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25 23:20
일상 에세이: “50년 만에 피는 야생화”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잠언 27:17)
그러니까 지금부터 50년 전이었다. 당시 나는 서울 신대방동의 성남중학교 2학년생이었다. 축구를 좋아했던 나는 오후 수업후에 운동장에서 축구를 마치고 잠시 쉬느라 운동장 사열대 계단에 서서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느 친구가 내 뒤에서 팔뚝으로 내 목을 감아 세게 졸랐다. 물론 장난이었지만 목이 졸려 숨이 막힌 나는 정신을 잃었고 상당히 높은 계단에서 나무 쓰러지듯 앞쪽 아래로 쿵하고 넘어졌다. 눈을 떠보니 학교 양호실에 누워있었다. 앞 이빨은 부러졌고 턱은 심하게 찢어졌으며 (지금도 그 상처는 남아있다!) 교복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책가방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겁이 났다.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집에 간단 말인가? 집으로 가는 길은 아득했다.
학교가 있던 신대방동에서 우리 집이 있던 경기도 과천까지는 중학교 2학년생이 매일 통학하기에는 아득한 거리였다. 당시는 서울에는 전차가 다녔는데 전차표가 5원이었다. 그날 나는 학교에서 30분 넘게 걸려 전차 타는 신대방역까지 걸어가서 전차를 타고 노량진을 지나 한강대교를 건너 용산에 있던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집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야했기 때문이다. 시외버스 터미널에는 과천가는 시외버스가 1시간 반마다 한 대씩 있었다.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땐 방금 전에 버스가 떠났다. 터미널에서 기다렸던 1시간 반은 영원했다. “집에 가서 뭐라고 변명해야하지?” 모범생이었던 나에게 쏟아질 추궁과 수치감 등은 착한 어린 중학생에겐 감당하기 너무 벅찼다. 어쨌든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 버스를 타고 한강다리를 건너 흑석동으로, 다시 동작동 국립묘지를 지나 사당동으로, 남성동을 지나 관악산 남태령을 넘어 과천읍까지 가야했다. 피투성이가 된 교복을 입은 채로 비포장도로에 덜컥거리는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저녁 늦게 우리 동네 정거장에 도착했다. 보통 시간보다 상당히 늦은 아들을 정거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던 어머니는 내 모습을 보시고 거의 까무러치셨다. 평생에 그렇게 피범벅이 되어 집에 들어온 것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학교에서 집까지 거의 세 시간이 걸렸다.
몸을 추스를 수 없었던 내가 그 먼 거리를 혼자 간 것이 아니었다. 사고를 당하는 것을 목격했던 친구가 있었다. 정신 잃은 나를 엎고 양호실로 가고, 흐트러진 내 책가방을 챙기고, 나를 부축해서 전차를 타고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그렇게 아득한 시골까지 함께 간 친구가 있었다. “기의호”라는 이름의 친구였다. 중학교 2학년생의 눈물겨운 희생정신과 의리였다. 정말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했던 친구다. 당시 내가 살던 과천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던 깡촌 시골이었다. 그곳까지 나를 데리고 간 친구다. 우리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고 내가 야단맞지 않게 해주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같이 자고 우리는 그 다음날 이른 새벽 시외버스 첫차를 타고 다시 서울 학교로 등교했다. 중고등학교 6년을 같이 다녔던 친구다. 50년 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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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15도에 칼바람 부는 아주 추운 오늘 오후 50년 만에 그 친구를 찾아 만났다. 경기도 과천에서 김포로 말이다. 찾아간 곳은 전형적인 시골 모습이었다. 두꺼운 잠바에 벙거지 모자를 뒤집어쓴 노인(?)이 저만치 얕은 산자락에서 불을 지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 덮인 낙엽에 지핀 검불에서 연기가 무심하게 피어오른다. “혹시 의호 아닌가?” “누구시죠?” 친구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내가 누군지 알아 볼 수 없었다. 하기야 고등학교 졸업 후 45년 만에 만나니 누군지 어떻게 알랴. 가까이 가자마자 한참 만에 나를 알아본 우리는 서로를 얼싸안고 잠시 말을 잃었다. 서로 얼굴을 양손으로 비벼대었다. 목구멍에서 뭔가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애송이 중학생들이 60대 중반의 지공선사(地空禪師, 지하철을 공짜로 타고 참선을 하는 도사님, 65세 이상)들이 되었으니 말이다. 친구와의 극적 만남은 한 겨울의 칼바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지금 뭐하니?” “응, 목사야. 그리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도 하지.” “너는?” “응, 나는 말이야.” 이렇게 우리는 지난 50년의 이야기 실타래를 풀어갔다. 물론 중학교 2학년 때 그 사건의 전모부터 말이다.
