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22]

“정자(精子)인가 약속인가?”


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요절]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 9:8)

“it is not the natural children but the children of the promise who are God's children.” (Romans 9:8)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자기들의 조상으로 꼽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유대인들의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오래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따로 불러내어 한 민족을 만드시겠다고 약속하신 일이 있었습니다(창 12:1-3). 그들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나온 후손들이 진짜 이스라엘 백성이요 참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가운데는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되는 유일한 조건은 혈통과 가문이라는 것입니다. 혈통적으로 유대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커다란 영예요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다 야만인이요 이방인들이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들이라는 교만이 그들 마음에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경멸했으며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택의 기득권을 주장하였고 하나님을 자신들의 전유물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들의 하나님이었지 다른 사람들의 하나님일 수 없었습니다. 항상 ‘우리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이나 가문이나 학벌이나 재산이나 사회적 신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진 피터슨이 맛깔나게 표현하듯이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해 준 것은 아브라함의 정자(精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자녀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를 생산할 수 있는 나이를 지난 ‘죽은 자’와 같은 노인에게 도무지 믿기 어려운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내년 이 맘 때 즈음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기가 막혀 헛기침을 하며 허허 웃으면서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약속입니다. 약속의 자녀 이삭의 출생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웃음’(Laughter)이라는 이름 뜻을 지닌 이삭의 출생은 아브라함 가정에 큰 기쁨을 선사하였습니다. 이삭의 출생은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여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생생한 증표였습니다. 이삭은 자연적 출산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난 하늘의 선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함은 혈통이나 자연적 출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서 태어난 자녀라는 뜻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 위로부터 선물로 온 생명이었습니다.


약속의 자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람의 노력이나 행위로 얻어진 자녀는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선물은 받는 것이지 결코 버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선물은 고마운 마음으로 받는 것이지 땀을 흘려 노력해서 버는 것이 아닙니다. 달리 말해, 약속하신 분이 자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 실행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기쁨과 웃음의 자녀를 받게 된 것이지, 결코 아브라함이 노력하여 자녀를 얻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달리 말해 자신의 약속에 대해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실하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 그 사람의 외모나 혈통이나 재산이나 학벌이나 출신가문을 보시지 않습니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입니다(고전 1:26-31). 나의 나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가 에서와 야곱 중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만드시기로 하신 일입니다. 착한 일이 뭔지 나쁜 일이 뭔지 아무 것도 모르는 갓난아이 둘이 있었습니다. 에서와 야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작은 아들 야곱을 선택하여 그의 조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큰 민족’을 이루시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결정은 에서가 잘못해서도 아니고 야곱이 잘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말씀하려는 것뿐입니다. 야곱이 자기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큰 소리로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지요. 그의 삶의 역정(歷程)이 보여주듯이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을만한 최소한의 자격도 없었다는 사실만을 보여준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거짓, 탐욕, 시기, 질투, 집착, 변덕 등과 같은 수치스런 악들을 빼놓고는 어느 하나 제대로 된 덕목을 내세울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택하셨을 뿐 아니라 중간에 버리지 않고 끝까지 그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은 참 대단한 분이야!”, “어떻게 그렇게 참으실 수 있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 내 팽개쳐도 시원치 않을 우리를 어떻게 그렇게도 무던하게 참아내고 계실까?” 생각만 해도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었기를 천만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야곱과 같은 우리들 가운데 얼마나 살아남아있을지 궁금합니다.


믿음은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약속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과 신실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신다는 확신이 뿌리 깊은 믿음입니다. 어렸을 적 나의 아버지는 가정 예배를 인도하시면서 우리 자녀들과 함께 한 찬송을 자주 부르셨습니다. 그 찬송은 당신의 신앙고백이기도 하였지만 이제 나도 이제 지난 세월을 뒤 돌아볼 만한 나이가 들어 생각해 보니 훗날 자녀들 마음속 깊이 각인되기를 바라시던 찬송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찬송의 4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 까지는 늘 보호하시네.”(370장) 조용히 읊조리며 불러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맺은 약속(언약)은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는 확신은 우리의 어렵고 고단한 삶에 큰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자기의 약속에 대해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 보다 더 큰 믿음이 어디에 있을까요?

 

물론 보이는 현실은 이쪽을 가리킬 것이고 보이지 않는 약속이 가리키는 곳은 저쪽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갈등하고 방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덤으로 한 발짝씩 내딛고 있던 사라에게 하나님은 “내년 이 맘 때 너는 분만실로 갈 거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어지기에는 너무도 황당하고 꿈같은 요정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원래 ‘복음’(福音, good news)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현란하고 어지럼증을 수반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현란한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진짜 자녀인 것입니다. 기독교적 혈통이나 가문에서 태어나고 경건한 전통 안에서 교육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는 교인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상당히 다를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이런 구별을 할 수 없었던 영적 소경이며 고집쟁이들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그들과 같이 영적 동맥경화증에 걸린 분들은 없는지요? 스스로를 돌이켜 볼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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