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외국인 출입국 관리소에 가보신 일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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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의와 공의"라는 단어보다 더 많이 회자되는 사회-신학적 용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종종 탁상공론의 추상적 개념으로 논의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최근에 어떤 보수 신학자는 단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기 까지 합니다.(성경, 특별히 구약성경에서 "정의와 공의"에 대해 조금이라도 제대로 공부했더라면 이런 편협하고 교조적인 주장을 하지는 않을 텐데. ㅠㅠ)

 

"공의(righteousness)와 정의(justice) 간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옳다고 평하는 것을 공의라고 한다면, 인간 측면에서 우리를 옳다는 것은 정의이다. 그리스도는 정의를 확립하려고 세상에 오지 않았고, 공의를 확립하려고 오신 것이다." (아마도 조직신학적 "칭의"개념에 몰입하다가 헛발질을 한 격입니다만. ㅎㅎㅎ)

 

어쨌든 아래의 공유하는 글은 이 중요한 성서 신학적 개념을 현 시국과 관련하여 피부에 와 닿게 설득력 있게 일갈한 글이니 꼭 읽어보기를 추천합니다. 글쓴이는 이범의 박사(Ph.D., 백석대학교 구약학)입니다. 그의 FaceBook (2019,11,8 게재) 글입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1]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어쩌면 진리로 여겨지기도 하는 몸과 마음에 굳어진 오랜 전통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외부 충격이나 환경의 변화가 없이 스스로 그 전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도 드물다. 더욱이 그 전통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줄 때는 오히려 그 전통을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을 정통 운운하며 이단아로 규정한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변화를 거부한다.

 

‘82년생 김지영’이 사회에 일으킨 파고가 적지 않다. 페미니스트들의 반란이라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비상식적인 남성들도 일부 보인다. 하지만 여친이나 아내의 손에 이끌리어 갔건, 자발적으로 갔건 영화를 시청한(책을 읽은) 대부분의 남성들은 먹먹함을 넘어 당혹스러움을 경험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반성했다는 남성들도 많지만 반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시방석에 앉은 듯 조금이라도 마음에 찔림을 받은 남성들도 적잖았을 것이다. 아울러 여성의 어려움을 이해했다, 여성(아내나 엄마나, 여친 등)에게 잘 해야겠다는 다짐(?)도 조용히 하지 않았을까.

 

글쎄다. 얼마나 바뀔지는 잘 모르겠다. 몸에 배인 오래된 관습이라는 것은 일종의 강력한 파워다. 본인 스스로도 인지못하는 파워, 그러나 반란의 물결을 경험할 때면 반사적으로 그 파워는 극렬한 저항이라는 어마무시한 괴력을 발휘한다. 솔직히 영화는 보지 않았다. 나로서는 너무 쉽게 상상이 가는 일상 영화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책은 도서관에 앉아서 좀 읽다가 덮었다. 내게는 신선함이 아니라 씁쓸한 사회상을 그대로 보는거 같아서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사람들이, 아니 남자들이 정말 몰랐단 말인가. 정말 그렇다면 내게는 그게 더 놀랍고 씁쓸한 현실이다.

 

내가 ‘이게 왜 문제가 되지?’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이 사회의 허물 수 없는 성(캐슬)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육아는 여성의 몫이라고 했던 오래된 관습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나 돈을 벌어와야 먹고 살 수 있는 사회의 불평등한 경제적 시스템은 이러한 관습을 고착화시키고 부추기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의 불평등을 고쳐나가야 하는 일은 그 불평등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 있는 사람들의 몫으로만 남아있을 때 변화는 거의 불가능하다. 때론 변화가 되더라도 더디고 또 감당이 안될만큼 고되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아픔을 외칠 수밖에 없는 그들의 목소리는 절규 그 자체다.

 

[2] 지난 3개월여 한국 사회는 ‘조국’이라는 블랙홀에 빠져들었다. 극우와 진보의 대결은 ‘조국’이라는 인물을 놓고 지지파와 반대파로 나뉘어졌다. 조국을 지지했다가 철회하고 심지어 조국 사퇴를 외치는 많은 청년들이 있다. 그들의 좁은 시각에 안타까움이 가득하지만 이 또한 이 사회의 단면을 잘 드러내기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청년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정의는 우주적이거나 국가 혹은 국민적인 넓은 개념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당장 이루어져야 하는 옳음이다. 과정이나 배경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조국 지지자다. 아니 나도 조국 지지자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내가 조국을 지지한다는 것은 그가 정의로운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나는 조국이 정의롭다고 생각지 않는다. 조국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의 소신과 그가 하려고 하는 일을 통해서다.