흙과 함께 산 증표인지 친구의 손은 매우 묵직하고 투박하였지만 믿음직스러웠다. 중고등학교 6년 동안 말수는 적었지만 언제나 믿음직했던 친구. “의리” “신의” “헌신” “충성”을 떠올리게 했던 친구. 학교의 교훈이었던 “의에 살고 의에 죽자”를 생각나게 한 친구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부모의 압력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의 길을 가던 친구. 가족을 두고 이리저기 옮겨다녀야하는 외로운 군인 생활에서 야생화의 강인함과 아름다움에 눈이 뜨기 시작한 친구, 마침내 퇴역하자마자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었단다. 자연주의자가 되었다고나 할까? 땅의 솔직함, 들꽃의 초연함, 자연의 정직성을 몸으로 느끼면서 삶의 큰 그림을 그리게 되었단다. 작은 식물원을 만들고, 야생화를 하나씩 심어 기르고, 그러다 야생화조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모델을 개발하는 일에 여생을 보내고 있다.
오늘 그가 운영하는 “들꽃 풍경”을 둘러보았다. 50년만의 만남의 긴 회포를 풀기에는 서너 시간은 턱없이 짧았다. 떠나면서 친구가 저술한 『야생화 조경도감 365』를 기념선물로 받았다. 친구는 이런 묵직한 글로 깊은 속내를 담아내었다. “호준, 반 백 년 만에 피는 우리 야생화도 드물 터…” 기의호, 2018.1월에
“그치, 친구야, 50년 만에 피는 이런 우리의 우정도 아주 드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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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소개: 기의호는 경기 김포에서 태어나 성남고등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였고, 미국 워싱턴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였다. 오랜 기간 백두대간의 야생화 등을 답사한 경험을 토대로 15년 간 야생화 식물원을 조성 운영해왔고, 야생화 동호회 김포 들꽃 풍경을 이끌어오면서 답사, 전시, 강연 들을 야생화 홍보 및 보급 활동을 해오고 있다. 김포를 야생화 조원의 메카로 만들기 위해 김포야생화영농조합(법인)을 설립 운영하고 있으며, 야생화에 내재된 문화적 요소들을 식물원에 접목하여 야생화문화원을 만들어 원장으로 수고하고 있다.
김포 들꽃 풍경: 경기도 김포시 고촌리 풍곡2리 237-3 http://cafe.daum.net/DLFLScenery
2018.01.26 21:57
2018.01.26 22:10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반복되는 삶의 사이클에서
잊고 지낸 친구를 예기치 않게 만날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없죠.
삶의 즐거움은 소소한 것들의 발견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신학 공부가 더 넓은 안목으로 인도하는 문이 되었으면 합니다.
2018.01.26 22:35
우와.. 두 분 멋지세요!
아름다운 우정...서로를 알아보았을 때의 뭉클함이 느껴집니다. ^^
두 분 저서 제목에 365! 더욱 반가우셨을 것 같아요.
힐링이 되는 이야기 감사합니다.
2018.01.26 22:38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365. 365....
일상이라 부르는 그 날들......
에녹님도 365년을 사셨으니.. ㅎㅎㅎ
교수님 반갑습니다.
참으로 뜻깊은 시간이었겠습니다
저도 대학졸업후 38년만에 고교 대학동기를 담양으로 찾아가 만난적이 있었습니다
옛날이야기로 꽃을 피웠죠. 교수님은 더욱 애틋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50년만에 피는 야생화
그 아름다움과 향기는 마음에 남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