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19 13:44
"신학교육에 일침을 가하는 지혜자의 일갈!"
아래 글은 엊그제 출간된 엘런 데이비스의『하나님의 진심』이란 책 안에 잠언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느낀 것을 그녀의 글을 인용하면서 몇 자 적어본다. 그녀는 잠언에서 이야기하는 지혜교육에 대해 논하면서 현 시대의 교육을 꼬집어보기도 한다.
솔직하게 말해서 말로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속으로는 성공을 지향하고, 성공을 목표로 삼는 교육이 한국의 현실이다. 신학교육 역시 여기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는다. 내심 모두 성공한 목회자, 성공한 신학자가 되기를 바란다. 일종의 출세 가도를 달리고 싶어 하는 속물근성이 속에 꿈틀댄다. 연줄을 통해 괜찮은 교회에 사역자로 진입하고 그 다음엔 또 다른 인맥의 사다리를 타고 담임목회자로 청빙을 받거나, 개척을 통해서 내 사업을 확장시켜 마침내 큰 교회를 이루겠다고 허망한 꿈을 꾸는 것이나, 유학에 투자해서 신학교수가 되어 안정적인 직업인이 되는 일이나, 모두 트랙만 다를 뿐 거기서 거기가 아닌가. 성공하기 위해 교육을 받는 것이고, 교육하는 사람도 성공을 향한 지름길의 전도자가 되기 일쑤다.
전통적으로 교육은 지식의 축적에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상당수의 미국 대학들이 내건 구호 역시 “지식이 힘이다”(Knowledge is Power)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것, 즉 지식이 힘이요 지식이 권력이 된다는 명제는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지배적 세계관이며 대중철학이기도 하다. 문제는 지식이 권력의 한 형태라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을 내가 알고 있으면 나는 다른 사람을 통제하거나 조작할 수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이 갖고 있지 않은 전문성과 기술을 소유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도 있다. 전문성과 기술은 돈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돈이 있다는 것은 사회적 권력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학을 가고 대학원을 가려고 한다. 투자한 만큼 돌아오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소위 성공보수라는 것이다. 공부하는 목적이, 지식을 많이 습득하는 것이, 즉 교육이 이처럼 철저하게 돈과 안전과 성공과 밀착하여 있다는 것이 우리의 서글픈 시대상이기도 하다.
이런 일은 고대 사회에도 있었다. 미국의 여성 구약학자인 엘런 데이비스는 구약 성경의 교육철학과 성경시대의 타 문화의 교육철학이 얼마나 다른지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스라엘의 현인들이 등장하기 수세기 전부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하고, 글을 배워라. 뛰어난 서기관에게는 미래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옳았다. 상형 문자나 설형 문자를 마스터하는 일은 오랜 세월이 걸리는 일이었다. 수백 혹은 수천 개의 상징 문자를 배워야 했기에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글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사회에서는 글을 쓸 줄 아는 능력이 가장 강력한 기술이었다. 폭넓게 의사소통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도구였다. 그래서 고급 서기관들은 자기 문화의 ‘정보 관리자’ 역할을 했다. 그들 중에서도 뛰어난 사람은 정부의 혹은 성전의 높은 지위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서기관들은 서기관들이 누리는 좋은 인생을 칭송하는 글을 지음으로써 학생들을 계속 학비를 받아 가며 학교에 붙잡아 두려 했다.(135쪽)
이게 어디 고대에만 있던 이야기인가? 지금은 그렇지 않은가? 교육의 목적이 돈벌이, 권력과 출세와 경제적 풍요, 안정적 직업, 사회적 신분상승에 있지 않은가? 신학교육을 받는 목적이 괜찮은 목회지에 부임하거나 아니면 장래성이 있는 곳에 개업(척)을 하는 것이나 자신의 지적 재능을 확보하여 나중에 사회적 신분상승의 사다리로 사용하려는 것은 아닌지? 이런 것과 결부하여 신학교육도 이뤄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심각한 자아성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교육은 무엇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교육은 일차적으로 지혜교육이다. 삶을 위한 예술을 습득하기 위한 교육이다. 엘런 데이비스는 구약의 지혜문헌 중 잠언을 통해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교육과 현대 교육이 얼마나 다른지를 잠언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저 인생 교육, 지혜교육, 삶을 위한 교육을 적시하고 있는 잠언 1:2-3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이 책은 지혜와 훈육을 알기 위한,
통찰의 말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성공하기 위한 훈련,
즉 '의와 정의와 평등'을 익히기 위한 책이다.