 

외모로나 소유로나 배경으로나 조국은 한국 사회 0.1% 안에 속하는 상류층임에 틀림없다. 각종 논쟁을 일으키는 발언을 하지 않더라도 침묵만 하고 있어도 그는 귀족들만의 리그에서 충분히 이 사회의 로얄패밀리로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강남좌파’를 자처했다. 그래서 고맙다. (나는 예수야말로 진정한 강남좌파라고 생각한다. 많은 것을 가지셨으나 스스로 그 권리를 내려놓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박수를 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와 같은 사람이 없으면 불평등이나 불의를 경험하면서 사는 많은 국민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알면서도 하나로 뭉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모멘텀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큰 불더미를 만들려면 많은 장작들이 한 자리에 모여야 하고 그것에 불을 지필 수 있는 불소시개, 즉 동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무조건 모여서 목소리를 내고 힘을 보여주자고 한다. 장작이 모이면 불은 붙을 거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은 호응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현실적이고 소극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장작들이 모인다고 저절로 불이 붙어서 활활 타오를 거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장작들은 불소시개가 먼저 있어야 모인다.

 

얼핏보면 불소시개는 모인 장작들에 불을 붙이는 아주 작은 역할만 감당하는 것 같지만 우리의 고정관념이 과소평가한 결과다.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불소시개는 동기이자 모멘텀이다. 불소시개가 나타나야 장작들은 그 가능성을 보고 보인다. 불소시개의 역할은 그 큰 장작더미를 태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잊혀진다. 장작들 역시 활활 타오르는 순간부터 그 불소시개는 잊어버린다.

 

극소수의 상류층임에도 불구하고 ‘강남좌파’를 자처한 조국은 바로 그 불소시개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는 한번도 자신이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한적이 없다. 오히려 그에게 덮어놓고 지지를 보냈다가 철회하고 심지어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그를 정의의 사도로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에 곧바로 실망하여 등을 돌린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정의의 사도가 아니다. 상류층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에 ‘공의’라는 화두를 끊임없이 던졌고 앞장섰던 것 사람일 뿐이다. 공의란 무엇인가. 아직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정의와 공의의 개념을 혼돈하고 비슷한 것으로 생각한다. 쉽게 말해서 정의는 옮음이고 공의는 공정이다. 억울함이 없게 하는 것, 그것이 공의이다.

 

힘없고 가난한 자라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정의의 대명사가 아니다. 성경은 절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말하지 않는다. 가난한 자라고 해서 무조건 그들의 편을 들어서도 안된다고 말한다. 반대로 힘 있는 자라고 두둔하거나 비호해서도 절대로 안된다고 말한다. 그것이 공의요(공평하게, 공정하게), 어느 한쪽이 억울함을 당하지 않게 판정하는 기준이다.(출23:3,6; 레19:1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들에게 지속적이면서도 강력하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편에 서 계시는 이유는 한 가지다. 정글 같은 약육강식의 인간사회에서 이들 네 부류의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말이다.

 

그런 이유로 성경은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와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라’(출22:25)고 말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조금이라도 바로 세우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자를 갚다보면 영원히 가난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아셨던 것이다.

 

유시민 작가의 대답이 멋지다. 사회자가 유시민에게 왜 이렇게까지 조국을 대변하면서 검찰과 대립하고 싸우냐, 조국과 얼마나 가까운 사이냐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제가 검찰과 싸우는 것은 조국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겁니다. 사회가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졌으면 누군가는 다른 쪽으로 당겨서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나는 그저 그 일을 할 뿐입니다. 그게 지금 내가 해야 할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회의 공의를 외치고, 공의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하시는 이유는 그것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정의이기 때문이다. 비뚤어진 것을 바르게 잡는 것이야 말로 옳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싸우시는 것도 그 이유이다.

 

성경에서 굳이 원어의 뜻을 찾지 않더라고 한글성경 개역개정에서 ‘가난한 자’라는 키워드로 검색해보라. 111회 나온다. 송사와 관련해서는 가난한 자라고 부자라고 어느 한쪽에 서서 판결하지 말라는 것 외에는 비교도 안될 만큼 거의 압도적으로 이들 가난한 자들, 즉 사회적 약자들을 변호하고 계신다.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10:2) 자신의 우월적 지위(기울어진 운동장)를 이용해서 그들의 것을 억지로 내놓게 하거나 속여서 빼앗는 자들에 대해 하나님이 직접 심판한다고 경고하신다.

 

[3] 자기자신의 고정 관념과 마주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이다. 자신을 객관화 시킬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야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도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간과하는 이유는 자기만의 관습대로 자기만의 렌즈 칼라로 읽기 때문이다.

 

