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5.23 22:23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
요한복음 14:15:20; 16:7-15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성령이 누구시던가? 성령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인격적인 분인가 아니면 일종의 힘이나 세력인가? 아니면 어떤 유령과 같은 존재인가? 이런 질문을 하다보면,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에게 성령은 아주 흐릿합니다. 선명하지 않습니다.
· 성령은 우리 의식의 시계(視界) 안에 분명하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치 자욱하게 낀 안개 같습니다.
· 성령은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이미지나 심상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성령하면 마음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별로 없습니다.
어느 날 여러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사시는 동네에 갔다고 합시다. 그곳에 가면 여러분은 적어도 세분을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모두 만날 것입니다. 비록 처음 만나러 가지만 여러분의 마음에는 대충 그분들의 모습이나 이미지를 떠 올리면서 갈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성부) 하나님이나 ‘거룩하신 아들’(성자) 하나님은 어느 정도 머리와 마음속에 생각이 들어오는데, ‘거룩하신 영’(성령) 하나님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부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합니다. 우리는 성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따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릅니다. 만나기라도 하면 어떻게 말을 걸어야할지 잘 모릅니다. 그가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시작할 때 부르는 찬송 가운데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찬송과 영광 돌려 보내세. 태초로 지금까지 또 영원무궁토록 성삼위께 영광 영광”(3장)라고 노래합니다. 분명히 성령도 우리의 예배와 찬양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누구일까 어떤 분일까 주로 무슨 일을 하시는가 하고 묻는다면 머뭇거리게 됩니다.
예전에는 성령(聖靈)을 성신(聖神)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직도 그렇게 부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영어로 성령을 Holy Spirit이라고 부르지만 옛날식 영어에는 Holy Ghost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귀신? 고스트(Ghost)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유령이나 귀신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하기야 옛 스코틀랜드인의 기도문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었다는 것은 결코 놀랍거나 이상하지 않을 것입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이여,
유령들과 귀신들, 다리를 길게 늘어뜨린 짐승들
그리고 어둠속에서 갑작스레 뛰쳐나오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물론 우리는 더 이상 이런 구닥다리 귀신들이나 유령들을 믿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거룩한 신’(Holy Ghost)을 믿어야 합니까?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매 주일마다 신앙을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뭐를 믿는다는 것입니까? 성령을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 성령에 대해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인격)
· 성령이 하시는 일의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사역)
이런 질문은 여러분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사도 요한이 살던 시대에 몇몇 크리스천들이 이런 질문들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서를 쓰게 된 여러 이유들 중 하나가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성령은 무엇을 하십니까?” “성령이 하시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성령이 주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 일
요한 14:17f.에서 요한의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성령이 너희 안에 있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
다른 말로 하자면,
․ 성령을 통하여, 나 예수가 너희와 함께 살 것이다.
· 성령을 통하여 나 예수가 너희 안에 있을 것이다.
․ 성령을 통하여, 나 예수는 그저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 성령을 통하여, 나는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현재적 경험이 될 것이다.
․ 성령을 통하여, 너희는 나를 그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몸소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21세기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바는 이것입니다.
․ 성령이 없이는,
나는 너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나는 과거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나는 그저 추억일 뿐이다.
내가 설교했던 복음은 죽은 편지에 불과하다.
내가 지은 교회는 그저 기관(institution)에 불과하다.
․ 그러나 성령과 함께, 성령을 통하여,
나는 너희에게 가까이 온다. ↔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나는 지금 너희 가운데 임재(臨在) 한다. ↔ 과거가 아니다.
나는 너희의 경험 안에 들어간다. ↔ 단지 추억이 아니다.
복음은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 죽은 편지가 아니다.
교회는 나의 몸(body)이다. ↔ 단순히 기관이나 기구가 아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오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제자들은 외롭고 고독했습니다.
· 그들은 지금 그들의 주인의 고별사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그들은 자기들이 지도자 없이 내버려둔 상태가 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아무런 프로그램도, 아무런 계획도 목표도,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고아처럼
버려 둔 채로 그들의 주인이 떠나시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수께서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않겠다”는 말은,
․ 제자들이 떨어질 수 있는 깊고 깊은 구덩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에 의해 버림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아와 같이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마치 “오, 도대체 내가 어디서 그분을 찾아야한다는 말인가?”하고 부르짖었던 욥의 심정과 같은 것입니다.
․ 고아처럼 홀로 남겨둔다는 것은 지옥으로 내려가는 것이며,
․ 하늘 아래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희소식이 있습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현존과 임재이십니다.
- 성령은 예수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것을 말합니다.
