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베드로의 투옥과 교회의 간절한 기도”

행전 12:1-17

 

들어가는 말

 

초대교회 교부 가운데 터툴리안(Tertullian, 155-240년)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는 지금의 지중해 연안 북아프리카 공화국인 튀니지의 카르타지(Carthage)출신입니다. 그가 교회에 관하여 남긴 유명한 말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지금도 신실한 크리스천들에게 회자되는 명언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우리는 수많은 박해와 핍박, 흩어짐과 뿌려짐, 질시와 소외가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눈치 챕니다. 대표적 박해가 스데반을 공개 처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갓 태어난 예루살렘 교회는 민들레 홀씨처럼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흩어졌지만 죽지 않습니다. 흩어진 곳들에서 생명의 뿌리를 내립니다. 복음이 주는 부활 생명력으로 다시 일어납니다. 그러나 박해는 계속됩니다. 복음의 씨앗을 말려 죽이거나 혹독한 압제로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사도행전을 읽노라면 마치 출애굽기의 첫 장들을 읽는 느낌이 듭니다. 바로의 혹독한 박해에도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번성합니다. 그러나 박해는 갈수록 혹독해집니다.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며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합니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이스라엘 자손은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갑니다.”(출 1:11-12). 그러자 바로는 인종멸절(holocaust)이라는 “최종적 해결”(final solution)에 나섭니다. 남아가 낳으면 모두 나일 강에 던져 죽이라는 극악무도한 명령입니다.

 

절정으로 치닫던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극복하는 죽음으로 종결됩니다. 죽음에 처한 이스라엘 자손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으로 바로가 내린 죽음을 극복하게 된다는 종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민족으로서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 언약백성의 탄생 이야기와 신약 교회의 탄생 이야기는 흡사합니다. 모두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이며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는 말의 뜻이 좀 더 분명해졌으리라 생각합니다. 순교자의 원형이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이 없이 교회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야고보, 정치와 종교의 야합에 희생물 되다

 

오늘 우리가 배우게 될 본문의 내용은 초기교회의 박해상황과 야고보의 순교에 관한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로 열두 사도 중 하나였으며 예수를 따른 최초의 제자 중 하나였습니다(참조, 누가 5:10; 6:14; 행전 1:13). 그는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예수의 측근 삼인방을 이룰 정도로 예수와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제자이기도 했습니다(참조, 누가 8:51; 9:28,54). 그가 참수를 당해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의 처형은 스데반의 죽음 이후 잠시 평온했던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 큰 풍파를 예고하는 시그널이 되었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헤롯은 헤롯 아그립바 1세(주전 11년 – 주후 44년)로서 베들레헴 영아학살을 주도한 헤롯 대왕(주전 74/73년 – 주전 4년/주후 1년, 누가 1:5)의 손자이며,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깊이 관련을 맺고 있는 분봉왕 헤롯(= 헤롯 안티파스, 주전 20년 – 주후 39년, 누가 3:1,19; 8:3; 9:7-9; 13:31; 23:7-15)의 아들입니다.

 

“헤롯왕이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2절)는 간단한 문장 안에는 많은 것이 들어있습니다. 비참, 박해, 슬픔, 두려움, 폭력, 권력, 사악, 연약, 좌절, 허탈, 무력감, 잔혹 등. 당시에 목을 베는 참수형은 살인자에게나 내려지는 극형입니다. 야고보가 극악한 살인자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야고보를 참수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초기 교회가 언제 무기로 헤롯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했단 말입니까? 어찌하여 아무런 무기도 없는 사도 야고보를 극악하게 참수를 한단 말입니까? 그렇게 복음이 두렵다는 말입니까?

 

왜 헤롯이 초기 기독교회를 박멸하려고 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외부로부터 아무런 요청이나 보이지 않는 압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핍박하였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정치가로서 헤롯은 정권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종교문제를 다루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유대 지역은 유대교의 적극적 지지 없이는 다스리기 힘들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였습니다. 따라서 유대교의 지지를 얻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할 것이며, 유대교 가운데 바리새파와 우호적 관계를 맺는 것이야 말로 체제유지를 위한 중요한 전략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을 핍박하고 처형한 일에 대해 유대인들이 보여준 반응 속에 잘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이 이 일을 – 헤롯이 야고보를 칼로 죽인 일 – 기뻐했다.”(3절)는 것입니다. 헤롯은 유대 종교인들의 민심을 파악했던 것입니다.