성경 속의 인물들에 대해 정의할 때도 우리는 한 가지 키워드로 그 사람을 정의한다. 수백년 수천년 동안 깨어지지 않는 관점도 많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욥의 아내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않다. 고난 중에 있는 욥에게 아내로서 어떻게 그런 모진 말을 내뱉는단 말인가라며 분개하기도 한다. 어찌보면 그녀는 성경에서 악처의 대명사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정말 욥의 아내는 악처인가. 성경에 기록된 그 한 마디로 그의 인생을 정의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부부의 삶,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전 인생을 바라볼 때 욥의 아내는 어떤 여자였는가. 어떤 엄마였고 어떤 아내였는가.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별로 반문해본 적이 없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김순영, ‘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를 보면 많은 도움이 된다).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낯선 세계를 향해 자기를 개방하는 일이다. 삶의 방식을 바꿀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야 성경과 참으로 만날 수 있다.”(추천사 중에서) 오랜 시간 쌓이고 쌓여서 절대적으로 고착화된 우리의 관념들이 때론 우리의 창조적인 사고를 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일상에서 말하는 ‘수다’도 마찬가지다. ‘수다를 떨다’는 표현은 대부분 좁게는 아줌마들, 대부분은 여성들에게 주어진 수식어가 되어버렸다. 지금은 그래도 가끔씩 쓰기는 하지만 남자들이 모여서 수다를 떤다고 말하면 뭔가 몸에 맞지 않은 옷처럼 불편함이 느껴지는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것도 고착된 관념어구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러한가. 남자들의 모임이 여자들의 모임보다 말이 적거나 생산적일거라는 관념은 편견에 불과하다. 관심 대상이 다르니 토크 주제가 다를 뿐이다. 남자들은 토크에서 자기에게 직접적인 상관이 없거나 관심이 없는 타인의 주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거나 공감을 쉽게 표하지 못하는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두 눈에 빛이 들어오고 온갖 바디 액션으로 군 생활의 경험담과 무용담을 늘어놓기에 끝이 없다. 3년(지금은 2년)이었기에 망정이지 어느 나라처럼 10년 이상 군 생활을 했다면 세상은 온갖 남성들의 군생활 이야기밖에 없을지도 모른다(웃자고 하는 말에 버럭 달려드는 남자들 없기를 바란다).

 

천편일률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어도 보편적으로 남자들은 여자들에 비해 공감능력이 떨어진다고 본다. 솔직히 떨어져도 한참 떨어진다. 부부가 함께 쇼핑할 때면 남성들이 거의 초죽음인 이유는 단시간에 이룰 수 있는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가시적으로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남성들은 쇼핑은 그저 길고 지루한 시간일 뿐이다. 쇼핑을 함께 하며 공감해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도 성장환경에서 기르지 못한 것도 한 몫을 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남자들도 자기가 좋아하는 샵(자동차든 전자 제품이든)에 가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한다.

 

‘82년생 김지영’에서 말하고 있는 삶의 현실이 지금이라도 주목받는 것에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극히 정상이어야 할 삶이 얼마나 한 쪽으로 기울었으면 이러한 삶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까를 생각하면 슬프기도 하다. 주연을 맡은 정유미는 이와 비슷한 역할로 박중훈과 호흡을 맞춘 ‘내 깡패같은 애인’에서 다르면서도 거의 비슷한 캐릭터를 소화한다. 나는 이 영화도 ‘82년생 김지영’ 못지 않게 이슈가 되고 주목받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영화에서는 청년들이 얼마나 취업하기 힘든 사회인가를 꼬집는다. 그들을 보호할 아무런 사회적 장치가 없다. 취업이 안되어 자살 시도까지 하면서도 비참한 자기의 현실을 비관하고 있는 세진(정유미 역)에게 취업을 미끼로 어떻게 해보려는 기득권 남성들의 모습도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러고보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고 타인의 시선으로 현실을 바라보기 쉽지 않다.

 

[4] 외국에 나가서 이방인의 삶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때에야 비로소 말로만 듣던 고달픔과 외로움, 고독, 불안 등이 무엇인지를 현실로서 깨닫게 된다. 우리 이웃 중에 나그네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건 내 문제가 아니니까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 설사 내가 이방인이 되어 온갖 불안함을 마주하고 있어도 거기에만 함몰되는 경우가 많다. 그냥 지금의 자기 현실에만.

 

사람들은 국내에 있는 외국인출입국관리사무소를 방문할 일이 거의 없다. 그곳은 한마디로 임시체류자의 신분으로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관리하는 관청이다. 우리가 외국인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그곳에 가보지 않고는 잘 모른다.

 

외국에 가서 이런저런 억울한 일, 불편한 일, 불공정한 일을 당해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분들에게 나는 미소 아닌 미소로 말한다. “국내에 돌아오시면 외국인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보세요. 가셔서 10분만 앉아 있어도 우리가 어떻게 외국인들을 대하는지 잘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조금 웃픈 현실이지만 국가 간 관계라는 것도 한 개인들의 관계와 같다. 양국 사이가 친밀하고 양국 국민들의 감정이 좋을 때는 자국 내에 거주하고 있는 상대국 국민에게 상대적으로 호의를 베푼다. 법률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 나라에 여행 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양국 사이가 틀어졌을 때는 안 좋은 양국 정서가 양국의 관공서 즉 외국인출입국관리소에서도 그래도 드러난다.

 

“너희가 너희의 형제 중에서 송사를 들을 때에 쌍방간에 공정히 판결 할 것이며 그들 중에 있는 타국인에게도 그리할 것이라.” 쌍방간에 공정히 판결을 하는 거야 당연한 것인데 굳이 그들 중에 거하는 타국인에게도 그리하라고 덧붙힌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잊지말라고 강조하신 것이다. 분쟁의 내용과 상관없이 나그네라는 신분 그 자체로 부당함을 당할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나그네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고정관념이라는 틀에서 벗어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일은 어쩌면 시야의 넓이와 깊이를 더하는 일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하는 일에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음을 새삼 자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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