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06 20:41
“예레미야와 바스훌”
렘 20:1-6
류호준 목사 (구약학)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아 이 땅에 ‘의(義)의 나무’로(사 61:3), 그리고 세상 모든 민족들을 위한 ‘복’이 되도록(창 12:3)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역사를 어떻게 장식해 나갔는지에 대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그들의 역사는 의의 나무가 되는 대신에 불의의 나무가 됨으로써 더러움과 수치로 얼룩졌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들의 사명은 온 민족들을 향한 ‘복’이 되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이방 민족들에게 저주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민족들과 나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영광스런 임무의 수행자가 되는 대신에 그들에게 ‘거침돌’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예언자라 불리는 수많은 천상의 전령(傳令)들을 보내시어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들 본연의 소명과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셨다. 이스라엘 역사 안의 예언자들의 출현은 바로 이러한 천상의 왕이신 야웨 하나님의 부성(父性)적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러한 하나님의 인내의 부르심과 회개에로의 촉구에 긍정적으로 응답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의 말씀들을 경홀히 여기고 오히려 그들을 핍박하였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그들의 말씀을 배척하는 것이 곧 그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배척하고 핍박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러한 행동 뒤에는 반드시 무서운 불행의 결과들이 뒤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정치적 기득권 세력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예언자들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토라(Torah)를 벗어난 그들의 불의(不義)한 정치행동양식과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인간 중심적 종교행위에 심각한 질타를 가하며, 피치 못할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였던 예언자들을 견뎌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언자들을 박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구타와 고문도 서슴지 않았다. 유다 왕국의 황혼녘에 사역하였던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글들’은 예언자를 향한 이러한 핍박과 신체적 폭력에 대한 일련의 기사들을 제공하고 있는 바, 그 최초의 사건이 우리의 본문 안에 있는 선지자 예레미야와 유다의 제사장 바스훌 사이에 발생한 불행한 이 사건이다(20:1-6).
사건의 전개
이 사건의 발생 원인은 다음과 같다. 예레미야는 19장에서 토기장이의 공방(工房)에서 오지병 하나를 사들고 유다의 몇몇 장로들과 제사장들을 데리고 ‘벤 힌놈’이라 부르는 계곡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강력한 심판의 메시지를 선언한다. 원수 나라들에 의한 유다와 예루살렘의 철저한 멸망을 알리는 무서운 심판선언 메시지였다. 그리고 그와 동행한 유다 지도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가 가지고 간 오지병을 부수면서 말하기를,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번 깨뜨리면 다시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야웨께서 이 백성과 이 성을 파하리니 그들을 매장할 자리가 없을 것이다”(19:11)라는 선언을 하였다. 참으로 엄청난 선언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심판 선포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벤 힌놈의 계곡에서 예루살렘 안으로 돌아온 예레미야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렘 7:1ff.) 예루살렘 성전 뜰 안에 서서 다시금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게 된다: “보라 내가 이 성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 성과 그 모든 촌락에 내리리니 이는 그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니라”(19:15).
이러한 예레미야의 상징적 행위와 격한 심판 메시지를 전해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 바스훌은 매우 격노하였다. 바스훌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사하던 제사장으로, 개역 성경은 그의 직위를 야웨의 집 ‘유사장’(有司長)이라고 부른다(20:1). 아마 성전 뜰 안의 치안을 담당하는 총책임 제사장인 듯하다. 그런 그가 그냥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예레미야를 긴급히 체포하여 심하게 때리고 착고에 채웠다. 여기에서 ‘착고’로 번역된 히브리어(마헤페케트)의 정확한 의미는 불분명하다. 아마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한글 개역의 ‘착고’처럼, 형벌을 받을 사람의 손을 묶고 그 머리를 구멍이 뚫린 널빤지에 넣어 움직이면 괴롭거나 불편하도록 하는 형벌 장치, 혹은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작은 감방.
