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같은 그리스도인들끼리 다투지 마세요”

행전 11:1-18

 

들어가는 말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복습하는 의미에서 기억을 되살려 봅니다. 유대인 베드로와 로마인 고넬료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 베드로와 이방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오고 있는 고넬료입니다. 서로 전혀 다른 방향에서 온 두 사람이 예수에 대한 신앙의 길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간의 인종적 장벽이 얼마나 높은지를 잘 보여줍니다. 서로 간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서로의 의중을 탐색하고 일정을 조정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에서 성령의 역할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당사자들이 서로에게 조심스럽고 예의바르게 일을 처리해가는 노력 역시 돋보입니다.

 

고넬료의 집에 도착한 베드로는 이방인들이 들어야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먼저 메시아 예수의 삶과 그가 이 세상에 계시던 때에 행하신 일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얼마나 심하게 예수의 사역에 반대하고 핍박했는지를, 마침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까지 저지른 야만적인 행동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죽였던 예수는 죽음을 뚫고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자신과 다른 사도들이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의 증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10:36-42). 끝으로 베드로는 말씀을 듣는 청중들에게 예수에 대한 신앙이 가지라고 촉구합니다. “그를 믿는 사람들은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습니다!”(43절)라고.

 

베드로가 이렇게 설교하고 있을 때, 그 설교를 귀담아 듣고 있었던 모든 청중들(이방인들)에게 성령께서 강력하게 임하셨습니다. 행전 2장이 “유대인 오순절”을 기록하고 있다면 행전 10장은 “이방인 오순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방언을 듣게 됩니다(10:46; 2:6).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큰일을 말했습니다(10:46; 2:11). 두 경우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 선포와 성령의 강림을 통하여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백성에 포함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인종적 장벽을 뛰어넘는 “새로운 인종”(new humanity)으로 구성된 신앙공동체라는 진리를 직면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다투는 유대 그리스도인들

 

가아사랴의 고넬료 집에서 일어난 “이방인 오순절 사건” 소식이 유대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사도들과 여러 형제자매들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아마 그들은 놀라움과 의아심 사이에서 혼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종과 지역의 경계선을 넘어 모든 사람들을 자기 백성으로 만드나 보다 하면서 놀랐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같은 급으로 보실까 하며 의아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은 부정한 집단이라고 배워왔습니다. 물론 이방인에 대한 구약 성경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관습이 오랫동안 전통으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혈통과 인종과 종교적 관습을 잣대삼아 하나님의 백성 됨을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잘못된 신학이 이처럼 오랜 세월동안 고착화되면 전통이 됩니다. 전통은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어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건드리는 사람은 이단아 취급을 받습니다. 전통이 모두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받아들이고 지키는 각종 전통이 정말로 하나님의 본뜻에서 유래한 것인지, 성경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인지를 살피지 않는데 있습니다.

 

물론 어느 집단이든, 어느 사회든 전통주의자들(traditionalist)이 있기 마련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골통보수”라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의 만들어 놓은 전통과 습관, 사고와 인습의 틀 안에서 안전감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그 틀이 인종이든 학벌이든 지역성이든 성향이나 취향이든 상관없습니다. 그 틀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끼리는 편안함을 느끼겠지만 그 틀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겐 언제나 배타적이거나 의심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유유상종은 이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오늘의 본문은 이러한 전통주의자들이 사도 베드로를 다그치는 광경을 보여줍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맹비난한 것입니다.”(2절) 그들의 비난은 “베드로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여기에 등장하는 할례자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물론 할례 받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유대인이란 말도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할례자는 단순히 할례 받은 자라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그들은 “할례주의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할례의식을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열혈 유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할례가 뭐 길래?

 

아시다시피 유대인들은 모두 할례를 받습니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진짜 유대인이라는 징표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에 조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에 입교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전통이었습니다. 이런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사도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매파였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비둘기파였을 것입니다. 추측하건데 1절에 언급된 “사도들과 형제들” 가운데는 적극적인 매파 할례주의자들도 있었을 것이지만 다른 한편 소극적으로 심정적으로 할례주의에 동의하는 비둘기파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애쓰는 베드로

 

예루살렘의 할례주의자들은 작심하고 베드로에게 “어떻게 무할례자들과 함께 앉아 식사할 수 있느냐?”는 말로 맹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식사의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서로가 영적으로 통하기 시작했다는 상징입니다. 달리 말해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과 영적 연대감을 표시하고 우애를 다짐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난을 듣는 베드로의 입장에선 자신의 행동을 변호해야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알아듣기 쉽게 설명한 것입니다. 이건 대단한 일입니다. 다혈질적인 베드로로서는 대단한 감정조절에 침착성까지 잃지 않고 자초지종을 차근하게 설명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추측하건데 오순절 사건 후 그의 성품도 많이 길들여지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에겐 성령의 열매들(갈 5:22-23)이라는 것이 하나둘씩 자라나야지 않겠어요?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면서 고넬료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간 사람들이 여섯 명이었다고 말합니다(12절). 달리 말해 그들은 할례를 받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참조, 10:45). 보시다시피 지금 베드로에 대해 심한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은 모두 할례자들입니다. 할례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을 향해 자신을 변호하던 베드로는 “나 혼자 그곳에 간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처럼 할례 받은 신자들 여섯 명도 함께 갔습니다! 그들도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분위기가 이 정도로 싸해졌으면 베드로와 같이 갔던 할례 받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나서야하는 것 아닙니까? 나서서 베드로를 지원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입을 딱 다물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추론할 뿐입니다만 다른 동료 할례파 유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의보다는 인간관계 때문에, 진리보다는 연줄을 중시하는 오래된 관습 때문일 것입니다. 참 아쉬운 대목입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자기가 보았던 환상에 대해 자세히 말했습니다. 고넬료를 찾아가게 된 것은 강권적인 성령의 인도였고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말합니다. 또한 설교할 때 성령이 폭포수같이 모든 청중들에게 강력하게 임하는 것을 보면서 얼마 전에 경험했던 오순절 사건(행전 2장)이 떠올랐고, 또한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반복해서 하셨던 말씀(행전 1:5), 즉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말씀이 생각났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 그리스도인들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처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보편적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다고 보고하면서 베드로는 단호하게 이런 말을 남깁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17절). 자신에 대한 베드로의 변호는 분명했습니다. “성령의 임함은 하나님의 주시는 선물이다!” “누구도 그 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는 일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요 무서운 죄악이다!”