 

아마 유대인들은 야고보의 참수형은 하나님이 배도(背道)하는 자들에게 내리는 극형으로 간주하며 기뻐했을 것이고(참조, 신 13:15), 유대인들의 민심을 얻기 위한 헤롯의 전략은 기막힌 성공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헤롯왕의 처사에 얼마나 큰 환호와 찬사를 보냈을지 상상이 갑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사도 야고보는 정치가 헤롯과 열혈 종교인들인 유대인들의 저열한 콜라보레이션에 의해 비극적 죽음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정치가 가장 추한 형태로 종교와 야합한 예로 남을 것입니다. 하기야 지금도 일부 종교인들이 정치권에 기웃거리며 어떤 이익이나 혜택을 바라는 추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에 슬픔을 감추지 못합니다. 교단 연합체의 회장 자리를 놓고 얼마나 꼴불견의 추태들을 벌이고 있는지요! 오죽하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을 한심한 기독교 총대들의 모임이라고 빈정대겠습니까? 회장 한번 하시면 가문의 영광이 됩니까? 아니면 뒤로 들어오는 각종 이권이나 돈이 있습니까? 아니면 청와대라도 들어갈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까? 정치가들 역시 종교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일들이 종종 있음을 역사는 증명합니다. 정치와 종교의 야합을 잘 보여주는 호국종교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라 할까요? 정치가 헤롯과 종교적 유대인들 간의 이해타산이 잘 맞아 떨어진 사건이 야고보의 참수형이었던 것입니다.

 

한편 왜 유대인들은 초기 기독교회의 발흥에 대해 그토록 반대하고 극심하게 핍박했을까요? 교회가 유대인들이 믿는 신앙 체계에 강력한 도전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 정도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앙에 대해 열정적이었다는 말인가요? 아마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들의 알고 있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설령 그렇다손 치더라도 좀 더 실질적인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즉 열정적인 유대교인들은 지금까지 그들이 누렸던 기득권들이 기독교회에 의해 강력하게 도전받고 있고 또 무너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더 이상 물러서면 유대교가 해체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말입니다. 유대교 자체가 몰락한다는 것은 그들의 삶의 유지 장치들이 끊어진다는 뜻도 됩니다. 그런 저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정치권(헤롯 왕)에 압력을 넣었습니다. “반체제적인 신흥 종교인 기독교의 싹을 초장부터 잘라버리는 것이 당신이 다스리는 이 나라에 평온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정치가들에게 “국가의 평온”보다 더 좋은 꿈과 환상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치와 종교의 이상한 만남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유대인들이 기뻐하자 헤롯은 칼을 들어 예루살렘 교회의 심장부를 겨눕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적 지도자 베드로를 잡아 죽이려고 옥에 가둡니다(3절). 그것도 무교절 기간에 말입니다. 베드로의 스승이신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잡혀 십자가 처형에 처하게 된 기간이 유월절과 무교절 기간이었음을 상기시키는 대목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교회

 

졸지에 야고보를 잃은 예루살렘 교회는 아마 패닉이었을 겁니다. 마음을 잡기도 전에 베드로마저 체포되어 투옥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큰 위기에 휩싸이게 됩니다. 앞으로 불어 닥칠 태풍 앞에서 예루살렘 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베드로를 옥에서 꺼내기 위해 온갖 힘을 다 써야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아니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었습니다! “함께 모여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배웠듯이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 “증언하는 교회”입니다. 특별히 기도하는 공동체의 모습은 사도행전의 머릿장들에 이미 예수께서 제시했던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도하며) 기다리라.”(1:4).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것을 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들은 그 말씀을 기억하며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1:14) 사도들 역시 “기도하는 일”에 힘쓰겠다고 약속한 일도 있습니다(6:4). 본문에 따르면 위기가 닥치자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12:12)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5절) 이 구절 안에는 렘브란트적인 대조가 들어 있습니다. 옥에 갇힌 베드로의 무력함과 교회의 간절한 기도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며 병렬로 이어집니다. 옥에 갇힌 베드로가 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행전의 내레이터는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더라.”(4절) “베드로는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더라.”(6절)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하는 쇠문에 이르게 되다.”(10절)라는 문장을 통해 옥의 구조, 지키는 군인들의 감호 방식, 죄수의 결박 방식 등을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베드로가 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베드로 역시 야고보처럼 처형을 당하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여, 베드로를 잊어라!” 아마 이런 뜻일 것입니다.