두 세력의 충돌
선지자 예레미야와 제사장 바스훌 간의 충돌은 일찍이 선지자 아모스와 북 이스라엘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 간의 대결을 연상시킨다(암 7:10-17). 주전 8세기경, 하나님의 심판신탁을 담지(擔持)하고 있는 선지자 아모스는 북 이스라엘의 종교적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와 심각한 언쟁을 벌인다. 천상의 왕 야웨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은 천상의 전령 아모스는 충격과 공포의 메시지를 북 이스라엘의 심장부를 향해 퍼붓는다. 북 이스라엘이, 특별히 그들의 지도자들이 야웨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그 길에서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은 필연적이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특별히 종교지도자들(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있다고 지목하였다. 그러나 아모스와는 대조적으로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사람’이기를 거절하고 ― 그렇게 대표하라고 ‘신학교육’ 과정을 통해 배웠을 터인데도 말이다! ― 보이는 지상의 왕을 대표하는 ‘사람의 사람’으로 처신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참으로 한심스런 한 종교인의 일그러진 영성(靈性)을 보는 것 같아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런 모습은 단순히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에게만 국한 된 개인적 문제만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종교적 지도자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거짓을 진실처럼 말하고, 인간적 명예와 부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영적 매춘행위도 서슴지 않았던 자들이었다. 제도화된 조직 속에서 종교적 의무들을 아무런 열정도 없이 어영부영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그렇게 치러냈던 것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세속적인 명예와 안전뿐이었다. 이름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실상은 ‘악한 영들의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내면적 실체와는 하늘이 땅에서 먼 것처럼 멀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까지도 모르는지 모른다!
선지자와 제사장 사이의 마찰과 충돌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삶에 있어서, 영적 지도자들(선지자들)과 체제 유지를 중요시하는 기득권층들 및 그 종교적 기관들(제사장들) 사이의 기나긴 긴장의 역사 속의 한 단편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선지자들이 신실한 영적 지도자들이었던 것도 아니고, 모든 제사장들이 타락한 종교지도자였다는 말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 성서의 증언, 특히 예언서를 통해 알게 되듯이, 제사장들은 ‘제사의식 집전’과 ‘토라-교육’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 채로, 종종 정형화된 종교의식의 집행자들로서, 혹은 왕권 수호의 이념적 후원자로서, 혹은 호국종교의 주창자들로서 역할을 할 때가 많았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어용적 관변 단체로 전락한 경우다(왕상 22:5ff.; 렘 26:8-15). 따라서 그들에게는 국가와 민족과 성전을 향해 심판을 선언하는 선지자들의 행태는 자신들이 유지하고 즐기는 제도적 안전장치를 건드릴 뿐 아니라, 민심을 흔들어 놓아 사회적 안정을 해쳤고, 더 나아가서는 체제에 대한 도전과 체제 전복을 꿈꾸는 불순한 정치적 세력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바스훌은 천상의 왕이신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하는 세속적 종교 세력의 구현(具顯)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은 특히 2절에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흥미롭게도 예레미야를 가리켜 ‘선지자’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한 곳은 이곳이 처음이다. 아마 제사장 바스훌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향해 저지른 악행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니면 6절에 바스훌도 예언자 가운데 하나였다는 언급으로 보아서 거짓 선지자가 참 선지자를 박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좌우간, 여기 두 사람이 대표적으로 서 있다. 한 사람은 천상의 왕이신 야웨를 대표하여,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지상의 권력을 대표하여 서 있다. 이들을 두고 ‘두 왕국의 충돌’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선지자 예레미야와 제사장 바스훌은 병든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한 실체(實體, reality)에 대한 두 가지 서로 상반된 견해를 대표하고 있다. 천상의 왕 야웨의 대변자로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토라를 떠난 예루살렘과 그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종교적 구현(具顯)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이제 남은 것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뿐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지상의 종교적 제도권의 대표로서 바스훌은 그렇게 인식하지 않았다. 제사장으로서 그는 예레미야의 심판 선포를 신학적으로 올바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보여주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판단력을 상실하였다. 그는 예레미야의 예루살렘 멸망 선언 메시지를 심각한 신학적 이슈로 인식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예레미야의 행동과 발설을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적, 신학적 문제로 인식하는 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예레미야가 보여준 상징적 행동들과 그가 선포하고 있는 심판 메시지를 단순히 정치적 선동 행위로 파악하고 그에 대처하고 있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체포와 구금은 적어도 바스훌에게는 ‘정치적 구속(拘束)’이었다. 이렇게 해서 예레미야는 ‘정치적 수감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놓여 있다. 예레미야라 불리는 ’신적(神的)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의 행위를 단순히 치안 방해 소란 죄, 그리고 민심을 동요시키는 정치적 선동으로 인식하여 그를 구속한 바스훌은 소위 민첩한 정치적 판단력은 보여준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겸비했어야만 하는 영적 통찰력과 판단력은 그에게 전무했던 것처럼 보인다. 바스훌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유다의 병든 종교적 지도자들의 영적 상태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마치 주전 8세기 선지자 아모스 시대에 벧엘 성소를 책임지고 있던 제사장 아마샤로 대변되는 병든 영성(靈性)처럼 말이다.
