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1.20 07:48
[9]
“평화”
[본문]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라. (로마서 5:1-5)
[요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5:1)
Therefore, since we have been justified through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Romans 4:11)
자기를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기-의(義)’(self righteousness)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평화의 복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 자기 주제 파악조차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경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거나 농담거리 정도로 여깁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기만족에 푹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구원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은 덜어버리셔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한 그들에게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두려워할 수 없는 자들이 걱정스러울 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있는 기능을 상실한 것은 마치 이미 끝장이 난 기계와 같습니다. 그들은 고장 난 센서와 같아서 다가오는 위험과 재앙을 감지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자기만족에 푹 빠져 쿵쿵거리며 다가오고 있는 재앙의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자기-의(義)가 가져다주는 평화는 스스로를 속이는 마취제와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무감각하거나 그분의 말씀에 대해 방자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자들은 머리에 숯불을 이고 사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경망스럽게 움직일수록 재앙이 머리에서 쏟아져 내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예민성은 결코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그만큼 간절하게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린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평화를 상실하게 됩니다. 마음의 평화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적 평화, 대인관계의 평화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때 그들은 안식과 쉼이 없는 불안한 영혼들이 되며 비로소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직까지 희망이 남아있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들이 무가치하고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라는 것을 어렴풋이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직까지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치를 인식하거나 절박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하지만 말입니다.
이런 지경에 들면,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심하게 정죄하고 생에 대한 비관적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삶에 대한 아무런 의욕을 느끼지 못합니다. 매우 치명적인 상태가 된 것입니다. 어떤 크리스천 집단에서는 이러한 자기 비난을 경건과 겸손의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자기 비하와 채찍질을 가르치기도 하고 계발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고통만 깊어질 것입니다. 마치 마르틴 루터가 죄의 문제로 깊이 번민하고 고통 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 속에서 고뇌의 긴 밤들을 보내다 보면 영혼의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관습은 결코 참된 경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때로 우리가 생각하고 믿는 것처럼 우리가 정말로 그렇게 악하거나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교묘한 방식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비난을 계속해서 하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믿기를 바랍니다. 자기만을 쳐다보면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눈을 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그분께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두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우리에게도 넘치도록 충분하다는 사실을 믿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평화란 호의와 우정의 관계이며, 둘 사이에 아무런 거침이나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상태입니다. ‘평화’로 번역된 헬라어(‘에이레네’, εἰρήνη)는 구약 히브리어 ‘샬롬’에 해당하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샬롬은 단순히 전쟁이 그친 평화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상입니다. 문자적으로는 가득함, 온전함, 풍성함, 안식, 평온함이란 뜻이고, 사회적으로는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구사하는 번영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부부지간이나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가 건강하고 좋을 때도 샬롬이라고 합니다. 가장 포괄적인 뜻은 창조주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상태로 피조세계가 존재하고 있을 때입니다. 인류의 타락 후에는 샬롬은 구원의 상태에서 충만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모든 죄악과 해악으로부터 해방되어 다시금 생명으로 가득한 삶을 살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샬롬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최상의 샬롬(평화)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서먹서먹해지고 원수지간이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 화해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회복되었습니다. 그것을 믿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번역 상 한 가지 교정이 필요합니다. 한글번역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누리자’라는 어감은 권고나 명령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평화가 와 있는데 왜 누리지 않느냐?”는 우회적 권고일 수 있지만 헬라어 본문은 결과를 가리키는 서술형으로 되어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 평화를 소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할 때, 우리의 두려움과 공포는 사라집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 속에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선하시고 좋으시기 때문에 그분을 믿고 따르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샬롬)가 수립됩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볼수록 우리는 우리자신에 대해 더 좋은 관계를 갖고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자존감이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시기 때문에 나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분과 평화로운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후에 나도 내 안에, 내 자신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평화는 독선적이거나 잘난 체하지 않습니다. 평화(샬롬)는 자기만족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가능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평화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자신과 평화하고 있습니까?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찬송 412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내 맘 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힌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자 그 아무도 없으리라.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 남은 주의 큰 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
이 땅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후렴]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롤 내 영혼을 덮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