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27 17:23
“당신은 집에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창세기 3:24; 누가 9:57-62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 3:24)
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눅 9:57-62)
토마스 월피
미국의 저명한 작가인 토마스 월피(Thomas Wolfe)는 1938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살아생전 그는 미국 문학이라는 대평원을 가로질러 가장 위대한 거인이었다는 평을 받습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의 이 화려하고 재능이 많은 작가는 자체 모순적이고 극단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성향 때문에 그는 사람들의 내면의 깊은 요구와 필요들을 터치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가 쓴 소설 가운데『당신은 집에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You Can't Go Home Again)가 있습니다. 상상에 의한 소설이라기보다는 자서전적 소설입니다. 그는 그 작품에서 탁월한 스케치로 자신의 개인적 슬픔과 깊은 실망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작품의 내용을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죠지 웨버(George Webber)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새내기 작가로서 엄청난 성공을 얻게 됩니다. 그가 쓴 소설은 자기가 어린 시절 살았던 고향에 대한 신랄한 비판적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그 동네 사람들은 그 소설이 출간되자 고향에 대한 폄하요 모독이라며 살해 위협까지 보냈습니다. 물론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대박을 터뜨린 소설이 되었고, 그로 인해 웨버는 젊은 시절 그가 꿈꾸던 이상의 대 성공을 얻게 됩니다. 마치 알렉산더 대제처럼 그는 아주 일찍이 자신의 분야에 알려진 것들은 모두 정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웨버는 곧 불편하고 놀라운 진실을 배우게 됩니다. 즉 유명해지고 많은 재산을 얻게 되었다고 해서 궁극적인 만족을 얻은 것은 아니라는 매우 소박한 진실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렸을 적 자랐던 고향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젊은 날에 만끽했던 소박하고 순전한 기쁨을 어느 정도라도 다시 갖고픈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고향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마음 깊이 오랫동안 간직했던 옛 추억들을 하나씩 꺼내었습니다. 마치 유화를 그리는 화가가 즐겁지 않은 색깔이나 선들을 덧칠하여 없애듯이 그는 추하고 흉하고 불행했던 기억들을 하나씩 다 지워버렸습니다. 오로지 즐거웠던 추억들만을 곱씹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그의 꿈들과 장밋빛 추억들은 잔인한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퇴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바뀌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 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 때 비로소 진실이 동터오기 시작했습니다. 어제로 돌아가는 길이 영원히 닫혔다는 진실이었습니다. 월피의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웨버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가족에게로, 당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당신은 젊은 날에 꿈꿨던 영광스런 삶과 유명 해지는 꿈들로 돌아갈 수 없다.… 당신은 한때는 영원한 듯 보였지만 지금 보니 늘 변화해가는 옛 형식들과 체계들과 제도들에게로 돌아 갈 수 없다. 당신은 시간과 기억의 도피처로 돌아갈 수 없다.” 월피가 이렇게 씁니다. “그는(웨버)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뒤돌아가는 길은 없었다.” 토마스 월피는 인생의 골격 속에 깊이 각인된 한 가지 진실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You Can't Go Home Again)는 사실이었습니다.
과거에의 동경: 향수
우리들 대부분은 과거를 열렬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과거에의 동경으로 열병을 앓는 사람들입니다.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를 풍미하며 청년문화의 산실이 된 통기타 라이브클럽 쎄시봉(C’est si Bon, “참 좋다”)이 요즈음 뜨는 이유를 아십니까? 7080 추억의 노래 프로그램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를 아십니까? 아니면 이동원과 박인수의 듀엣으로 유명해진 정지용 시인의 ‘향수’(鄕愁)가 마음에 와 닿은 이유를 아십니까?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 재가 식어지면 /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 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라난 내 마음 /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차마 /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nostalgia)는 우리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 우리가 과거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 과거에 친숙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대해 낯이
설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과거의 어떤 측면들에 얽히고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과거를 마음에 아름답고 따스한 그림으로 만들어 내어 일종의 ‘신화’(神話)처럼
창조합니다.