- 결코 우리 홀로 있지 않다는 보증이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떠나야만 했던 이유는 성령을 통하여 그들과 영원히 함께 있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육체를 입고 계시는 동안에, 그분은 공간과 시간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번에 한 곳에만 머물러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과 조건 아래서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과 사귄다는 것은
․ 왔다가 시간이 되면 다시 떠나는 일입니다.
· 오고 가는 일입니다.
․ 만나고 헤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오심을 통해,
·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라도 계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오심을 통해,
· 이 세상에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헤어지거나 떨어져야할 장소와 시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외롭고 쓸쓸하게 남겨두지 않겠다. 내가 너희에게 오리라.”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두 번째 일
성령이 하시는 또 다른 일이 있습니다. 요한 16:8-11안에 그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오면 그가 세상에게 그 죄를 알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게 “너희의 죄가 이것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해준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그 지적과 고발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이 세상에게 조목조목 지적하여 들춰내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입니다.
․ 죄에 대해서라함은,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뜻이며,
․ 의에 대해서라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뜻이며,
․ 심판에 대해서라함은, 이 세상의 지배자가 정죄되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성령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라고 강권하신다는 뜻입니다.
․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보라고
성령께서 강권하신다는 것입니다. 언제 성령께서 이런 일을 하십니까?
제일 먼저 오순절 날에 성령께서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오순절 주일, 오늘이었습니다. 이 날에 성령은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이 사실을 보게 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라고 외쳤던 베드로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했던 분이 성령이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 마음에 큰 찔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슴을 치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들에게 그런 마음이 들게 했을까요? 누가 그들의 죄책감을 휘저었을까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 그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이것입니다.
․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확신시킵니다.
․ 종국에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확신시킵니다.
오늘 예배시간에 부른 성령에 관한 찬송(190장 “성령이여 강림하사”)의 가사가 오늘 따라 저에게는 새삼 충격적이고 놀라왔습니다. 보통 우리는 성령강림절(오순절)이 되면 영적으로 ‘뜨거운’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물론 조심해야합니다. 잘못하다가는 화상을 입을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ㅎㅎ). 물론 농담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강림절에 우리가 간구하고 기도해야하는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가슴에 뜨거운 그 무엇을 기다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190장)는 제가 어렸을 당시 기도원에서 종종 성령의 오심을 간구하고 불렀던 찬송가입니다. 그런데 가사를 자세히 음미하면서 이 찬송이 죄에 대한 애통과 회개의 마음으로 충만케 해달라는 찬송임을 오늘에서야 깨닫고 자못 소스라쳐 놀란 것입니다. 한번 읊조리면서 불러 보십시오.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한 마음 충만하게 하소서.
예수여 비오니 나의 기도 들으사
애통하며 회개한 마음 충만하게 하소서
성령이 하시는 일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통회하며 자복하게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 이웃들에게 “당신들은 죄인들이며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건 여러분의 몫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을 요약하자면, 첫째로, 성령은 우리에게로 예수님을 모셔옵니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로 오시고 우리와 함께 걷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성령은 우리에게 죄와 심판을 분명하게 알고 깨닫게 해주십니다.
세 번째 일
성령께서 하시는 세 번째 일이 있습니다. 요한 16:13-14에 따르면, 성령은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는 자기 말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자기가 들은 것만을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장차 올 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예수님의 것을 가져다가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성령은 예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달리 말해,
· 성령은 무대 뒤에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 그는 음지에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 그분은 자신의 존재를 눈에 띄지 않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 표면에 나서지 않습니다.
· 그분은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으십니다.
· 그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다해 우리에게 예수님께 집중하라고 외치십니다.
아마 여러분께서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성령은 세례요한과 같군요.”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성령은 세례 요한과 같습니다.
- 세례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저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일 뿐입니다.”
“주가 오신다. 그를 위해 길을 곧게 만들라.”고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 세례요한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쇠해야하고 예수는 흥해야 한다.”
“나는 점점 약해져야 하고 예수는 점점 잘되어야 한다.”
이처럼 성령은 세례요한과 같습니다.
․ 그분은 부단히 예수님을 위한 길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 그분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나는 쇠하여야 하고 예수는 흥해야 합니다.”
․ 그분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고, 그로부터 들을 것만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14:26).
․ 그분은 예수님에 대해 증거 하십니다(15:26).
․ 그분은 예수님께 속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심으로써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십니다(16:14).
성령과 크리스천의 삶
성령의 이런 활동은 직접적으로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에 연결이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성령으로 가득한지 안한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와 같은 질문에 대해 대답을 줄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해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 때가 언제입니까?”
