적 태반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신학’의 ‘신’이 여타의 다른 종교들보다 내가 몸과 맘을 담고 탐구하며 섬겨온 그리스도교 내부와 개신교의 울타리 안, 혹은 그 언저리의 신 ‘하나님’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한계도 미리 밝혀둔다. 또 한 가지, 내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핵심 주제들은 그동안 신학자로서 이 땅에서 경험해온 여러 신학 관련 소재들과 이에 대한 의문, 관찰, 그 과정에서 떠오른 문제의식 등을 일차적 기반으로 깔고서 분석되고 있음도 사실이다. 따라서 이 글은 해당 주제에 대해 포괄적인 종합이라기보다 국부적인 탐침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서론의 문제제기로 던진 질문 ‘이 땅에서 신학은 어떻게 신학이 되는가?’는 동어반복의 위험을 안고 있다. 한없이 겉돌면서 밑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심연처럼 질문을 위한 질문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현실은 신학이 결코 선험적이거나 확정적인 자기 규범성을 갖지 않는다는 점을 표 나게 부각시키고자 함이다. 다시 범박하게 말하자면, 모든 신학은 역사 구속적이고 공간 제한적이기에 새롭게 만들어지고 소멸하며 또 변해간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해당 질문은 신학이 ‘신학’이란 이름만으로 존재할 수 없고 그 형식과 내용이 관여하는 구체적인 인간의 활동을 전제한다. 이를테면 ‘신학’이란 개념 속에 응축될 만한 사상과 그 표현을 위한 담론의 생산을 거론하지 않고는 신학은 그저 허울로서의 명분이나 외교적 수사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신학의 형식이 다채로운 ‘글’로 표출되고 그 내용이 문자의 구성물로 매개되어 나름의 체계를 갖춘 ‘지식’으로 전승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특정한 신학자의 이름을 담고 또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살았던 시대의 각종 상황과 결부되어 역사 가운데 온축되어간다. 그 역사 속의 신학이 줄곧 재발견되고 재해석되는 사정도 신학과 관련하여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학문적 삶의 일부이다.

 

그렇게 본다면 신학은 신학이란 완성체로 ‘존재’하기에 앞서 구성체로 ‘되어가는’ 길 위에 있다. 삶이 그렇고 물질과 잡다한 인간의 지식이 그렇듯, 신학이란 지식 역시 생산과 유통, 소비의 과정을 거치면서 제 나름의 존재 가치를 시위하는 셈이다. 신학비평의 일환으로 마땅히 분석과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러한 신학적 담론 창출의 구조는 그동안 신학계에서 주된 관심의 영역과 거리가 멀었다. 최근에 주로 조명을 받고 있는 분야는 신학담론 자체와 그것의 구조적 지형이라기보다 그 현장으로서의 신학교육기관이 처한 제반 조건 및 그 현실이다. 가령, 우리는 신학을 문제시하면서 종종 신학대학의 교과내용과 교수방식, 신학생 수급문제, 졸업 이후 정착 문제, 신학교육의 대상으로서 목회자의 질적 수준에 대한 고민 등에 그 관심의 핵자가 머무는 경향을 보여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영역을 뒷받침하는 신학의 정체성과 그 내적인 담론의 지형에 대한 메타비평적 성찰이 없이는 아무리 제도를 바꾸고 교과과정을 조정해본들 그것이 본질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거듭날 리 만무하다. 마치 외장만 바꾼 채 ‘그 나물에 그 밥’의 메뉴로 옛적의 관행을 되풀이하는 ‘시늉으로서의 개혁’에 그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신학교육의 주체가 처한 그 신학적 소프트웨어의 내장적 현실에 대한 반성을 생략한 채 그 외형적 대상만을 아무리 다그쳐본들 창발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특정한 담론이 신학이란 지식의 체계로 양식화되고 유통되는 방식을 신학적 관심으로 부각시킨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예민한 성역을 내파하며 해체하는 매우 근원적인 담론의 전략일 수 있다. 거기에는 가장 고상한 신학담론의 형이상학적 아우라와 그 정치적 권위, 사회적 명성, 나아가 그것을 뒷받침하는 하부구조로서의 이른바 ‘밥그릇’ 차원에 이르기까지 세밀한 이해관계의 시장적 판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워낙 사회적 금기가 많아 그것을 오지게 건드릴수록 더 신속히 그 위반의 주역이 금기의 대상이 되는 이 땅의 인습은 ‘관행’의 이름으로 지식사회에 전염되어 있다. 그러나 그 관행의 이름을 벗는 곳에 지식이 거룩하게 성화되고 담론이 보다 정직하게 제 얼굴을 드러낼 희망의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의 최대치인즉 바로 ‘진리’가 담론 안에서 담론을 매개로 담론을 넘어 생명의 실질적 ‘자유’와 결합되는 지점일 터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학이 비로소 신학이 되는 방식에 대한 메타비평적 탐구는 절박한 필연이 아닐 수 없다. 사태가 절박할수록 서둘게 되지만 나는 이 글에서 그 한 가닥만이라도 차근차근 파헤쳐볼 요량이다.