· 우리가 과거를 사랑하는 이유는 미래의 알려지지 않는 요소들에 대해 주저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인생이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변화들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싫어합니다.
내 인생에서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다면 언제일까요? 39살에 모든 것이 정지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집 사람은 36살, 내 큰 딸은 10살이고 그 다음 아들은 8살, 셋째 딸은 7살과 막내아들은 5살로 있었을 때, 미국 오하이오의 한 중소도시에서 목회하고 있었을 때 목사관 앞뒤로는 넓은 잔디밭이 있어 아이들이 뛰어 놀기 좋았고 붉은 벚꽃나무와 은백색의 사시나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목사관 옆쪽으로는 체리와 사과 과수원이 있었고 텃밭까지 있어서 어머니는 부추와 고추를 심었습니다. 아이들을 가까운 초등학교에 데려다 주고 오는 일이 우리 집사람의 하루일과였습니다. 저는 부지런히 목회하고 공부하였으며 뒤뜰이 내다보이는 서재 안에는 항상 당대 최고의 음악 평론가며 해설자인 칼 하스의 고전 음악 프로그램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런 추억들을 잔인하게 다 빼앗아 갔습니다. 누구도 아무 것도 옛날 그 시절처럼 그대로 있지 못합니다. 주변의 일들이나 사물들 역시 점점 커가고 변화하기 때문에는 나는 그 변화에 맞추어 가야합니다.
몇 년 전 나는 나이 먹은 것을 잊은 채 신이 나서 다 큰 자녀들에게 옛날 옛적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의 크리스마스에 대해 허풍을 섞어가며 한참 이야기 하다 왠지 주위가 썰렁한 것 같아 둘러보니 자녀들이 동정적인 눈초리로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즉시 나는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잠시 동안만이라도 추억 속에서 돌아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좋았던 옛날들은 허무맹랑한 신화의 옷을 입게 됩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우리는 좋았던 옛날이라는 것이 허상(虛像)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 기독교 전통 안에서 가장 오래되고 경외 시 되는 책(성경)은 향수의 생존능력에 대해 매우 회의적입니다. 달리 말해 성경은 향수라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입니다. 즉 성경의 각 페이지마다 우리에게 “우리는 다시 집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의 가르침
예수님은 사람이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것이 궁극적인 불충성과 어리석음이라고 웅변적으로 가르치십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것이 어느 기회에 한번 그랬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삶의 스타일이며 입장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삶과 예수님의 증거 하신 것에 비춰볼 때 사실일 뿐 아니라 이 고대의 책의 가장 오래된 페이지 마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적합한 예가 구약 성경의 룻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남편이 죽자 룻은 자신의 고향 모압을 떠나 그녀의 시모인 나오미와 함께 유다 땅으로 가겠다고 결심합니다. 시모인 나모미는 룻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권합니다. 그러나 룻은 자신의 남편의 백성들에 대한 일편단심의 충절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천추의 고전적 명언이 된 말입니다. “나로 당신을 떠나라고 하지 마시며 당신을 따라오지 말라고 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가 어디로 가시든지 저도 갈 것이며 어머니가 어디에 머무시든지 저도 그곳에 머물겠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될 것이며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룻 1:16). 룻은 뒤돌아가서 행복을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집에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구약 창세기의 한 곳에는 아담과 해와가 어떻게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화염검으로 무장한 경비병을 에덴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에 세워 그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하셨는지에 대해 말해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없어! 너희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 갈수 없어!” 대문은 이미 닫혔고 영원히 폐쇄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오로지 환상이나 추억을 통해서 만입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과거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시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미래를 향하여 손가락을 가리키시며 앞을 보라고 부단히 애쓰셨습니다.
