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설교: “하나님의 일등석”

2010.09.26 22:16

류호준 조회 수:15836

“하나님의 일등석”

누가 14:1, 7-14

 

 

1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식들과 습관들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남아 있는 잘못된 습관들이 있습니다. 이런 습관들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현하시는 실체를 잘 바라보면 고쳐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의 본문 속에 들어있습니다.

 

 

역마차 좌석

 

옛날 옛적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 아직 자동차가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대에 역마차(驛馬車, stagecoach)가 있었습니다. 미국 서부활극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마차입니다. 승합마차로도 불리는 이 역마차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6명 정도 태웠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6자리가 모두 똑같은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더 좋은 자리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항공권을 구입할 때도 일등석(first class), 이등석(business class), 삼등석(economy class)으로 구별된 비행기 표를 사는 것처럼 당시도 그렇게 좌석 표를 팔았다고 합니다. 요즘과는 달리 그 당시 좌석에 차별을 둔 것은 좌석의 크기나 제공되는 음식의 종류가 달라서가 아니었습니다. 좌석의 크기나 먹는 음식은 모두 똑 같았습니다.

 

좌석이 등급별로 차별화 된 것은 티켓을 소지한 사람이 비상시에 해야 할 의무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마차가 진흙탕에 빠졌을 경우, 혹은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야할 경우 어느 좌석에 앉았느냐에 따라 해야 할 일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당시 역마차에도 세 가지 종류의 티켓을 팔았다고 합니다. 물론 일등석은 가장 비싼 자리였습니다. 일등석이 주는 특권은 마차가 가다가 어떤 경우를 만나도 일등석 손님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가장 비싼 값을 지불했으니 가장 편안하게 여행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일등석 손님은 자질구레한 일들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반면에 2등석 좌석에 앉은 사람은 가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마차에서 내려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싼 티켓을 가진 사람, 즉 3등석 좌석 표를 가진 사람은 역마차에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해결해야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마차가 진흙탕에 빠졌을 경우 발을 벗고 진흙탕 속에 들어가 마차를 끌어내야 합니다. 아니면 마차가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다가 힘이 달리면 내려서 마차를 밀고 언덕 위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3등석은 땀을 흘리고 수고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3등석은 별 볼일 없는 초라한 자리입니다.

 

 

일등석과 특권

 

이런 관습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하 이게 우리네 인간 본성을 반영하는 좋은 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일등석에 앉는다는 것은 특권이 있다는 뜻이고, 귀찮은 일들, 허접한 일들, 몸으로 때우는 일에서 열외(列外)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가치 체계가 이것과 얼마나 엄청나게 다른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일등석의 은유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을 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글자 그대로 예수는 이 세상의 가치 체계를 완전히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뒤집혀진 가격표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골이 들려주는 비유입니다. 한 밤중 어느 유명한 백화점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날 종업원들과 손님들이 백화점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놀라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백화점 문이 열려있었지만 물건들은 고스란히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 놀란 것은 수백만원짜리 구찌 명품 가방에 붙어 있는 가격은 단돈 만원. 명품 켈러웨이 골프채 클럽은 단돈 5천원, 바나나 리퍼블릭 양산은 2천원, 입센롤랑 향수는 단돈 천원, 백양 메리야스 한 장은 오십만 원, 중국산 슬리퍼 한 켤레는 백만 원 등 가격표가 모두 뒤바뀐 것입니다. 상상을 초월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도둑 쳐놓고 아주 이상한 도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멋진 비유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싸다고 생각되는 것이 가장 싸고, 가장 싸다고 생각되는 것이 가장 비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치평가는 달라도 완전히 다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눈에 진짜 일등은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특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나는 모든 것들 위해 기꺼이 준비되어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눈에 진짜 일류며 진짜 일등급이다. 진짜 일류급 사람은 어려움을 기꺼이 떠맡는 종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진짜 일등석의 실체는 다른 사람들이 어려움을 해결해 줄 때까지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의 시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어려움을 해결하고 문제를 푸는 데 관심이 많은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일어난 일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던 마지막 날 밤을 기억하십니까?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갖으려고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요? 유월절 전날 저녁 다락방에 제자들이 모여 앉았습니다. 매우 어색한 분위기가 식탁 주위를 맴 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들은 하루 종일 흙먼지 길을 걸었습니다. 이제 숨을 돌리고 식탁에 비스듬히 누워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시원한 물로 피곤에 지친 발을 닦고 식탁에 둘러앉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바로 그 날 제자들은 열띠게 말다툼을 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누가 가장 높게 될 것이냐며 논쟁을 벌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머지않아 도래할 하나님의 왕국에서 누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인지를 놓고 격론을 벌였습니다. ‘경쟁심’이 몇 명 되지 않는 형제들 사이를 심하게 갈라놓은 것입니다. 그들 중 아무도 다른 사람의 발을 씻는 더럽고 하찮은 일을 하려들지 않았습니다.