 

 

II. 신학담론의 지형과 매개 형식

 

1. 담론의 산발적 지형

 

이 땅에서 신학과 관련한 담론은 서구신학을 중심점으로 선회하면서 여러 매체를 통해 그 육체를 입어왔다. 가장 대중적인 하위담론은 이른바 복음의 언어적 실천과 적용이란 측면에서 교회의 목회자가 주도하는 설교와 성경공부 등의 매체를 통해 유포되어온 감이 짙다. 신학의 가장 기초적 내용들은 이렇게 ‘신앙’의 현장에서 대중화되면서 특정 어휘를 상투적인 개념 가운데 확대, 심화, 재생산해왔다. 우리가 교회에서 익숙하게 말하고 들어온 ‘은혜’ ‘사랑’ ‘기도’ ‘성령 충만’ ‘용서’ ‘말씀’ ‘선교’ ‘예배’ ‘섬김’ ‘영생’ ‘축복’ 등등의 어휘에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과 경배의 대상 못지않게 나름의 신학적 전제들이 깔려 있다. 물론 성경이 그 태반을 제공하고 예배/설교학 등의 이른바 실천신학이 그 이론적 영양분을 공급한다. 그것이 탄탄한 인적 물적 기반과 사회적 명성을 갖춘 특정 목사의 설교를 매개로 신학화되곤 한다. 이 가운데 작동하는 신학 창출의 핵심 요소는 그 구술적 담론을 ‘신학’이란 이름으로 재구성해주는 부속기관의 각종 행사와 관련 논저들이다. 그 실천적 추동력에는 물적 재원을 제공하는 교회의 힘이 큰 변수로 작용한다. 이러한 배경에 기댄 각종 사업은 가령 해당 교회의 담임목사가 가진 카리스마를 신학적 담론 속에 승화시켜 이를 예찬의 언어로 인준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와 같은 신학자의 작업은 신학과 목회 또는 신학대학과 교회의 가교란 측면에서 현실적인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그런가 하면 기존의 신학대학 강단에서 그런 성찬의 자리를 마련해줌으로써 유력한 교회의 유력한 인물들과의 정치·외교적 우호관계를 강화하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게다가 지명도 높은 특정 설교자의 설교집과 기타 저서들이 대대적인 광고투자와 함께 신앙대중들에게 판매되면서 그들의 평이한 독서와 이른바 ‘영적인 각성’은 신앙생활의 신학적 후광을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땅에서 신학이 신학이란 이름으로 창출되고 유통되는 가장 풍성한 출처는 신학자라는 명패를 달고 활동하는 전문인들의 글쓰기 작업이다. 그들의 대다수는 교단신학대학에 교수와 강사 등의 타이틀로 적을 두고 있으며, 여기에 일반대학의 신학대학이나 기독교학부(학과) 소속 신학자들이 다양한 전공으로 일부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최근 대학의 경쟁력 강화라는 외압적이고 내부 강박적 분위기 가운데 그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골몰하는 것은 업적 평가를 위해 인정받는 학술지에 논문을 써내는 일이다. 아직 전임교원이 되지 못한 신학자들은 교원임용 경쟁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방면의 글쓰기에 적잖이 신경을 써야 한다. 물론 많은 강의시간의 부담과 소속 교단이나 관련 기관에 봉사하기 위한 교회 안팎의 ‘아르바이트’ 성향의 하청 작업 역시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영역이다.

 

제도권 대학의 강단 내에서 이른바 ‘자리’가 안정된 신학자들에게도 승진심사 등의 관문이 있어 예의 글쓰기 노동과 정치사교적 어울림, 경제적 자급자족 차원의 아르바이트는 유사하게 패턴화된다. 그 가운데 축적해온 일정한 사회적 명성은 여러 기독교 매체를 통한 원고청탁과 이에 부응하는 기고활동에 따라 약간의 원고료 및 강연 사례금 등과 함께 신학적 담론이 유통되는 채널을 개척해준다. 이러한 과정과 맞물려 신학자의 저술 및 집필 활동은 제 나름대로 신학이란 형식을 구축하며 담론 창출에 기여한다. 요컨대, 이 땅에서 신학이 신학으로 생산되는 방식은 평이하고 상투적인 하위담론이든, 비교적 정제된 상위담론이든, 신학자/신학교수라는 제도적 위상과 매체를 통한 글쓰기 활동이 물질자본을 미끼로 번식하며 그 체계를 중심으로 반복, 순환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여타의 21세기 학문분야에서도 대동소이한 체계의 논리로 적용될 수 있지만, 신학은 제도적 관여 범주가 국가권력이나 사회적 규범보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신앙공동체에 일차적으로 연루된다는 특이성을 띤다.

 

아울러, 아카데미아의 전문신학자가 창출하는 담론과 신앙실천의 현장에서 목회자에 의해 생산되는 담론 사이에 불균형과 비대칭이 현저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그 생산의 양적인 위세와 대중적 파급력으로 전자는 후자에 많이 밀리는 형세이며, 상호간의 교류와 소통은 대체로 둔감하거나 무심한 편이다. 예컨대, 신학자들이 만들어내는 학술 잡지는 한국연구재단(구 학술진흥재단)이나 교회를 통한 기금 후원 등의 외적인 기반 없이 내부 집필자의 회비나 게재료만으로 재정적 자립이 어려운 형편이다. 반면 대형 교회의 각종 ‘사업’은 부대시설 확보와 목회 및 선교활동을 위한 프로그램 정립의 통상적 내용을 거뜬히 넘어 그 풍성한 재원을 통해 기존 소프트웨어의 세련된 ‘문화화’를 추구하는 흐름을 타고 있다. 이와 같은 신학과 교회의 빈익빈부익부 현실은 혹자가 지적한 대로 이 땅에서 ‘신학의 게토화’를 부추기는 요인일 텐데, 그 속사정이 간단치 않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땅에서 신학담론 생산 주체들의 주류를 형성하는 세력 다수가 서양 유학(신체적 정신적)을 통해 신학을 익힌 문화적 식민주의의 혐의를 태생적으로 안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식민’의 매개로 작용하는 언어적 관습과 그에 의거한 사유의 범주 및 그 내적인 구조는 곧바로 이 땅의 신학이란 학문 영역을 적극적 ‘이식’과 소극적 ‘적용’이란 유형으로 마름질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신학을 생산하는 담론의 형식과 매개 패턴이 파행으로 흐르는 기이한 지형이 탄생한다.

