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한 여름에 입은 겨울 양복 유감”

                                                                      I
약 22년 전 일이다. 목회 초년병으로 미국 미시간 주 동쪽에 위치한 중소도시에 한 자그마한 한인교회의 목회자로 청빙을 받아 이사를 하게 되었다. 부임하게 된 교회에는 교인들이래야 고작 십 여 가정 정도였다. 이사하던 그 날 미국 중서부의 여름은 무척이나 무덥고 습했다. 땀구멍이 열린 듯이 줄줄 물이 흐르고 무더위는 장난이 아니었다. 이사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날이었다. 게다가 짐을 싸고 싣는 일을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아내는 이제 다음 달이면 출산할 세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으며, 위로 3살짜리 딸과 1살짜리 아들이 치렁치렁 대며 엄마를 조르고 있었다. 약 200킬로 정도 떨어진 곳으로 직접 트럭을 몰고 가야하는 상황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트럭 운전을 해야 했다. 미국에 오기 전에 잠시 버스로 운전을 배웠던 일을 상기하면서 조심스레 트럭을 운전했다. 변속기어를 사용하는 트럭이었기 때문에 두렵고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해야 할 사람은 나였기 때문에, 그리고 아내와 자녀 둘 반을 책임져야하는 당당한 남자로서 이를 악물고 먼 거리를 운전해 갔다. 도착했을 때는 점심시간이 약간 넘은 시간이었다. 정해진 사택 주소로 차를 몰고 찾아갔지만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서운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갓 신학교를 졸업한 젊은 목회자를 받아들이는 교인들이 태도치고는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는 서운했지만 아무런 내색 없이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부엌 살림살이들을 담은 몇 개의 박스는 있었지만 공부하면서 남은 것이라고는 책밖에 없었고, 그래서 책을 담은 무거운 박스들이 이삿짐 대부분이었다. 비지땀을 흘리면서 혼자 이삿짐을 트럭에서 집안으로 옮겼습니다. 배가 언덕만큼 솟아오른 아내는 아이들 챙기고 이삿짐을 싸느라고 여간 힘든 기색이 아니었다. 남산만한 배위에 칭얼대는 한 살짜리 아들을 올려놓고 다른 한 손으로 이삿짐을 챙기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그럴수록 얼굴도 안 내미는 교인들이 정말로 미웠다.