․ 방언으로 말할 때입니까?
․ 뛰었다가 앉았다가 할 때입니까?
․ 마루에 쓰러질 때입니까?
․ 거룩한 웃음을 지을 때입니까?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 여러분이 성령의 현존과 임재를 의식하지 못할 때가 여러분이 성령으로 충만할 때입니다.
․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의식할 때가 여러분이 성령으로 충만할 때입니다.
달리 말해, 성령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상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것과 성령 충만하다고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실제로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서도 성령으로 충만한 것처럼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다시금 말합니다. 성령으로 가득하다고 느끼지 않지만 실제로는 성령으로 가득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요한 16:14에 따르면, 성령이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예롭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려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에 대해 말을 많이 합니다. 그들 입에서 성령이란 용어가 떠나지를 않습니다.
·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야한다”느니,
· “성령께서 그들의 삶에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이 있었다”느니,
· “성령께서 내게 말씀을 들려주셨다”느니,
· “성령에 충만할 때 그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좋았었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들다보면 “아하, 나는 이류급 신자인가 보구나. 나는 아직도 멀었나보다. 저 사람은 정말로 성령에 충만해서 사나보다. 늘 찬송하고 기도하면 한 두 시간 정도는 보통 방언으로 기도한다던데, 그런데 나는 뭐야? 성령께서는 그에게 길을 보여주신다고 하던데… 이곳에 투자하라, 어느 곳에는 가지 말라, 누구에게 가서 기도를 해주어라 등과 같이 직접적인 계시를 받는 일이 있다고 하던데…” 그리고 언제나 열등감이나 자괴감, 부족함과 무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게 맞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정말로 아닙니다!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성령의 임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언제 성령의 현존(임재) 안에 있을 때입니까? 이 때입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그분이 행하신 일에 영광을 돌릴 때입니다. 바로 그 때 그곳에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를 높이고 영예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종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신데렐라(한국말로는 콩쥐입니다)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 가운데 가장 무시되거나 구박받거나 잊혀진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재발견할 때만이 동시에 오순절의 능력을 재발견하고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선교신학자인 데일 브루너(F. Dale Bruner)가 윌리암 홀던(William Hordern)과 함께 지은 책(The Holy Spirit - Shy Member of the Trinity)에서 이렇게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교회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새롭게 성령에 집중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교회들이 새로워지기 위해 성령에 대해 새롭게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까? 나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내가 그런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분명하고도 단순한 이유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중심적인 일은 교회로 하여금 반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자기가 무시되거나 구박받는 신데렐라 신세가 된다고 해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분입니다. 적어도 왕자님만이 존경을 받고 왕자님만이 영광스럽게 된다고 하면 자기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하시지 않는 분입니다. 성령은 예수가 사람들의 관심이 없거나 무시되지 않는 한 자신이 무시된다 해도 전혀 상관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변화산 정상에서 성부 하나님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산 정상 구름 한 가운데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기뻐하고 만족해하는 아들이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 놀라운 환상이나 기적 같은 일이나 황홀경에 도취되지 말라.
․ 너희의 초점을 그분에게 두라. 그분이 너희 관심과 초점이 되게 하라.
․ 성령이 너희의 관심이나 초점이 되게 하지 말라.
․ 성경이 여러분의 관심과 초점이 되도록 하지 말라.
․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에 관해 너무 관심을 두지 말라.
․ 너희 눈을 그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라.
․ 그분이 말씀하는 것을 들으라.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전반적인 요점을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경에 관해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성경에 관한 책이 아닙니다. 마치 성령이 성령에 관해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성령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심으로써 그에게 영광을 돌리시는 분이십니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언제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이 돌아갈까요? 성령이 예수의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알리실 때가 언제인가요?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께 영광을 돌리게 될 때가 언제인가요?
- 복음을 설교하고 가르칠 때입니다. 복음에 대한 신실한 설교와 교육을 통하여 하나님은
교회 역사적으로 자기의 영을 교회의 삶속에 넣어주었습니다.
․ 개혁신학의 전통에 서있는 우리들은 ‘복음의 선포’ 없이는, ‘복음의 설교’ 없이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 개혁신학의 전통에 서있는 우리들은 성찬의 시행 없이 성령이 우리에게 온다고 믿지 않습니다.
말씀과 상관이 없는 영, 성례와 상관이 없는 영은 마치 엉성하고 믿을 수 없는 대포와 같습니다. 매우 위험천만하기 그지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령은 내게 있는 것을 가져다가 너희에게 알려준다”고 하십니다. 아멘.
[성령강림(오순절) 주일 설교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