 

 

2. 담론의 매체와 형식

 

한국에서 신학담론의 매체로서 가장 오래된 잡지로 「기독교사상」과 「신학사상」을 꼽을 만하다. 「기독교사상」은 그것이 이 땅의 신학적 파수꾼 매체로 존립해온 장구한 전통이 말해주듯(1957년 창간), 이 땅에 외국의 새로운 신학적 기획을 학자별로 또 특정 사조의 경향별로 소개하고 이 땅에서 발원한 자생적 신학의 실험을 견인하는 역할을 자임해왔다. 한국기독교의 연합기관인 대한기독교서회의 외곽에 포진하여 다양한 교회 안팎의 쟁점들을 나름의 ‘신학적’ 맥락에서 소화해내기도 한 이 잡지는 신학의 대중화에 기여해온 공로가 적지 않다. 그러나 10여 년 전부터 판매 적자로 고민해오던 내부의 딱한 사정과 함께 이 잡지는 점점 더 대중들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디자인과 외양을 세련되게 꾸미고 딱딱한 신학의 문체를 배제하면서 보다 읽기 쉽고 교회 현실에 접맥되는 실용적 진보의 노선을 지향해온 것이다. 그 결과 근래에 판매적자를 많이 만회할 수 있었지만 거기에 게재되는 다양한 글들이 다들 일목요연한 계통으로 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한두 편의 논문이 ‘신학’과 ‘연구’의 이름으로 여전히 게재되고 새로운 신학사조의 경향을 소개하는 일에도 더러 열심을 낸다. 그 기획특집 코너의 주제들이 시사하듯, 이 잡지는 시의성 있는 이 땅의 소재들을 기존의 신학적 관점에서 발굴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는 모범적인 작업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는 또한 이 잡지의 월간지 성격에 잘 부합되어 시의적절한 이슈를 발굴하여 민첩하게 대응하는 순발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신학을 포장지 삼아 교회 안팎의 제반 현상을 비판적으로 진단하며 ‘적절한’ 수준으로 갈무리할망정 새로운 신학담론을 창출하기 위한 쟁점의 치열한 ‘교통 공간’을 선도하기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이와 같은 계통으로, 그러나 계간지 형식의 발간 체제로 보다 무거운 담론의 장을 선사해온 「신학사상」은 기독교장로회와 민중신학의 주역들이 뭉쳐 만들어낸 한국신학연구소의 전통과 궤를 같이 한다. 애당초 그 지향하는 노선과 색깔이 선명했던 이 잡지 역시 그러나 적자생존과 자본의 논리에 치여 생존을 모색해오던 중 몇 년 전 한국연구재단의 등재학술지로 선정되었다. 그것은 곧 그 권위를 부여한 제도권의 요구기준에 맞추어 그 학술지의 형식을 가지런히 정돈해야 할 암묵적 당위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본래 대중적 신학잡지로 출발한 「신학사상」은 나름대로 운신의 폭을 조율하면서 지금은 그 ‘사상’의 계보와 색깔을 특별히 개의치 않는 국내학자들의 논문 발표용 종합적 학술잡지로 자리매김해왔다. 물론 그 앞 대목에 배치되는 기획특집을 통해 왕년의 신학담론이 행세해온 사상적 위용을 지속해나가고는 있지만 절반 이상의 지면을 차지하는 게재료 납부 논문들의 편집 구조는 여타의 다른 신학 관련 학술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체제와 형식을 추종하며 그 내용 또한 기존의 강단 신학자들이 생산하는 논문의 범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민중신학이나 그 계통의 축적물을 재발견, 재해석하는 쪽에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이는 특정 필자가 특정 매체에 사사로운 인연의 기득권을 향유하는 계파주의의 변종으로 비칠 뿐, 그 학문의 질적 수준에 대한 엄밀한 준별과는 별 상관이 없는 듯하다.

 

이제 67집을 통해 한국기독교학회의 38년 넘는 역사와 궤를 같이 해온 「한국기독교신학논총」은 국내 40여개 교단 및 초교파 신학대학교, 그리고 일부 일반대학의 신학과/기독교학부(학과)의 학자들이 활동하는 신학담론의 주요 무대이다. 이 학술지는 앞의 두 잡지와 태생적 출발이 달라서 특정 기관의 신학적 색깔을 견지한 운동으로서의 매체가 아니라 신학대학 교수(또는 그 후보자)의 논문을 생산하여 한국 신학의 창조에 기여하기 위한 방편으로 기획, 출범되었다. 이 연합학회는 각 전공별로 따로 회집하는 13개의 지학회를 두고 있다. 그 지학회들도 유사한 형식의 학술지를 운영하면서 각 전공별 논문의 투고, 심사, 선정/탈락, 편집 등의 절차를 밟아 신학담론 발표의 장을 제공해오고 있다. 한국기독교학회의 이 포괄주의적인 구성에 대응하여 ‘복음주의’라는 별도의 색깔을 표방, 따로 회집한 한국복음주의신학회에서도 유사한 패턴의 학술지를 발간하여 이러한 논문 발표를 통한 신학담론의 창출에 일조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대별해볼 때 이 땅에서 이른바 ‘논문’의 형식을 빌려 전국적 필진의 동참과 함께 발표되는 학술지 논문의 수는 큰 틀에서 보면 대략 1년에 400-500편에 이른다. 물론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40여개에 이르는 신학교육 기관에서 어림잡아 3분의 2 이상 나름대로 교내 학자들의 논문 발표 창구로 학교별로 신학을 중심으로 하는 학술잡지 한 권씩은 대체로 발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의 발간횟수는 각 신학대학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연 1,2회에 이르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대부분 심사과정 없이 운영되는 이러한 내부용의 학술논문까지 포함하면 1년에 이 땅에서 논문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글은 적게 잡아도 1,000편이 넘으리라 추산된다. 한국에서 신학자의 이름을 명부에 올리고 활동하는 이들이 1,000명을 상회한다고 볼 때 이는 일인당 일 년에 평균 한 편 이상의 논문을 생산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밖에 현장 목회자들이 가장 많이 구독하는「목회와 신학」「빛과 소금」「월간목회」등의 다종 다기한 대중적 담론매체와 최근 활달한 유통 방식과 속도의 장점을 앞세워 확산되는 각종 인터넷 언론매체 등은 호흡이 긴 연구의 장이 되기보다는 이미 연구된 국내외 신학 및 목회적 담론을 확대, 증폭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런데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웹사이트의 공간으로 틈입하는 이러한 신학담론의 지형은 오밀조밀하다 못해 혼종적인 구도를 제공한다. 그 담론의 기원을 알 수 없는 각종 합성물들이 신학의 이름으로 범람하면서 책임 있고 지속적인 합리적 대화의 창구보다는 정치적 공박과 감정적 좌충우돌의 소모적인 각축장을 벌여놓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렇듯, 전자매체의 속도가 담론의 유통시장에 주요 변수로 작용하면서 사이버 세계의 신학적 의미를 반추하는 작업이 제출되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담론은 독자의 진중한 독서노동 가운데 치열한 토론을 통해 곰삭히고 온축되기보다 가볍게 소비되며 망각되는 포스트모던의 특이한 체질을 형성해오고 있다.