- 이러한 진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 같은 고전적인 이야기들 안에 깊이 각인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누굽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 무슨 일을 만나고 어떤 일들을 겪게 될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 - 앞을 향하여 여정을 계속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 또한 롯과 소돔의 파멸에 관한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여호와께서 소돔의 죄악들 도저히 참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소돔을 멸망시키시기 전에 하나님은 롯과 그의 가족들이 그곳을 떠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로부터의 탈출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여러분이 쌓아 놓은 것들, 자존심들, 타이틀들, 화려한 경력들, 직위들, 기득권들, 아집들, 텃세들, 자랑들 등 모두를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매우 사실적 묘사를 통해서
· 과거를 다 내려놓지 못했던 롯의 아내에게,
· 과거를 훌훌 털어버리지 못했던 롯의 아내에게,
· 과거를 떠나보내지 못했던 롯의 아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려주고 있습니다.
천추에 외롭게 서있는 소금기둥이 되었으니 얼마나 슬프고 비애에 찬 장면입니까? 창세기의 저자는 말하기를, “롯의 뒤에 있었던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소금기둥이 되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집에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과거는 앞에 있는 길에 눈을 고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굳어지게 하고 위축시키고 마침내 파멸시킵니다. 뒤를 돌아보지 마세요. 과거를 보지 마세요.
- 예수님도 한때 고향에 돌아가시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가보니 너무도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선지자가 자기 나라에서, 자기 친척들 가운데서, 자기 가문에서, 자기 고향에서 자기 집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마가 6:4).
이런 가르침으로써 그리고 자신의 예를 보여주심으로써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곳에서와 그 후에 이어지는 삶은 점점 자라고 확장되어가는 과정으로 어제와 과거들 위에 세워지기는 하지만 그곳에 결코 머무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인생의 가르침
우리네 인생 자체도 우리에게 “당신은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라는 진리를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고 생각은 우리를 약하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선택에 의해서든지 아니면 능력이 없어서든지 어쨌든 과거에 이루었던 발전 단계에 미치지 못하게 되면 심리학에서 말하는 “병적 애착에 의한 고착상태”(fixation)가 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뜻하지 않는 난관이나 장애에 걸리게 되어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손가락을 빠는 나이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손가락을 빨게 되는 어린이는 “병적 애착에 의해 그 당시에 고착된 경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를 가나 담요를 들고 다니는 어린아이의 경우는 심리적으로 어렸을 적의 안전을 집착하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병을 빨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어렸을 적엔 젖꼭지였지만 이젠 병뚜껑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예전의 발달단계로 돌아가고픈 강렬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 때문입니다. 이처럼 영적 차원에서도 동일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개인과 가정과 교회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 있는 일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과거를 그리워하며 그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매년 가을이 되면 미국의 고등학교 3학년들은 대학으로 떠납니다. 정들었던 집과 부모와 가족들과 동네를 떠나 먼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보따리를 챙겨서 차에 싣고 가깝게는 한두 시간 멀게는 며칠을 운전하여 대학 기숙사에 데려다 줍니다. 물론 자녀를 두고 떠나올 때 눈물짓지 않는 부모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그 자녀의 방을 그대로 둡니다. 한 학기 혹은 두 학기 후에 다시 집으로 돌아올 자녀를 생각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 가장 충격을 받는 당사자는 자녀들입니다. 대학에서 처음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의 심리적 충격 말입니다.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오는 자녀들은 집에 간다는 기대와 설렘을 갖습니다. 그러나 집에 오면 그 집에 예전에 자기가 있었던 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변했습니다. 당사자인 여러분도 그동안 변했습니다. 모든 것이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뭔가 생소하고 낯설고 익숙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졸업한 고등학교를 방문해 봅니다. 애들이 어려보이고 성숙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의 옛 친구들을 찾아가봅니다. 심지어 알지 못한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점차 여러분은 한 가지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집에 다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뒤돌아가는 길이 닫혔기 때문에 여러분은 앞으로 가야합니다.