상상하건대 바스훌은 종교와 정치의 이분법적 사고를 지닌 인물처럼 보인다. 그는 제정일치(祭政一致)적 환경 속에서 살고 있었음에도 그의 행동방식은 종교는 종교의 영역에, 정치는 정치적 영역에 따로 떨어져 있는 문제로 간주하고 처신했던 인물로 보여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해석은 그가 예레미야의 종교적 행동을 단순히 치안의 문제로 환원시켜 처리하였다는 사실에서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정말로 그런 사고방식을 지닌 인물이었는지, 그에 대한 여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인식하건 못하건 상관없이 그가 예레미야의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판단한 것은, 그리고 브루그만이 예레미야의 구속을 ‘정치적 수감’으로 판단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올바른’ 지적이다. 어떤 의미에서란 말인가? 적어도 성경 기자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고 선지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본 에피소드에 나타난 예레미야의 문제는 ‘하나님의 정치’(theo-politics)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사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유다의 미래와 운명에 대해 선언한 내용은 종교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다스림’(Kingly rule)이라는 안목에서 바라볼 때, 종교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은 결코 분리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예레미야를 포함한 정통적인 참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인간 역사는 단순히 ‘현실정책’(realpolitik)과 '백성의 소리'(vox populi)라는 인간적 정치행위에 의해 운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섭리와 인도에 의해 전개되어 가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바스훌의 비극, 유다의 비극
본문에 따르면 바스훌은 예레미야를 모세의 법(신 25:2-3)에 따라 태형(笞刑)에 처한 것 같다. 그리고 바스훌은 예레미야를 구금한 후 하루가 지난 그 다음날 석방시켰다. 예레미야서를 쓰고 있는 저자는 이 사건의 흐름을 매우 간결하게 기록하고 있다. 마치 하루에도 수없이 발생하는 일상적인 일들이나 되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바스훌에 의한 체포와 구타와 구금 그리고 석방이라는, 일상적인 사건에 대한 간결한 처리였지만(1-2절), 그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 추궁(3-6절)은 상상을 초월한 강력하고 끔찍한 심판 선언이었다는 사실이다. 바스훌의 박해 따위로는 하나님을 대언(代言)하는 예레미야의 입을 막지를 못했다. 외형적으로, 물리적으로 바스훌은 분명히 예레미야를 제압하고 통제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 행위를 통해 바스훌의 미래와 운명을 통제하고 있다. 칼보다 말씀이 무섭다는 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성경적인 예다.
그렇다면 바스훌의 운명과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앞에서도 간단히 언급하였지만 바스훌이라 불리는 한 종교적 지도자는 유다가 지닌 영적 성격(靈性)을 반영해 주는 인간 거울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바스훌의 운명 속에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토라(‘옛적 길’, 6:16)를 떠난 유다의 운명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예레미야와 바스훌 간의 대결 이야기를 정경적 차원에서 읽는 방식이기도 하다. 자, 이제 바스훌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리라 여겨진다.