 

신학담론의 창출 매체는 논문 이외에 종종 저서의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저서는 신학자 본인이 기획하여 만들어내는 주제별 연구저서가 있고, 교과서의 틀을 갖추어 수업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개론적 수준에서 출간하는 저서도 있다. 그런가 하면 여러 명의 연구자가 다양한 전공의 관점에서 공통된 주제를 다루거나 동일한 전공의 세분화된 영역에서 다채로운 주제를 소화하여 생산해낸 공동저서도 한 몫을 차지한다.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이 땅에서 출판되는 신학 관련 저서들은, 역시 그 못지않게 일정 규모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외국신학도서들의 번역본들과 함께 숱하게 쏟아져 나온다. 그것을 다 읽고 자리매김할 극진한 개인과 집단이 이 땅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담론 생산의 일선에 가담한 주체들은 그 ‘생산’ 자체만으로 학문적 성취를 거둔 채 제도권 내에서 나름의 평가점수를 얻고 자족하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양적으로 꽤 풍성한 이와 같은 담론 창출의 현장이 신학자 개별적으로는 공소하게 느껴진다. 피차 교통의 접점이 없이 자신이 생산한 논문과 저서가 어디서 어떻게 자리매김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희한한 자기실종의 현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숱하게 생산되는 그 신학담론들 사이에 상호간 도전과 자극의 접점이 형성되지 않은 채 각개 플레이를 통한 혼잡한 신학지식의 이합집산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그 와중에 우리는 너나없이 경쟁의 전선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또 부분적으로 학자연한 자족적 성취감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논저를 생산하고 출판하는 버릇을 이 땅의 신학담론이 형성되는 현장에서 별스런 성찰적 의식 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III. 신학담론의 성향과 특징

 

매해 쏟아져 나오는 1,000편 이상의 논문과 적어도 100권은 넘을 신학도서를 다 읽어내지 않고서는 이 땅의 신학담론에 대한 온전한 분류와 평가를 기대하기란 어려울 터이다. 띴 어목에서 나는 지난 5년 간 종사해온 학회의 학술지 편집 경험을 통해 동료 학인들의 논문을 공들여 읽어온 이력에 많띴 의지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개인적 독서는 종횡으로 확대되어 종합월계간지는 물론 신학 분야 타전공의 다양한 매체들의 발표 논문들, 그리고 각종 저서들을 내 손닿는 범위 내에서 열심히 읽고 그 요점 파악을 위해 담론의 지형을 가로질러온 유목민적 글 읽기의 경험도 포함하고 있다. 그 토대 위에서 이 땅의 신학담론이 보여주는 대체적인 성향과 함께 그 구조적 특징들을 일별해보도록 하자.

 

