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29 22:12
“슬픔을 짊어지는 사람”
마태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
지금은 눈을 씻고 봐도 없지만 내 어렸을 적에는 지게꾼들이 꽤나 많이 있었습니다.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무척이나 가난하고 힘들게 살던 시절이었죠. 시장터나 시외버스 터미널 혹은 기차역 주변에는 리어카 꾼이나 지게꾼들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짐을 들고 내리는 손님들을 기다리는 광경은 이제는 아득한 추억 앨범의 한 페이지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지게꾼은 짐을 배달해 주는 사람들이었지요. 바리바리 먹을 것들을 싸들고 도시에 사는 자식들을 찾아 기차역에 내리신 나이 드신 시골 부모들에겐 역에서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지게꾼들이 아주 고마웠습니다. 아마 요즘 사람들은 택배기사정도로 생각하겠지만요.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지게꾼의 뒤를 따라 나서는 기차역의 시골 어머니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양손에는 무거운 짐들을 들고 아들 딸네 집을 찾아가야하는 시골 아낙내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애처롭게 보이기까지 할 겁니다. 돈을 주고라도 지게꾼을 부르는 것이 낫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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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서 안에는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들어있습니다(5-7장). 산상설교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신 천국 사회상을 그린 비전문(Kingdom social vision)입니다. 그중 첫 대목이 “복 있는 사람들”에 관한 비전입니다. 일명 팔복 설교라고 하는데 그중 두 번째가 “애통하는 사람”에 관한 말씀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애통하는 사람”을 “슬퍼하는 사람”, “애곡하는 사람”, “탄식하는 사람”, “눈물 흘리는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힘들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군가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일어나 걸어갈 힘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실패, 낙방, 패배, 질병, 무기력, 좌절, 절망, 난감, 궁핍, 결격, 속수무책, 파산, 상실, 소외, 배척, 배반, 이별, 죄책, 자책, 공허, 허무, 억울함 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그중 몇 가지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두루뭉술하게 몰려왔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애통하는 자”로 번역된 그리스어(호이 펜텐투스)를 마르틴 루터는 흥미롭게도 “슬픔을 짊어진 사람”(die da Leid tragen)으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나에겐 의미심장한 번역처럼 들려왔습니다. “짊어지다”는 단어는 지게꾼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슬픔을 지게에 짊어지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가난한 지게꾼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슬픔을 짊어진 사람”과 “가난한 지게꾼” 이미지가 오버랩 되었습니다. 그러자 갑작스레 구약 이사야 선지자가 말했던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suffering servant of Yahweh)이 떠올랐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예표적으로 말했던 그 여호와의 고난 받는 종은 “정말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짊어지셨던 분”(사 53:4)이었기 때문입니다.
“짊어지다”는 말을 묵상하고 있었는데 불현 듯 평소 즐겨 암송하던 시편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시편 68:19입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양할지로다!” 지게꾼 하나님이란 표상이 떠오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다음의 네가지 영어 번역들과 루터의 번역을 서로 비교해서 읽어보세요.
(1) “Praise be to the Lord, to God our Savior, who daily bears our burdens.” (NIV)
= 날마다 우리의 짐들을 지시는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합니다.
(2) “Blessed be the Lord, who daily bears us up; The God is our salvation.” (NRSV)
= 날마다 우리를 지시는 여호와를 송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시기 때문입니다.
(3) “Blessed be the Lord, who daily bears our burden, The God who is our salvation.” (NASB)
=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여호와를 송축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4) “Blessed be the Master day after day. God heaps upon us our rescue.” (Robert Alter 역)
= 날마다 주님을 송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5) “Gelobet sei der HERR täglich. Gott legt uns eine Last auf; aber er hilft uns auch.” (루터 역)
= 날마다 여호와를 송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짐을 지우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도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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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짊어져야할 짐들을 대신 져주시는 예수님에 관한 찬송이 있습니다. 이젠 고전이 된 찬송입니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가 그 찬송입니다(369장). 첫 두 소절을 흥얼거리며 읊조려보십시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게 맡기세.”
하지만 영어 가사(작사자 Joseph Scriven, 1820-1886)는 내용상 한글 번역보다 좀 더 구체적입니다.
“예수, 얼마나 좋은 친구이신지요. 우리의 모든 죄와 슬픔들을 대신 지셨으니.
기도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요!
“What a friend we have in Jesus, All our sins and griefs to bear!
What a privilege to carry Everything to God in prayer!
한글 번역 찬송은 “[짐을] 맡다, 맡기다”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한편 영어가사는 두 개의 동사를 사용하여 “[짐을] 지다, 가져가다”(bear, carry)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찬송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우리의 무거운 짐을 지신 “지게꾼 예수님”으로 노래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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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저 위로 돌아가서 “슬픔을 짊어진 사람”(애통하는 자)이 복 있다고 하시면서 그들이 위로를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던 것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와 그의 스승인 예수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슬픔을 짊어진 분이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반드시 슬픔을 짊어지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로서 “슬픔을 짊어지는 사람”(애통하는 자)이 어떻게 위로를 받게 된다는 말입니까? 왜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이에 대해 본회퍼는 매우 적절하고 의미심장한 대답을 제공합니다. 길지만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십시다.
“루터가 여기서 그리스어 단어(호이 펜툰테스)를 ‘슬픔을 짊어지는 사람’으로 번역한 것은 의미심장하고 멋진 일이다. 짊어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제자공동체는 자신들이 슬픔을 유발한 것이 아니라는 듯이 그것을 뿌리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짊어짐으로써, 즉 예수를 따르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들에게 부과된 것을 짊어질 뿐이라고 말한다. … 그들은 자신들을 짊어지시는 분의 능력 안에서 그것을 짊어진다.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모든 슬픔을 짊어지신 분의 능력 안에서만 자신들에게 부과된 슬픔을 짊어진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공동체 안에서 슬퍼하는 자로서 존재한다. 그들은 세상에 낯설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능력 안에서 외인으로 살아간다. 이것이 그들의 위안거리다. 이 분이야말로 그들의 위안거리, 그들의 위로자이시다. 외인 공동체는 십자가 안에서 위로를 얻고,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위로자께서 기다리고 계신 곳으로 쫓겨났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얻는다. 이처럼 그 공동체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에게서 참된 고향을 발견한다. 이제와 영원히!”(나를 따르라, 145-146쪽)
마지막 문장, “예수를 따르는 제자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에게서 진정한 고향을 발견한다!” 가슴에 저미도록 사무치는 말씀입니다. 이게 진정한 위로가 아닌가요! 십자가의 길에서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제자들, 예수를 따르는 자들, 예수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들, “슬픔을 짊어지는 자들”, 그들에게 하늘 위로와 평안이 있으리로다. 아멘.
"눈 속에 크로커스"
좋은 글 읽었습니다.
눈을 똟고 나온 크로커스를 보며 시를 지어보았습니다.^^
크로커스
한홍섭
백설위에 드러난 크로커스
하얀눈을 녹이며 초록 보라 노랑을 내어민
생기 소녀의 아름다움
어둠의 대지 속에서
동토의 인고 속에서
때를 기다려 눈을 뚫고 나오는 크로커스는
어둠을 품고 있었다
슬픔의 지게를 이고 있었다
아니 품을 수 밖에 없었고
지고 있지 않을 수 없었다
처절함을 지냐야
꽃을 피우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