 

잠잠해진 청중들

 

자초지종을 또박 또박 설명하는 베드로의 말을 들은 예루살렘의 할례주의자들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 역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18절)라고 말입니다. 특이할만한 점은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셨다”는 문구입니다. 회개는 인간이 스스로 이룩할 수 있는 어떤 업적이나 공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회개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세우거나 자랑하는 배지(badge)나 훈장이 아닙니다. 회개한 경험을 자랑질하는 것은 교만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회개 역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회개한 사람의 특성은 겸손함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회개하도록 이끄는 것은 그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영원한 생명 말입니다. 생명 역시 인간적인 모든 가능성 저편에 있는 것이기에 선물로 주어질 때만 우리가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1. 사도 베드로를 비난했던 할례자들은 누구인가? 무슨 이유로 그들은 베드로를 비난했습니까?

 

2. 누군가와 함께 식사하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누구와 함께 식사하신 경우”가 있었는지요? 찾아보세요. 아니면 바벨론의 궁중에서 겪었던 다니엘의 경험을 떠올려보시면 도움이 되겠습니까?

 

3.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대응하는 베드로의 자세로부터 우리가 배울 점이 무엇이겠습니까?(4절) 교회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경우 좋은 대답이 될까요?

 

4. 베드로와 함께 고넬료 집에 같이 간 사람들이 여섯 명이었다고 밝히는 베드로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침묵 행동에 질타하는 것은 아닐까요? 왜 그들은 침묵했을까요?

 

5. 본문에선 ‘성령’, ‘회개’, ‘생명’ 등을 선물이라고 부릅니다. 선물이란 어떤 것입니까?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십시오.

 

6. 같은 교인들, 같은 그리스도인들이면서도 왜 갈등이 이처럼 심한가요? 그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우리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어떤 방식으로 발생하나요? 어떻게 갈등을 치유해야하는가요?

 

7.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 사이의 갈등은 신학적입니까? 인종적입니까? 문화적입니까? 아니면 다른 요인들이 있습니까?

 

[제발 그리스도인들끼리 싸우지 마세요. 잘난 신학, 잘난 전통, 잘난 직분, 잘난 학벌, 잘난 지역, 잘난 재력가지고 싸우지 마세요.]

 

Snow Covered Grand Haven, MI. 2010-1-1

IMG_4923.JPG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신간 출간:『이사야서 I: 예언서의 왕자』 [1] 류호준 2016.07.26 870
646 신앙 에세이: “비움과 채움의 리듬” file 류호준 2018.02.18 131
645 클린 조크: 끔찍한 용어들, 그 맛을 잃다! file 류호준 2018.02.15 224
644 평신도를 위한 성경공부: “그리스도인, 영광스런 호칭” 류호준 2018.02.14 143
643 신앙 에세이: “헤어짐은 언제나 낯설어요!”(목회 일화 3) file 류호준 2018.02.13 985
642 신앙 에세이: “주소지가 잘못된 겸손”(체스터톤) file 류호준 2018.02.03 252
641 신앙 에세이: “슬픔을 짊어지는 사람” [1] file 류호준 2018.01.29 343
640 일상 에세이: “50년 만에 피는 야생화” [4] file 류호준 2018.01.25 407
» 평신도를 위한 성경공부: “같은 그리스도인들끼리 다투지 마세요” file 류호준 2018.01.24 237
638 “고대 이스라엘의 정치” (Norman K. Gottwald) file 류호준 2018.01.24 142
637 다니엘의 펀치 라인: "세개의 단상" 류호준 2018.01.23 95
636 평신도를 위한 성경공부: “고넬료 집에서 일어난 일” 류호준 2018.01.17 232
635 특강요약: “마음의 습관” file 류호준 2018.01.15 292
634 시: "빨래줄"(Clothesline) [1] file 류호준 2018.01.13 213
633 신앙 에세이: “누가 알아듣겠나? 누가 이해하겠나?” 류호준 2018.01.13 266
632 클린조크: "하나님의 손 가방" 류호준 2018.01.06 253
631 신학 에세이: “가슴(심장)으로 성경을 읽다!” 류호준 2018.01.06 238
630 신앙 에세이: "울지마 주안아!" (목회 일화2) 류호준 2018.01.04 735
629 신앙 에세이: "속이 상해도"(목회 일화1) 류호준 2018.01.04 332
628 평신도를 위한 성경공부: “가이사랴와 욥바에서 일어난 일” file 류호준 2018.01.03 183
627 신앙 에세이: "믿음은 누구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류호준 2018.01.02 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