이 땅의 신학자들이 생산하는 신학담론의 형식으로서 논문쓰기는 그들의 일상적 글쓰기에서 대종을 이루는 듯하다. 그 가운데 첫째로 현저한 특징은 자신이 주로 서양에서, 서양의 원전들을 자료 삼아 공부하면서 써낸 학위논문을 중심으로 그것을 해체하고 편역한 논문이 자신의 학문을 소개하는 차원에서 일관된 추세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자신이 집중하여 파고든 영역의 정밀한 신학지식이라는 점에서 일단의 창의성도 있어 보이고, 밀도 있는 논증의 우수성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관되게 포착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논문에 각주화되고 참고문헌화된 자료의 거의 대부분(사실상 100%의 예가 허다하다)이 서양신학의 자료로 온축되어온 내용이 필자의 관점에 의해 재구성된 터라 그 신학담론의 정신사적 기초와 지식사회학적 토양이 무국적의 허공을 배회하는 인상을 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둘째, 이러한 첫째의 성향과 무관치 않은 현상이지만 이 땅의 신학 논문과 저서를 관류하는 또 다른 경향은 특정한 대가들, 더 정확하게는 연구자 본인이 나름의 이유로 대가로 여기는 ‘안전한’ 서양의 신학자들이 펴낸 원전에 주석적 설명이나 예찬 어린 평가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신학 일반에서 그 이름은 거의 정형화되어 있다. 가령, 복음서의 예수와 서신서의 바울을 필두로 고대의 교부들이 남긴 글들 가운데 어거스틴이 한 정점을 이룬다면, 그 이후로 가령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칼뱅, 웨슬리, 슐라이어마허, 바르트, 불트만, 본회퍼, 틸리히, 몰트만, 판넨베르그 등이 그 대종을 이룬다. 서양의 역사가 남긴 이와 같은 신학적 위인들은 그들 사이의 지명도에 비례하여 여전히 이 땅의 신학자들에게 공대를 받는 담론의 상전들인 셈이다. 그 의존의 강도는 워낙 심하여 그들이 신학담론의 주체로 여겨질 정도이다. 성서신학은 물론 교회사와 기독교윤리, 기독교교육학이나 상담학, 예배/설교학 등의 영역에서도 전공 연구자들이 그 분야에서 주로 공부한 대상을 중심으로 나름의 대가로 여겨지는 인물들의 사상이 담론 형성의 주된 꼭지가 되는 것 또한 별반 다를 바 없는 현실이다. 물론 가뭄에 콩 나듯이,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실종된 인물을 발굴해내어 신학적 조명을 가하는 희소 인물이나 자료가 없지 않다. 아울러, 이 땅의 선학들 가운데 신학과 목회 쪽에 몸담은 토종 인물들이 그들의 저서에 대한 분석적 평가와 함께 더러 그 이름이 호출되기도 한다(가령, 유영모, 함석헌, 김재준, 한경직, 박형룡, 변선환, 유동식, 안병무, 서남동 등). 그러나 전자의 주류나 후자의 비주류 모두 제각각의 신학적 영웅이 남긴 역사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신학을 분식하려는 경향은 집요할 정도로 강렬하다. 하여 자신의 주체적인 신학 언어가 탄생할 기미를 보이기도 전에 그들의 언어에 잡아먹혀버리고 마는 듯한 서글픈 사태가 발생한다. 그 가운데 신학이 신학답게 잉태되는 데 장애가 되는 심각한 문화지체 현상의 병통이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이 땅의 신학 연구와 담론 창출은 이른바 정치적 ‘진영’(circle)의 논리로 말미암는 강박에 눌린 상태에서 천편일률적 결론으로 귀착되거나, 특정 개인이나 조직의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적 천박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신학자들이 자신의 교단 내에 목회자 양성이라는 본업에 충실해야 하는 직업적 의무도 일단 작용하겠고, 그 울타리 안에서 교단의 정치권력과 버성기지 않기 위한 슬기로운 처세의 욕망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변인은 담론의 생산 양식과 생산 관계를 아우르는 신학자 자신의 주체적인 성찰과 함께 자신의 신학을 창의적으로 추동하려는 도전정신과 소통감각의 부재에 있다. 다시 말해, 신학자가 자신의 태생적 배경과 기원을 넘어 새로운 신학의 풍경을 개척해보려는 의욕으로 경계의 외연을 더듬는 치열한 신학적 사유가 빈곤하고 그 모험에 굼뜨다는 것이다. 이는 밝은 눈으로 폭넓게 자신의 학문 지평을 준별하려는 신체적 순발력과 복잡다단한 독서의 지형을 헤집으며 자기 신학의 작은 오솔길을 개척하려는 정신적 의욕이 무딘 데 주된 원인이 있다.

 

신학이 진보의 내실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근본주의, 복음주의, 자유주의, 민중주의, 종교다원주의 등등 제 나름의 ‘~주의(-ism)’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 어휘의 무거운 강박과 함께 함몰해서는 안 된다. 큰 틀에서 그 담론의 숲을 가로지르며 그 내면적 삶의 자리를 포괄하여 자기 신학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일 때 협소한 ‘진영’ 일변도의 논리를 혁파할 길이 열릴 수 있으리라 본다. 그것은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새로운 신학의 ‘창조’와 다를 바 없다. 그밖에 별다른 묘수는 없다. 창조는 그런데 동어반복을 통한 자기동일성의 복제와 거리가 먼 작업이다. 그것은 신학적 타자를 자기 신학의 울타리 안에 영접하고 환대함으로써 기존에 온축된 신학이 역사의 허물을 벗고 거듭나는 환골탈태의 미래를 향해 진보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보수신학, 개혁신학, (신)정통신학, 실존주의신학, 자유주의신학, 민중신학, 토착화신학, 종교다원주의신학, 공공신학, 과학적 신학 등의 미명 아래 자신의 신학을 발표할 때 그것이 빤한 결론을 추인하는 동어반복적 재탕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 ‘빤한 결론’은 기실 그 거창한 신학의 공소한 이름에 들려 휘청거린 결론일 뿐, 전혀 신학의 세계에 입문하지 못한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러니 그 담론의 형편이 텍스트의 단순한 주석적 논평이나 특정 개념의 비교분석을 넘어 창조적 구성으로 진화할 수 없는 것이다.