예레미야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당당하고 담대하게 왕궁과 성전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층들의 근거 없는 신념체계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왕궁과 성전을 대표하는 바스훌의 운명은 급전하게 될 것이다. 그는 기득권층의 안전과 안일, 종교지도자로서의 명예와 존경을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될 것이다. 그가 이루었던 모든 성취들 역시 하루아침에 안개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 대신 그는 불안과 공포, 수치와 모욕, 가난과 추방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비극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누가 바스훌의 삶이 이렇게 곤두박질치리라 생각하였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비극은 오래 전부터 그 생명을 잉태하고 있었으니, 오늘의 바스훌은 과거의 바스훌들이 모인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를 박해한 것은 곧 그를 보내신 천상의 왕이신 야웨 하나님을 향한 도발적 행위이며 그분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망령된 행위다. 하나님은 즉시 바스훌과 그로 대변되는 유다를 향하여 심판을 선언한다(4-6절). 본문에 의하면 심판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바스훌의 개명 (3절)
(2) 유다를 향한 ‘칼과 추방’(4-5절)
(3) 바스훌의 비참한 종말 (6절)
(1) 먼저 심판의 일환으로서 제사장 ‘바스훌’은 ‘마골-밋사빕’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개명(改名)된다. 새 이름의 문자적 의미는 ‘사방에 공포’, ‘사방에 두려움’이다. 사실상 대중들과 바스훌에게 예레미야는 ‘마골-밋사빕’이었을 것이다. 유다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의 공포에 대해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과 그의 종교적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심판 선언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른 아침부터 늦은 시간까지 부지런히 보내신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박해하였다(참조, 렘 7:25). 그러므로 이제 그 공포가 유다의 심장부(성전과 제사장)에 임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주요 단어는 ‘공포’, ‘두려움’(마골)이다. 4절은 이어서 ‘공포’(마골)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보라 야웨가 바스훌 너로 하여금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마골)이 되게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바스훌은 자신이 자신에 대해 두려움과 공포가 될 것이며, 또한 그는 사방으로부터 공포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사장으로서 바스훌이 ‘공포’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전을 대표하는 바스훌이 사방에 두려움과 공포가 된다는 것은 곧 바꾸어진 실체에 대한 인식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평화’(샬롬)를 가져오는 성전이 이제는 ‘공포’(마골)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바스훌로 대표되는 예루살렘 성전과 그 도시는 더 이상 ‘평화의 성’이 아니다. 공포와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도시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해 브루그만이 잘 지적하고 있다: “성전은 더 이상 그 약속들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 성전은 샬롬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공포를 구현하고 있다. 그렇게 하여 성전은 하나님의 공포에 놓이게 된 것이다”
(2)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바스훌이라는 한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대표하고 있는 ‘세계’에도 미치게 된다. 즉 자기기만으로 가득 찬 도시와 성전 역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할 길 없게 된다는 것이다. 도시와 성전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울 것이다. 적군의 칼에 의해 도시가 함락될 것이고, 그 거주민들은 약속의 땅에서 추방당하여 이억 만리 이방 땅에 사로잡혀 갈 것이다. 본문은 이러한 심판의 철저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모든”이라는 불변화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모든 부’, ‘모든 소득’, ‘모든 귀물’, ‘모든 보물’들이 탈취 당하여 바벨론으로 옮겨지게 된다는 것이다(5절).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을 진행하시는 주체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바벨론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심판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한 국가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세력은 왕이나 제도나 기관들이나 정치행위가 아니라 야웨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불행하게도 유다 인들은 비싼 값을 지불한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
성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아울러 그 성전은 철저하게 파괴될 것이라는 선지자의 심판 선언은 예레미야 당시에 편만 했던 국가적 ‘성전-이데올로기’를 무력화시키고 불법화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 성전의 존재 자체가 곧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가리킨다는 주장(소위 ‘성전 신학’ temple theology)을 국가적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유포하고 조작하였던 예레미야 당시의 신학자들(관료적 제사장들과 거짓 선지자들), 그들의 기만적 신학은 곧 성전파괴와 더불어 함께 파멸될 것이다. 대중적인 인기가 있었던 ‘성전신학’은 더 이상 유다를 뒷받침하는 정통적 신학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유다는 그 동안 ‘기만’(쉐케르)의 그늘아래서 공허한 삶을 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실속 있는 삶을 사는 방식을 가르쳐주는 것이 성전신학이라고 말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을 말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속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기만을 그들의 삶의 방식으로 삼아왔던 것이다. 정치 안에서, 사회 안에서, 문화 안에서, 그리고 종교 안에서조차, ‘기만’과 ‘거짓은 그들이 마시는 공기며 물이었던 것이다.
(3) 이제 하나님의 심판 신탁은 다시금 바스훌에게로 집중된다(6절). 예레미야는 바스훌의 이름을 직접 부른다. “바스훌아!”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그는 유다를 덮치는 공포와 두려움을 친히 목도할 것이라는 것이다. 유다를 침공하여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왕과 백성들의 재산과 물건들을 강탈해 가는 바벨론 인들의 포악한 행위들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스훌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비참한 재앙중의 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바스훌이 바벨론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어 그곳에 묻힌다는 것이다. 즉 이방 땅에 끌려가 거기서 죽어 거기에 묻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혼자만의 운명은 아닐 것이다. 본 단락의 마지막 절(6절)은 말하기를, 바스훌과 바스훌이 거짓 예언하는 내용을 듣고 그를 따른 친구들도 함께 비참한 미래를 맞이하게 된다고 하고 있다. 독특한 것은 본 단락 마지막 절(6절) 마지막 단어가 ‘거짓’(쉐케르)이라는 단어라는 사실이다. 이로 보건대, 바스훌은 기근과 칼이 결코 유다를 삼키지 않을 것이라고 거짓 예언했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던 것처럼 보입니다(참고, 14:14f.). 제사장으로서, 그는 ‘거짓’을 말하는 지도자였던 것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인가? 성전은 진실의 터전이다. 하나님의 진실을 구현하는 곳이 성전이다. 그런데 그 성전에서 하나님의 진실을 가르치는 제사장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니! 도저히 상상키 어려운 유다의 불행이다. 어찌 이것을 옛적 유다의 일이라고만 치부해 버리겠는가? 이러한 인물을 영적 지도자로 모시고 있는 교회의 불행이여! 그러한 인물에게 내려진 추방과 죽음의 형벌을 보라.