여기서 엘런 데이비스는 원문에 “지혜롭게 행하는 일에 대해 훈육을 받는 일”을 “성공하기 위한 훈련”(discipline for success)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혜를 알고 훈육하기 위한”이라는 제목 다음에 오는 첫 문구는 이 책의 세계관이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세계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일찌감치 말해 준다. 성경이 제시하는 지혜는 우리 사회의 생각과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내면화한 지식의 관점에 도전한다.(134쪽)
이와 같은 서기관들의 문학과 우리가 가진 잠언 사이에는 두드러지는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 현인들이 학생들에게 제시한 학문의 매력은 개인적인 전문성의 발전과는 거의 혹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비록 그들이 ‘성공하기 위한 훈련’이라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그들이 성공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보라. “의와 정의와 평등”을 세우는 일이다. 그들의 생각에 따르면, 지혜로운 사람은 “권력”이 아닌 “선(善)”을 지향한다.
이러한 동기가 이스라엘의 현인들을 고대의 학자들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현대의 학자들과도 구분해 준다. “의와 정의와 평등(공평)”이라는 표어를 현대의 어떠한 교육 기관의 프로그램에 대입해 보아도 다 이상하게 들린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대학과 신학교를 채우는 학자들은 상당한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전문가들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지식이 ‘의’(義)를 지향한다는 표현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허세 부리듯 들려서가 아니다. (학계에서 허세는 큰 흠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범주의 오류로 보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말해, 현대의 학자들은 의(義)를 위해서 고용된 사람들이 아니다. 대학원 과정은 엄밀하게, 창의적으로 사고하도록 우리를 훈련시킨다. 그리고 바로 그 기준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일을 평가한다. 이러한 관점은 신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면접을 보았든 면접관으로 참여했든, 내가 관여했던 그 어떠한 고용 면접에서도 “의”(의로움, 옳음)라는 주제가 등장한 적이 없다. 이 같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이 현인들의 교육관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현인들은 오직 “의”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추상적 지식, 즉 선함으로부터 추상화된 지식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고대 이스라엘이 이웃 제국인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가 특별히 탁월했던 천문학, 건축학, 엔지니어링, 의학, 미술에는 지적 투자를 별로 하지 않은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요약하자면, 이스라엘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웃과 사이좋고 신의 있게 지내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신실하게 살 수 있을까라는 구체적인 문제로부터 추상화된 지식에는 관심이 없었다.(136-137쪽)
그렇다면 우리는 교육에 대해, 특별히 신앙교육과 신학교육에 대해 성경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나는 지난 23년 이상을 신학교육에 종사해왔다. 이제 은퇴를 코앞에 두면서 다시금 신학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해서 읊조려본다. 신학교에서 들리는 격정적인 기도들, 열정적 성경읽기, 믿음 충만을 열렬하게 사모함, 성령 충만 받기를 위한 곳, 맨땅에 머리를 받는 개척에 대한 집념 등등. 아주 좋다. 그럴듯하게 보인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그 곳에는 때론 너무도 세속적인 갈망들, 자기중심적인 구원관, 협소한 신앙관, 구호에 함몰하는 유치함, 체념 섞인 분노 등이 들어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신학교육은 무엇을 추구해야할까? 교회를 개척하여 성공하는 것인가? 금식기도와 방언에 능숙한 종교인 양성하는 것인가? 유창한 설교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를 길러내는 곳인가? 아니면 지성적으로 세련된 신학자들을 양성하는 것일까? 전통적 기도원을 모방하고 영성 충만한 불의 사람들을 배출하는 곳인가? 성공한 지도자를 배출하도록 강하게 훈련시키는 곳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성공이란 말인가? 무엇이 성공이란 말인가?
적어도 크리스천들은, 크리스천들의 영적 지도가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교육의 목적과 목표를 다시금 숙고해야한다. 지도자의 자격과 품격과 자질을 말하기 전에 사람됨에 대해, 신자 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의를 추구하고” “정의롭게 행동하고” “곧은 생각과 곧은 마음을 추구하고” “공평한 마음으로 일을 처리하고” “모든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약한 사람들을 돌보고는” 사람들을 훈육시키는 것이 되어야하지 않겠나? 교육은 한 마디로 “의(righteousness)와 정의(justice)와 평등(fairness, equity)”을 익혀가도록 하는 훈련이다. 제2의 본성이 되기까지 말이다.
하나님께서 주전 8 세기 구약 예언자 미가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正義)를 행하며’ ‘신의(信義)를 사랑하며’ ‘겸손(謙遜)하게 네 하나님께 순종하며 함께 걸어가는 것’이 아니냐!”
이 세 가지는 신학교육과 신앙교육의 핵심이 되어야할 요소이어야 할 것이다.
George Falkenhagen of Oscoda, VT
어려워요.
심각한 자아성찰을 하다보면 주춤거리게 되고
용기를 내다보면 실수가 많고....
정의 신의 겸손 이중에 제일은 뭘까요?.... 사랑......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