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4.13 17:21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복음의 변증" (1)
지금 우리는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포스트모던 사회에 산다고 한다. 아무도 들이쉬는 공기를 의식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금 들이마시는 공기와 예전에 마시던 공기가 같은 공기이면서도 뭔가 상당히 다르고 새롭다는 것을 느낀다. 학자들은 모던이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렇다면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오면서 무엇이 다르고 새롭단 말인가? 원래 포스트모더니즘은 건축학에서 시작된 새로운 풍조였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사회문화전반에 걸쳐 사용 될 뿐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시대정신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사고(思考)에 있어서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이라 할 수 있다. 모더니즘을 설명하는 것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를 설명하면 자연스레 혹은 어렴풋하게 모더니즘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으리라.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선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을 부정한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거대담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편의상 절대주의에 대척점에 서있는 상대주의라고 한다. 진리라는 것도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유일한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다보니 자연히 기독교의 진리 역시 상대화의 대상이 된다. 소위 기독교 진리의 핵심으로써 (십자가)복음의 유일성은 매우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도그마에 불과하게 된다. 성경의 표현을 원용하자면 복음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일은 어리석고 바보스런 주장이며 좀 개화된 사람에게는 걸림돌(거침돌, scandal)이 된다는 것이다. 하기야 이미 성경은 십자가의 복음을 세기적 스캔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물론 모든 것을 상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아니 성경은 인생에서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것을 빼 놓고는 나머지 것들을 상대화시키며 살아가라고 가르친다. 하늘 아래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모두 잠정적이며 궁극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면서 모든 것들을 넉넉히 상대화시켜가며 살면 훨씬 가볍고 홀가분하게 자유를 만끽하며 거침없이 활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최종적인 것, 궁극적인 것이 있다는 전제 아래서만 가능하다. 즉 이생 말고 또 다른 생이 있다고 믿을 때만이 가능하다. 다른 생에서 이생을 바라볼 수 있을 때만이 이생을 넉넉히 상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군왕들과 권력자들과 학자들과 장군들을 바라보며 비웃으시는 광경(시 2:4)은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진정한 상대화는 궁극적 받침대, 즉 아르키메데스의 점(Archimedian point)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십자가의 복음은 바로 그런 천상의 전망대를 제공해주는 사건이며 아르키메데스의 점이다.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 복음전파의 핵심이며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복음 변증의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