 

이런 절벽 같은 상황 앞에서 그들은 한 곳에 모였습니다.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모였습니다. 마리아의 집을 상상해 보십시오. 초기 교회는 요즘처럼 교회당 건물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300여 년 동안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자원하여 자신의 집을 모임 장소로 내어놓은 “가정집”에서 모였습니다. 자기 집을 기도 모임의 장소로 내어놓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마리아는 분명 경건하고 신앙심이 깊은 중년의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집에 시중을 드는 하녀(로데, 13절)를 둔 것을 볼 때 경제적으로도 넉넉했던 것 같습니다. 참으로 귀하고 훌륭한 여인임에 틀림없습니다. 마리아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초기 기독교회에서 믿음 있는 여성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고 컸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마리아의 집에 모여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공동체의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합심기도였습니다. “간절히”(5절)라는 부사는 “적극적으로”, “전심으로”, “몰두하여”, “열정적으로”, “가슴으로”, “진심을 담아”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진정성 있는 공동체 기도입니다. 이게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기도입니다. 위기에 있을 때 문제를 앞에 놓고 공동체가 합심하여 드리는 간절한 기도는 반드시 하늘에 상달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적적인 구출

 

천상의 메신저인 천사가 옥에 갇힌 베드로에게 나타납니다. 그로서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꿈꾸듯 한 대탈출(출애굽)이 이뤄집니다. 베드로의 옆구리를 내려쳐 깨웁니다. 결코 꿈이 아니라는 듯이 말입니다. 베드로는 천사의 지시대로 “그대로 합니다.”(8절) 절대 순종입니다. 띠를 띠고 신을 신고 겉옷을 입고 천사을 따라갑니다. 옥을 벗어나 거리에 나오자 천사는 떠납니다. 비로소 정신을 되찾은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11절)

 

격랑의 시간 속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잘 알 수 없습니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는 뭔가에 홀린 듯이 따라갈 뿐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맨 정신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쇠사슬에 채인 발목은 현실입니다. 사방에 둘러싼 옥지기들은 실체입니다. 한 점 햇살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동굴은 실재입니다. 그곳에서 환한 광채를 알아차릴 수는 없습니다. 그저 뭔가에 홀리듯이 끌려갈 뿐입니다. 그렇게 어둡고 캄캄한 긴 터널을 지납니다. “첫째 파수와 둘째 파수를 지나 마지막 쇠문까지 이릅니다.” 얼떨결에 바깥에 나왔습니다. 거리엔 사람들이 보입니다. 차들이 다닙니다.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 것입니다. 비로소 옥에서 풀려난 것을 느낍니다. 그때서야 고백합니다.

           · 뒤를 돌아보니 기막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 내가 한 것이라고 아무 것도 없었다고.

           · 그저 꿈꾸듯 뭔가에 이끌려 따라왔을 뿐이라고.

 

이게 뒤돌아서서 바라본 우리의 질곡 같은 삶의 궤적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앙적 언어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섭리”는 신앙 고백적 용어입니다. 11절의 베드로의 “알겠습니다!”(11절)는 말은 단순히 지적 인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앎은 고백적 앎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경험한 일에 대한 고백적 언어입니다.