 

자, 이제 우리 솔직하게 말해 봅시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앞서 있는 것이 여러분의 압도적인 열망과 바람이라면, 여러분은 죽어도 허리를 굽혀 다른 사람 밑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어정쩡한 상황에 있을 때 이런 것에서 구원하시기라도 하듯이 예수님께서 재빨리 움직이셨습니다. 그 움직임을 네 번째 복음서 저자는 정말 장엄한 문장으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구질구질한 일 곧 종이 하는 일을 하였으니 자기의 12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였더라. 발 닦는 일을 마치신 후에 자리로 돌아와 말씀하기를 내가 너희를 위해 모범을 보였으니 이것이야말로 너희가 진정으로 높아지는 비밀이다. 높아지려거든 이렇게 하라는 것이다. 마치 자기가 주인이나 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형편과 처지에 따라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고 위해서 일하는 것이 진짜 위대함의 뜻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근본적 필요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졌기 때문이다.”(요한 13장에서)

 

 

삶은 하나님의 선물

 

여기서 주의 깊게 새겨 들어야할 문구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종의 모범을 보이신 신학적 근거를 담고 있는 문구입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는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라는 문구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삶이라는 것,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마치게 된다는 것을 아셨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이 자기의 품위나 신분을 높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행하는 일의 성취나 업적에 따라 자신의 가치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님을 아셨습니다.

 

삶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혜라는 것을 아신 예수님은 행동양식에 따라 일류 이류 삼류로 나누는 이 세상의 방식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과히 혁명적인 가치관입니다. ‘자발적 섬김’이야말로 기독교인의 가치체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높은 가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진짜 일류는 가장 비싼 값을 지불했기 때문에 일을 가장 적게 하는 한다는 특권이나 우월감 혹은 나는 면제 받았다는 열외가 아닙니다. 참된 일류는 자발적으로 기꺼이 섬기려는 삶의 방식입니다.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것 같은 일이라도 기꺼이 손을 걷어붙이고 발을 벗고 나서서 수고하는 사람이 일류급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입(口)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발(足)로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머슴이 되고 종이 되는 것이야 말로 모든 가치 중에 최고의 가치입니다. 요즈음 일반 세상에서도 많이 회자되는 “섬김의 리더십”이 바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모델입니다.

 

 

가치판단의 근거: 하나님의 은혜

 

인간으로서 우리의 가치는 우리 자신들의 경쟁력 있는 성취나 업적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치는 ‘하나님의 행동’에서 옵니다. 부연하자면 예수에 대해 말한 내용(“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분”)은 우리 각 사람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심오한 진리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요한 사도의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하늘에서 와서 하늘로 돌아가는 하늘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치는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보여줍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것이 우리의 존재 가치입니다. 이런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가치는 외형적인 기준이나 장식이나 소유나 학벌과 같은 것에 따라 평가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귀중한 소유(재산목록 1호)이며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입니다(참조, 출 19:5-6; 벧전 2:9).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여러분은 최상의 명품(masterpiece)이며 일류(first class)이며 일등석 손님이며 귀인(貴人)들입니다.

 

사도 바울의 놀라운 명구로 말하자면, 우리의 우리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 15:10). 여러분은 여기서, 즉 이 사실에서 자유의 분수대(噴水臺)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자유의 분수대를 통해 흘러나오는 물로 우리는 서로의 발을 씻기고, 우리가 이 세상을 통해 길을 걸어가면서 만나게 되는 온갖 더러운 것들을 창조적으로 처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식사에 초대받았을 때 앞자리에 앉으려고 신경을 쓰지 말고 아예 처음부터 마음 편하게 기꺼이 말석에 앉으라고 권면하는 오늘의 본문의 참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즉 이미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풍성한 은혜로 우리 개인의 필요들이 채워졌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자아에 이러한 외형적인 것들을 - 체면, 신분, 학벌, 장식, 명품, 돈, 집, 외모, 여가, 가문 등 - 연연하지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청지기의 길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위해 파티나 잔치를 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우리의 사회적 신분을 승급시켜줄 손님들의 명단을 작성하느니 저녁 한 끼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 혹은 우리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식사에 초청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유명하고 잘난지를 보여주어 그들의 기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여흥과 예능을 사용해서 그들을 기쁘고 즐겁게 하고 축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삶을 가리켜 일명 “청지지의 길”(stewardship)이라고 부릅니다. 청지기는 맡겨준 집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집사’(執事)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고 싶다면 그리고 진정으로 더 좋은 삶을 만들고 싶다면 우리의 주님의 모본과 가르침을 따르는 것보다 더 좋은 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일류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자발적으로 종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섬김 자체를 즐거워합니다. 다른 사람을 섬긴다고 해서 자신의 체면이나 가치나 명예나 신분이 추락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문제의 일부분이 아니라 대답의 일부분이 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이 사회와 교회는 좀 더 밝아질 것입니다.

 

 

자발적 종이 되는 일

 

그런데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이런 일이 지금 여기 우리 모두에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은 전적으로 온전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일단 이러한 은혜로운 진리가 여러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면, 여러분도 하나님의 눈에 진정으로 일류가 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역시 이 세상의 필요들을 채우고 그들의 궁핍을 섬기는 자발적인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자신의 참 모습을 보기를 바라며, 진정한 자기를 바라봄으로써 사랑가운데 그런 진리를 자유롭게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2010년 9월 26일 무지개교회 주일 설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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