                                                                      II
온갖 생각을 다하면서 이삿짐을 내리고 있는데, 드디어 한 분이 나타났다. 자신을 교회의 오 장로라고 소개하시면서 먼 곳에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다는 말과 함께 급한 일이 생겼으니 양복을 찾아 입으라는 것이었다. 숨도 못 돌린 상태에서 급한 상황이 무엇이냐고 정중하게 물었다. 처음부터 교인과 쓸데없이 부딪히면 좋을 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나로서는 처음 만남을 잘 만들고 싶었다. 그분의 설명에 의하면 교회에 외과 의사로 일하는 집사님이 있는데, 내가 이곳에 도착하기 방금 전에 병원에서 쓰려졌다는 것이다. 헬리콥터로 미시간대학 병원이 있는 앤아버로 후송했으니 빨리 심방을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매우 불안했고 걱정스러웠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처음으로 부임하는 교회에 오자마자, 그것도 이삿짐도 풀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엄청난 사고에 접하게 되었으니 당황스러웠고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일을 시작해야하는가? 심방을 간다면 가서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설교를 해야 하는가? 어떤 설교를? 찬송을 불러야 하는가? 찬송을 부른다면 무슨 찬송을 불러야할까? 교인들과 서로 통성명도 못했는데 그들을 만나면 이런 상황에서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중환자실에 있는 그 의사 집사님의 부인과의 첫 대면에서 무엇이라고 말해야할까? 수많은 생각들이 순식간에 뇌리를 스쳐갔다. 그런데 저쪽에서 쩌렁쩌렁한 소리가 들렸다. “전도사님, 안 들립니까? 양복을 입으세요. 심방을 가야합니다”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아내에게 성경과 찬송가를 건네받으면서 장로님께 다가갔다. “네, 가시지오” 그런데 장로님이 벌꺽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전도사님, 그 옷차림을 가려하십니까?” 그 당시 나는 난방차림이었다. 무더운 여름철이었고, 이삿짐을 풀고 있었고, 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난방은 어떤가? 어떤 의복을 입는 것이 지금 이 상황에 그렇게 중요하단 말인가?” 하며 급히 나온 것이다. “아니, 장로님, 빨리 가야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정색을 하고 오 장로님은 “심방을 가는데 양복을 입으셔야지요!” 말씀하는 것이었다. 얼굴을 보니 매우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이런 문제가 혹시 앞으로의 목회사역에 두고두고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알겠습니다. 그러지요” 하고 대답하고 집을 들어갔다. 방안까지 따라 들어온 장로님 앞에서 양복을 찾는 상황이 되었다. 방에는 온통 이삿짐 박스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옷이 들은 박스가 어디인가? “여보, 서성거리지 말고 당신도 찾아봐!” 다급한 마음에 아내에게 소리쳤다. 나와 아내가 양복을 찾고 있다는 것을 장로님에게 보여 주어야 하지 않는가? 이미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고 당황한 나머지 허둥지둥 거릴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구석에 있는 박스부터 차근차근 열기 시작했다. 이 박스는 책, 저 박스도 책, 그 다음도 책, 그 다음은 부엌살림살이, 그 다음은 애들 장난감… 도대체 양복을 담은 박스는 어디에 있는지? 원망스럽기만 했다. 시간은 흐르고, 마음은 조급하고,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장로님은 팔짱을 끼고 서계셨고, 애들은 덥다고 칭얼대고, 아내는 무거운 몸으로 이 박스 저 박스를 열어보지만 번번이 꽝이었다. “여보, 여기 양복이!” 드디어 발견했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동복이에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6년 전 겨울 미국에 올 때 입고 온 촌스런 주황색 양복이었다. 제일모직이었고 아주 두툼했다. 보기만 해도 땀이 흐르는 옷이었다. 입으려고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미국 입국 기념으로 보관하던 옷이었다.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며 쳐다본 오 장로님의 눈에는 ‘발견의 기쁨’이 충만한 듯 보였다. “전도사님, 그 옷을 입으세요!” 당차게 권고하는 것이 아닌가. “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마침내 눌러버렸다. 그리고 공손하게 “네!” 라고 답했다. 당시 온도는 33도가 넘었고, 끈적끈적하고 후덕 지근한 끔직한 날이었다. 7월 2일, 1985년! 아 어찌 이날을 잊으리오. 동복을 입고 보니 정말 가관이었다. 한 여름에 동복을 입고 매서운 장로님을 따라 심방을 나선 것이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기가 막히니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이렇게 새로운 임지에서의 첫날을 맞이하였다. 경상도 왜관읍의 한 장로교회(합동)의 장로로 계시다가 이민 온지 1년이 된 골통보수 장로님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III
내 경우처럼 긴급하고 특별한 상황에, 반드시 양복을 입고 심방에 임해야 하는가? 그것이 보수적 신앙의 표지는 아닐 터인데… 왜 보수적이라고 자칭하는 그리스도인일수록 다른 사람들에 대해 관용하거나 관대하지 못하는 것일까? 상대방을 이해해주고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주는 아량은 어디에 있는지? 풀러신학교 총장인 리처드 마우 박사는 그의 한 책에서 고집스럽고 급하고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남을 판단하는 무례한 기독교인들에게 ‘개화된 정신’(christian civility)을 가질 것을 권면한다.1) 단정적이거나 독단적이지 않는 유연한 사고, 자신이 틀리다면 언제라도 바꾸겠다는 생각아래 큼직한 그림을 그리는 스케치형의 개방성,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려는 오만과 교만을 거절하는 겸손, 무리하지 않고 언제나 적절한 생각을 하는 성숙한 마음 등을 개화된 그리스도인들의 덕목으로 꼽는다.

                                                                     IV
오 장로님은 자기방식대로 그렇게 배웠고 그런 것이 몸에 익은 분이었다. 항상 자기는 '정통보수적 장로교 장로'라고 하였고, 또 자신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자기 열심이 언제나 여러사람들을 다치게 하곤 하였다는 점이다. 이제는 한국교회의 장로들의 신앙적 성숙도가 많이 나아졌겠지만 그래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아직도 교회의 직분자(목사, 장로)들이 가야할 길은 먼 것 같다. 비본질적인 것에는 목숨을 걸고 본질적인 것에는 무지하다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율법사들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신경을 끄고 살자. 왜 사소한 일들에 목숨을 걸고 다투고 싸우는지? 복음(좋은 소식)을 위해 목숨을 걸자. 영원까지는 이어지는 가장 중요한 인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 장로님, 장로님도 이제는 많이 바뀌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천국에서는 동복을 입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것만은 확실합니다.

                                                       (2007년 2월 9일에)

1) Richard J. Mouw, Uncommon Decency: Christian Civility in an Uncivil Worl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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