 

기대를 넘어선 구원

 

한편 마리아의 집에 모인 교회는 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했을까? 당뇨를 앓고 있는 베드로의 건강을 위해서? 베드로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해달라고? 빠른 시일 내에 베드로가 무사히 석방되게 해달라고? 여러분이 그 경우에 함께 있었다면 무엇이라 기도했을 것 같습니까? 그들처럼 우리도 사도 베드로의 건강과 믿음과 석방 등을 놓고 두루 기도했을 겁니다. 물론 그의 가족과 그의 사역과 교회를 위해서도 말입니다. 모두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베드로가 그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는 곳을 찾아 대문을 두드렸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의심과 놀람이었습니다(16절). 마치 베드로도 자기가 구출 받게 된 것을 환상을 보는 듯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들 역시 베드로의 나타남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기도를 했어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기도는 진실성이 없었단 말인가요? 기도해 놓고도 정작 기도한 것이 이뤄지니까 못 믿겠다고 하는 반응은 신앙이 없어서인가요? 그건 아닐 겁니다. 간절히 기도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절박할 때 드리는 기도는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매달리면서 드리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정작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그들은 도무지 믿을 수 없었습니다. 대문을 두드리는 베드로의 음성을 듣고 너무 기쁜 나머지 문도 열어주지 않은 채 집안으로 뛰어 들어와서 “베드로 사도께서 오셨습니다!”라고 외친 어린 하녀 로데의 말에 “너 미쳤구나!”라고 말한 사람들이나 지금의 우리가 그런 경우에 보여주리라고 생각되는 반응이나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반신반의하는 반응을 믿음이 없어서거나 아니면 진실하게 기도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습니다. 사실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소망은 베드로가 풀려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적법한 절차에 의해 풀려나기를 소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베드로가 풀려난 소식에 의심했고 풀려난 실제에 놀랐습니다. 소식에는 의심으로, 실제에는 놀람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본문의 가르침 따르면, 그들의 기도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는지, 기도응답에 대해 그들이 어떤 반응을 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중요한 사실은 그들의 간절한 기도에 대해 하나님은 분에 넘치는 방식으로, 아니 그들이 차마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그들이 간구했던 모든 것들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응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기적의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복음”(좋은 소식)은 언제나 우리의 지상적 기대들을 넘어서는 하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놀람과 경탄”이야 말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기적)에 대한 온당하고도 적절한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가 우리의 업적이나 공로나 내세움이 될 수 없는 궁극적 이유입니다. 심지어 가장 간절한 기도라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베드로를 옥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 경탄할 뿐입니다. 이로부터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차분히 들어라, 그리고 전하라!

 

베드로의 귀환에 환성을 지르는 그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조용하라고 부탁합니다. 차분히 앉아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을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돌아온 베드를 “눈으로 보고” 놀라고 흥분하고 환호성을 지르는 공동체에게 사도 베드로는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내용을 “귀담아 들어보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보는 일”보다는 “듣는 일”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출해 내신 일을 들려줍니다.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였다.”(17절) 마치 출애굽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어야만 했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신약의 교회들도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는 그분의 위대한 구원사역을 교회 공동체는 차분하게 반복해서 곱씹어 들어야 할 것입니다. 주일에 신자들이 교회에 모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그곳에 있지 아니한 “다른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고 부탁하고 그곳을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위대한 구원에 대해 들었으면, 이제 그 구원 소식을 누군가에게 전해야할 시간입니다. 복음을 차분하게 들으십시오. 그리고 들은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십시오! 이것이 교회 공동체가 해야 할 일입니다. 먼저 듣고, 후에 전하십시오. 듣고 전해야할 내용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 소식 말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1. 신약 성경에 나오는 헤롯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보세요. 본문에서 헤롯왕은 어떤 동기로 교회를 박해하려고 합니까? 종교와 정치가 서로의 이익을 위해 야합했던 경우를 교회사 속에서 찾아보십시오. 지금도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습니까?

 

2.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에 대해 토의해 보십시오. 오늘날에도 이 문구가 적용될 수 있습니까? 어떤 의미와 차원에서 그러합니까?

 

3. 기도할 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기도하십니까? 기도자가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요? 진정성과 간절함이란 측면에서 기도에 대해 토의해 보세요.

 

4. 기도와 응답의 관계에 대해 본문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5. 왜 오늘날에는 공동체 합심 기도가 약할까요? 우리 시대의 정신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 개인주의 등.

 

6. 어린 하녀 로데와 모여 있던 어른들의 대조적 모습을 그려보시고 평가해보세요.

 

7. 17절을 묵상하면서 “들음”과 “전함”의 관계에 대해 말해 보세요.

 

Midland Dow Gardens, Midland, MI by Ardis Foster

Ardis Foster at Midland's Dow Gardens.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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