17년간의 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제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뭔 줄 아십니까? 아직 자동차도 없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와 저의 집사람 그리고 중학생 초등학생들인 애들 네 명을 데리고 과천에서 버스를 탔습니다. 남태령을 넘어 용산을 지나 버스를 갈아타고 은평구 불광동을 찾아가서 그곳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파주시 금촌에 도착하여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라는 시골까지 찾아 갔습니다. 기억으로 서너 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그곳에는 장릉(조선 16대의 인조 왕릉이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곳을 찾아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장릉 뒷산에 위치한 군부대였습니다. 젊은 시절 힘겨운 군대 생활하던 51포병대대 차리(3) 포대를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사실 나만 감회에 잠겨 멀리 보이는 위병소와 캄캄한 추운 겨울밤에 보초를 서던 탄약고와 대공초소 등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상념에 잠긴 저를 보면 우리 식구들은 이해할 수 없단 표정으로 배가 고프니 자리 잡고 점심을 먹자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부대에서 나를 반겨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저 먼발치에서 쳐다보고 우리는 싸가지고 간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다시 터덜거리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한번은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 가보았습니다. 충격은 컸습니다. 내가 기억했던 것과 같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아득하게 멀었는데 이제는 겨우 150미터 정도! 학교 가는 길에 개울이 있었는데 수심이 깊어서 빠지면 죽는 개울이었는데 알고 보니 내 무릎도 차지 않는 도랑이었습니다! 운동장은 잠실 운동장만큼 큰 줄 알았는데 공한번 차면 운동장 담장을 넘어가는 정도였습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결국 ‘왜곡된 회상들’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슬펐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대로 있기를 바랐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슬픔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때로 있기를 바라겠지만, 그렇게 있으면 우리의 마음이 편하겠지만 인생은 현재의 실체에 직면하게끔 합니다. 삶은 여러분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교회의 가르침
교회와 교회의 역사도 여러분에게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종교(신앙)에 대해 향수를 갖습니다. 아마 그 어느 것보다도 종교에 대한 향수가 짙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향수병보다도 참된 종교(경건)의 의미를 죽이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해악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게 못 밖아 죽인 것은 옛날 좋은 시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들의 신화들을 계속해서 흔드시고 깨어 부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는 과거 안에서 자신을 고정시킬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계속해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헌신과 새로운 약속들을 보여주시면서 우리에게 죽은 자들로 즉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희는 앞을 향해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교회는 결코 뒤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역사와 전통은 참된 교회의 본질과 임무를 분명히 밝혀 놓았습니다.
- 물론 옛날의 승리들은 우리에게 영감을 불어 넣습니다. 옛날의 실수들은 우리에게 경고를 합니다. 산타냐(George Santayana)는 “과거를 기억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반복하는 저주를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 그러나 향수에 대한 우리의 성향을 고려해 볼 때,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우리가 역사에 대해 무지해서가 아니라 그 과거에 대한 완고한 집착 때문입니다. 우리는 친숙한 것들에 대해서는 구제 불능일 정도로 집착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낭만화 시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낭만화는 치명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아, 옛날이여~” “아, 좋았던 옛 시절이여~”는 우리 조상들의 신앙을 확인하고 확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의 신앙을 거절하고 배척하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좋았던 옛 시절”처럼 보였던 그들의 과거를 신앙하면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 시대의 불확실성에 대해 신앙으로 갈등하며 살았습니다. 모든 일들이 그들에게 친숙하고 익숙한 대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영웅들은 그들 당시의 사람들이었지 과거에 매여 산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과거에 얽매어 살았더라면 그들은 신앙의 영웅들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마르틴 루터, 존 칼빈, 요한 웨슬레, 주기철과 같은 분들은 전통의 챔피언들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새가 다시 부화 전의 껍질로 돌아 들어가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까?
· 나비가 애벌레로 돌아가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까?
· 그리스도께서 다시 무덤으로 돌아 들어가시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무지개 교회 십 주년을 기념하면서 우리는 우리에게서 손을 떨고 뒤로 물러서는 분이 아니신 하나님의 손을 잡고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십시오. 과거의 실패들과 과거의 성공들을
모두 묻어버리십시오.
-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합니다. 삶의
고정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올인하십시오.
-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동방의 현자들처럼
굳세게 순례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 나를 따르라 하신 그분을 따라 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