바스훌은 그래도 명색이 제사장이다. 제사장은 평생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가리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가 제사장 훈련을 받았을 때도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가리는 법을 가장 중요한 훈련으로 받았을 것이다. 한평생 성결과 거룩, 정함과 깨끗함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이 제사장이었다.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 만질 수 있는 것과 만져서는 안 될 것, 가야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분별하고 살아왔던 사람이 제사장이었다. 레위기를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정결법이 제사법의 핵심인 것을 알 것이다. 차라리 죽는 것이 영예로울 만큼, 이방 신들의 영역인 부정한 이국땅에서 부정한 음식을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죽어 묻히게 된다는 것은 제사장에게 있어 상상도 못할 저주이다. 이렇게 해서 예레미야의 소명을 가로막아선 바스훌은 자신의 소명 자체를 박탈당하게 되는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상응하는 형벌’(Entsprechungsstrafe)인가! 하나님의 보복하시는 능력을 의심하는 자들이 있다면 바스훌에게 선언되고 있는 하나님의 완벽한 저주능력을 기억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심판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성전의 중심부에 서있던 사람들(종교지도자들), 삶의 복리와 안전을 공고히 해가던 사람들(사회적 지도급 인사들), 그들 모두는 그 삶의 자리에서 뿌리 뽑혀 낯선 땅에서 숨을 몰아쉬며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생명을 보장한다고 했던 바로 그 장소(성전)가 이제는 죽음의 자리가 될 것이다.
‘추방과 죽음’ 이것은 단순히 바스훌 한 개인에게만 내려진 형벌이 아니다. ‘추방과 죽음’ 이것은 유다의 역사를 되돌려 원점으로 돌이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소위 신명기적 역사라 불리는 대하(大河) 이스라엘 역사를 갖고 있다. 여호수아로부터 시작하여 사사기, 사무엘서 그리고 열왕기서로 끝나는 장대한 이스라엘의 역사 말이다. 알다시피, 이 역사의 시작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역사의 끝(참조, 열왕기하 25:27-30)은 그 약속의 땅에서 추방되어 이방의 땅에 사는 이야기로 그 대미(大尾)를 장식한다. 입국으로 시작한 역사는 추방으로 그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스훌에게 선언된 추방과 죽음은 곧 패역한 유다가 추방과 죽음으로 상징되는 애굽(바벨론)으로 회귀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출애굽과 광야에서의 언약체결, 가나안 입국과 같은 일련의 구원사적 사건들을 거꾸로 지워 나가게 된다는 의미다. 유다는 그들에게 야웨로 알려졌던 그 하나님과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는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무서운 형벌이 어디에 있겠는가?
바벨론에 의한 침략과 찬탈, 그리고 강제 이주와 바벨론에서의 유형(流刑) 생활… 이 모든 것들은 분명히 감당키 어려운 형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야웨 하나님과 단절되는 형벌보다 더 큰 비극과 불행은 없다는 사실이다.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안내하셨던 하나님의 말씀(토라)이 지금은 죽음을 선언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 사실을 브루그만은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리적 붕괴와 해체는 앞으로 바벨론 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체와 붕괴는 일차적으로 이 예언적 말씀 선포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예언적 말씀은 [유다의 치부를] 드러내고, [그들을 언약법정에] 기소하고, [길고 긴] 유형생활을 선언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역사의 주님이신 야웨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실 때 ― 지금도 예언서라 불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러하신다 ― 신앙공동체는 귀담아 그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 선언은 그 집행의 날을 정하게 될 것이다.
2012.12.16 04:34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에세이 끝에 W. Brueggemann의 글을 인요하셨는데요,
거기서 '언약 법정'이라는 말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습니다. 참고 자료 좀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