 

넷째, 이 땅에서 신학적 글쓰기의 형식에 의지하여 담론을 창출하는 부류들 가운데 나타나는 또 다른 여일한 특징은 글 쓰는 주체의 언표 방식과 의미 구성적 문법이 취약한 자의식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대로 원전의 권위에 자신의 지적 조공을 상납하는 첫 번째의 학문사적 이유와 상통한다. 거기에는 신학하는 현장의 언어를 발화하는 구조적 터전이 약한 나머지 모종의 심리적 불안과 함께 담론을 전유하려는 문체의 계발을 꺼려하는 탓이 크다. 다시 말해, 논문과 저서의 신학적 글쓰기에 사상의 아우라를 담고자 하는 글쓰기의 건축미학적 차원에 감감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산되는 수많은 비문과 오문의 일그러진 세계는 교정의 노동을 불가피하게 하지만, 많은 경우 교정이 아예 불가능한 파행의 굴절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면에서 한 가지 신기한 현상은 자기의 글쓰기 매체인 한글이 불안한 것인지, 그 한글로 표현하고 조형하는 개념에 확신이 없는 것인지 외국어와 한자어를 수반하는 빈번한 괄호처리에 대한 꾸준한 집착은 의미 소통상 굳이 필요 없는 군더더기를 만들곤 한다. 뿐 아니라 이는 형식과 문법을 소외시키는 원형적 의미지상주의의 현장을 드러내주는 기묘한 증거이다. 그러나 의미는 우리의 신학담론 창출 과정에서 재구성되는 것이지 선험적 규범으로 신학을 규정하거나 압도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신학자의 글쓰기에 드러나는 심리적 불안의 구조는 곧 이 땅의 취약한 신학담론의 토대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 내 잠정적 진단이다.

 

 

IV. 신학담론의 유통 경로와 문제점

 

예의 환경에서 생산된 논문과 저서 위주의 신학담론은 대체로 신학자들과 그들에게 배우는 신학도가 일차 소비자가 된다. 신학적 지식에 관심을 갖는 목회자들 또한 일부 소비층을 형성할 수 있지만 그 지분이 매우 미약하리라는 게 현재의 판단이다. 목회자의 서재는 좀처럼 신간 신학도서로 업그레이드되지 않는다. 매주 감당해야 하는 설교준비용 삽화나 발췌된 참고자료 더듬기조차 여간 분요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교회의 성장 판도에 대한 통계적 수치로 집중되는 목회자의 에너지는 신학자의 뻑뻑한 담론을 오래 되새김질하며 소화하는 데 배려될 여분이 별로 없다. 더구나 그들의 관점에서 신학자의 담론이 상극나 분 그들의 현실과 무관한 탁상공론이라 여겨지는 터라 이를 존중하는 심사로 공대하기보다 아예 외면하는 체질을 굳혀온 인상이 짙다. 신학대학 및 기타 교육기관의 학생들은 교수들이 생산한 논문과 저서를 불가피하게 학과의 전공 공부와 기말보고서 작성 등에 요구되는 참고자료 삼아 읽어야 할 처지에 놓인다. 물론 얼마나 공들여 독서하는지에 대한 세세한 정황앀 독량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천차만별의 독서지형이 형성될 터이기 때문이다. 경험상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추세는 이즈음 신학도의 독서세계는 발췌와 편독을 통한 지식의 모자이크화가 심해진다는 것이다. 인터넷 세대에게 익숙한 이 혼성모방의 ‘리포트’ 쓰기는 결국 신학논문과 저서를 ‘물화’하여 언제든지 간편하게 해체, 재구성하는 작업으로 채워지기 일쑤이다. 신학담론이 가장 두터운 소비층에게 일회용 티슈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운명처럼 유통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기호와 취향에 봉사하는 쪽으로 신속하게 소비되면서 핵심논지를 향한 치열한 탐색이나 활기찬 논의를 사장시킨 채 그나마 열악한 이 땅의 신학담론을 더욱 불우하게 소외시키는 것이다.

 

학술잡지와 저서 등이 나오면 대개 몇 권씩 대학 도서관으로 직행하는 판매경로를 따라 유통이란 절차를 거친다. 고정된 소비시장은 학회 학술지의 경우 자동으로 배송받는 각 학회의 회원들이고, 또 일반 대중지는 그 잡지의 정기구독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독서행위가 발표된 신학담론과 진지하게 부대껴 관련 담론의 특정 논지나 주제를 쟁점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신학자들이 공들여 제출한 논문의 성격이 학술적 가치를 올곧게 세워 공론화의 장으로 수렴되기보다 업적 평가의 여건을 충족시키는 기능적 차원에 맴도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단 써서 발표하고 출판된 자신의 논문과 저서의 행간을 뒤지면서 제 신학담론의 언어를 성찰하고 이에 시비를 거는 동료 신학자와 부대껴 진지한 토론의 장을 만들어내는 일견 지당한 학술적 마당에 우리는 매우 어색한 편이다. 자기 스스로 읽으며 고쳐 쓰지 않고 동료 신학자들이 시비 걸며 평가하지 않는 논문과 저서란 기실 태어나자마자 쓰레기통에 직행하는 사생아의 운명과 별반 다를 바 없는데도 말이다.

 

자신과 동료 신학자가 특정 논문과 저서에 담론의 위상을 부여하며 읽어준 흔적을 발견하는 사례는 그 당사자가 쓴 글의 각주와 참고문헌 목록에 그 자료가 인용되는 자리이다. 이 또한 ‘인용도’라는 논문 평가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피차 상부상조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적잖은 경우 그 인용이 논지의 핵심을 낚아채서 토론의 활성화로 이어지기보다 자신의 주장을 간편하게 대변해주는 편리한 수단으로 삼거나 외교적 장식으로 흐르곤 한다. 이를테면 그저 인용하기 위해 단순 인용하고 각주와 참고문헌을 일정 분량 채우기 위해 참조의 형식에 기대는 사례가 허다하 편리한 수단으그 와중에 인용한 그 자료의 담론적 요체가 어떻게 자신의 주장과 만나고 길항하는지 그 접점을 파악하기 어려운 피상적 만남으로 공전하는 병폐가 생겨난다. 비유컨대, 별로 비용을 들이지 않은 용병을 불러들여 제 성곽의 위세를 선전하거나 간편한 실용적 목적으로 공짜 도랑을 터서 제 논에 물대기에 골몰할 뿐 그 물의 영양가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격이다.

 

이는 우리 신학계에 매우 희소한 ‘서평’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게 내 관찰에 터한 소견이다. 그 서평의 제도적 인색함과 내용적 부실함은 논문이나 기타 형식의 글에 대한 예리한 인용과 거기에 결부하여 덧씀으로써 담론의 지형을 증폭시키는 동력을 감퇴시킨다. 사실 이 땅에는 신학저서의 서평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서평잡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출간된 도서들 가운데 지극히 적은 일부만이 몇 안 되는 대중잡지와 학술지의 제한된 지면에서 서평의 대접을 받을 뿐이다. 이 또한 저자가 옆구리 찔러 절 받기 식으로 잡지의 편집자와 서평자에게 책을 보내어 서평을 의뢰하거나, 출판사의 상략적인 의도로 서평을 ‘제조’해내는 방식이 거의 대부분이다. 굳이 ‘베스트셀러 만들기 공정’이란 잣대까지 들이댈 필요가 없는 것은 신학의 이름을 달아 만들어내는 베스트셀러 책이라야 기껏 5,000권을 넘기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나머지 대부분의 책은 1,000권정도 찍어내면서 저자의 학생들과 일부 열성 독자들, 나아가 인맥을 쫓아 연이 닿는 일부 지인들의 소개로 유통될 뿐, 제도권 서평의 정보에 이끌려 진중한 독서의 장이 열리기란 우리에게 기대난망이다.

 

그나마 제한된 여건 아래 유통되는 서평의 내용은 대체로 인상비평과 주례사비평의 언저리를 맴돌기 일쑤이다. 그 책이 나오기까지의 공정을 학술사적으로 개관하여 그 지형을 자리매김하는 쪽보다는 그 저서의 내부에서 내용을 요약하고 자신의 논평과 감상을 덧칠한 뒤 장단점을 모범답안 작성하듯 나열하는 통상적인 포석이 신학도서가 서평이란 대접을 받는 대체적인 방식이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신학사(神學史)는 워낙 이식과 모방의 관행이 위세를 떨친 탓인지 온축된 성취의 빛과 그림자가 온당하게 자리매김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안타깝게도 그 방면에서 생산된 이 땅의 ‘중요한 논문’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는 오늘 또 다른 논문을 쓰고 있다. 그동안 특정 방면에서 써내려온 논문들과 저작들의 계통 분류와 엄정한 평가가 없으니 중요함의 여부나 부실함의 정도를 평가하는 기준이 모호한 현실이다. 그 자리에서 번식하는 것은 ‘소문’의 채널이다. 이른바 ‘~카더라’ 식의 풍문이 사실을 대체하고, 삿된 오해가 공변된 진실을 잡아먹는 것이다. 그 소통의 혼란 가운데 무성해지는 각종 파편화된 정보는 결국 열린 담론의 장을 만들지 못한 채 그 메아리의 장벽에 부대껴 자동 소멸해버리곤 한다. 마치 눈먼 자들의 도시를 배회하는 컴컴한 군상들처럼 단 한 사람의 눈뜬 메시야를 고대하기라도 하듯, 우리는 변함없이 어거스틴과 캘빈을 주워섬기며, 바르트와 틸리히의 이름이 제조해낸 소문의 감옥에 다시 갇혀버린다. 그 컴컴한 감옥에서 제각각의 암중모색 가운데 서로는 서로를 향해 각진 타자로 외면하고 방기해온 것이다.

 

 

V. 넘어야 할 소문의 벽 - 경계 없는 태초와 종말을 상상하라!

 

이상의 논의에서 나는 신학 형성의 장과 그 유통의 경로가 대체로 부실하며 ‘소문의 벽’ 안에 갇힌 채 겉돌고 있는 현실을 진단해보았다. 신학이란 학문의 장에 몸을 담고 활동하는 신학자의 개별적 열정은 담론의 형성과 축적이라는 관문을 통과하면서 거기에 합당한 학문적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논문 및 저서의 생산이 업적평가라는 기능주의적 자장 안에서 맴돌 때 그 가운데 배분되는 열정의 진로는 합리적이지 못하다. 그것은 자폐적 회로와 연고적 진영주의의 논리에 빠져 담론의 용호상박을 위한 대승적 ‘교통 공간’의 창출로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생산된 각종 매체의 담론 역시 그 형식과 내용에서 공히 성공적인 유통의 채널을 확보하지 못한 채 실종되거나 왜곡과 편취의 구조 가운데 온당하게 자리매김되지 못하고 있다. 이 땅에서 생산되는 논저의 목록과 거기에 가담하는 신학자의 수는 많지만, 그것이 이 땅에서 학문적 ‘타자’를 확보한 상태에서 뚜렷한 자생적 신학담론의 장을 개척해나가지 못한 채 자기동일성의 회로를 선회하는 것이 그 대표적 증거이다.

 

이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기는 물론 어렵다. 가장 큰 틀에서 고려해야 할 변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와 사람이다. 신학의 물리적 하부구조를 제공하는 현행의 제도는 신학자를 기능공의 차원에 묶어둠으로써 인력을 소극적으로 관리하는 각 교육기관의 폐쇄적 관료주의에 기여한다. 그들은 자천 타천의 소모적 ‘섬김’의 노역에 진출하여 당의정처럼 포장한 제 신학의 모범답안들을 써먹기에 급급하다. 교내의 각종 보직과 범람하는 행정잡무에 짓눌려 차분하게 책을 보고 제 신학의 공정을 구상하며 그 담론의 진로를 기획할 여유를 확보하기도 만만찮다. 할당된 학생들의 교육과 졸업 후 진로에 자문하는 상담자로서, 또 지방의 경우 모자라는 학생들을 확보하기 위해 막막한 광야로 내몰리는 현실 가운데, 신학은 허울 좋은 명분이나 구호일 뿐, 신학자의 일상적 관심사가 되지 못하는 애물단지 같다. 더구나 물질자본주의의 위세가 기세등등한 이 시점에 신학대학의 작동체계는 그 자본의 위세 앞에 한없이 연약하고 비굴해진다. ‘생존’의 논리가 과잉 포장되어 약할 때 강해지기보다는 외려 그것을 빌미로 그 비굴함조차 정당화한다. 가난한 학교든, 넉넉한 학교든, 화려한 번영과 성공의 지름길을 ‘기금’ 확보에 두고 있는 터라, 아무도 그 부유의 욕망을 가로막질 못하는 형국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 제도는 하루아침에 변혁될 리 없고, 앞으로도 쉽사리 바뀌지 않으리라 본다. 어차피 자본과 함께 자본을 넘어가야 할 시대적 운명을 타고 태어났기에 제도와 구조를 탓하면서 시간을 보내기엔 현재의 한 시가 급하고 아깝다.

 

결국 신학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그 일선에 종사하는 신학자가 담론의 주역으로 다시 우뚝 서는 일이 긴요하다. 거창한 제도와 구조의 틈새로 파고들면서 신학자의 자투리 시간과 신학적 사유의 그물망은 늘 신선한 영감과 독서의 현장으로 가장 예민한 촉수를 뻗어야 한다. 논문 몇 편 써내고 책 몇 권 출판하는 일로 업적의 장식품을 삼는 현실 안주적 기능주의의 노동 가운데 이 땅에서 창의적인 신학담론의 장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 자신의 글이 추수하는 신학의 역사적 지형을 현재화하면서 그것이 창출되는 형식과 매개, 나아가 유통 경로와 그로부터 되먹임되는 지식의 파편들이 어떻게 상생적 관계 속에 어우러져 회통할 수 있을지 그 미시적 관계망의 작동원리에 눈떠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특정 교육기관이나 교단의 배타적 폐쇄성, 그리고 특정한 신학의 색깔로 동류관계를 구축해온 할거주의적 진영의 논리를 극복해야 한다. 그 자폐적 울타리를 벗어나 눈 밝은 학인들이 서로의 논문과 저서를 공들여 읽고 준열하게 평가하며, 그것이 서구 주도의 해외신학에 접속될 만한 틈새를 모색해야 한다.

 

제도의 분신으로서 신학자의 체제 구속적 경계를 넘어설 때 모래알 같은 신학자는 비로소 연대와 소통에 터한 관계 갱신을 통해 제 학문의 담론적 지형을 구상할 수 있다. 나아가 그 담론에 대한 메타비평적 성찰과 원근법의 조율 속에 진정한 신학적 사유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 거기서 담론의 반복성은 날렵한 문체의 비평적 진로와 함께 나선형으로 산포하면서 자기강박을 강화하기보다 해체하면서 극복한다. 그 배회하는 반복은 담론의 차이를 정밀하게 확인하면서 새 시대에 새로운 신학의 재료를 발굴하고 그 방법을 더욱 광활하게 개척하는 모험적 여정으로 열려 있다. 거기서 신학은 담론형성과 함께 시대의 전위를 선취하면서 사람살이의 천태만상 앞에 하나님의 은미한 비의를 품고 역동하는 신학의 미래를 본다. 거기에 정치와 경제의 편차들이 어울리며, 사회와 문화의 층층면면이 교호하고 예술과 종교란 이름을 걸고 생산하는 각종 작품들의 경연장이 펼쳐진다. 그렇게 원근으로 펼쳐진 삶의 무대에 미시적으로 관여하는 우리의 고유한 역사와 오늘의 일상사가 신학과 무관하다면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담론의 세계에서 소외되고 마침내 단절될 것이다. 서로간의 신학담론에 대한 신학적 대접이 실종되는 곳에 아무리 열정의 에너지를 제 신학의 메커니즘에 불어넣은들 그것은 아무도 누릴 수 없는 저만의 향기(또는 향기로 위장된 악취)로 소멸하고야 말 것이다.

 

그 모든 종말론적 소멸을 딛고 주류와 비주류가 따로 없이, 또 보수와 진보의 자가당착이 회개의 열매를 맺은 자리에 태초의 담론은 는개처럼 뭉실뭉실 피어오른다. 마치 꿈결에 스치는 신의 춤사위처럼, 혹은 불고 싶은 대로 임의로 부는 바람처럼, 신학은 저 모든 영역을 포월하면서 낮게, 멀리 흐른다. 신학은 아론의 혈통과 버성기며 사독의 계보를 떨쳐버릴 때 아비도 어미도 없이 시작과 끝을 잊은 채 홀연히 출현하는 멜기세덱의 반열에 등극할 수 있다. 그가 시원스레 표상하는 삶의 한 극점에는 태초와 종말을 아우르는 초월적 상상의 자유가 있다. 진리가 신학자를 자유롭게 하는 그 지점에 이르면 담론의 경계가 지워지며 그 역사적 기원도 망각된다. 다만 시간이 허락한 은총의 분깃으로 날마다 새로운 풍경을 피워 올리며 다시 시작할 수는 있다. 거기서 역사는 현재가 되고 미래는 은총으로 임재한다. ‘너무 늦었다’, ‘아무리 해도 따라갈 수 없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현실의 장벽은 너무 두텁다’, ‘어차피 제 밥그릇 제가 챙긴다’... 이런 패배주의적 변명보다 더 상쾌하게 우리의 신학적 두뇌를 거듭나게 하는 것은 그렇게 ‘다시 시작하는 나비’를 꿈꾸는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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