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22 15:42
“하나님과 사람을 가슴으로 사랑하고 이해하는 목사”
유진 피터슨,『목회자의 소명』(포이에마, 2012)
류호준 목사(백석대학교 신학부총장 겸 신학대학원장)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성경의 행간 속으로 꾸물꾸물 파고들어가 끊어진 행간 사이에 다양한 다리들을 놓아 이야기들이 계속 되도록 이어주기도 하고, 아니면 새로운 다리를 놓아 전혀 예기치 못한 새로운 세상 속으로 인도하는 마법의 성주가 있으니 이름 하여 유진 피터슨이라 한다. 그는 우리 시대가 배출한 탁월한 시적(詩的) 이야기꾼이며 걸출한 이야기적 시인(詩人)이다.
유진 피터슨은 설명이 필요 없는 작가이다. 이글을 읽은 독자들 중 그의 책을 한 두 권정도 읽지 않은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의 이력서에는 미국의 한 도심지역에서 그리 크지 않은 한 교회를 수십 년 동안 섬긴 목회자로, 후에는 신학교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친 교수로, 거룩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틈틈이 성경 말씀을 이 시대의 언어로 쉽게 풀어내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소개하고 있다. 시인과 이야기꾼으로서 그의 문장력은 수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신선한 영감을 불어넣었으며 현실과 실체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도록 초점을 맞추어주는 영혼의 조율사이기도 하다.
본서는 구약 요나서에 관한 책이다. 그러나 요나서 해설서도 주석서도 강해서도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본서를 주석학적으로 평가할 의사는 없다. 본문을 이렇게 상징적으로 은유적으로 풍유적으로 해석해도 되느냐고 딴죽을 걸 의향도 없다. 그런 것을 찾아낸다면 꽤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저자의 의도에서 일탈하는 나의 현학적 자만이거나 아니면 내 스스로를 바리새인적으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싫다. 본서는 한 마디로 시인의 상상력과 목회자의 온유함과 학자의 정밀성과 한 인간으로서 인성이 깊이 배어있는 작품이다.
본서는 요나서를 “목회자의 소명”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내려 간 저자 자신의 자기 고백적 권면을 담고 있는 자서전적 성경이야기다. 그래서 독자들과의 교감의 폭이 넓을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원서가 출판된 지 어연 20년이 되었다. 20년 만에 한글 독자들을 만나고 있는 셈이다. 1992년에 유진 피터슨은 “예측할 수 없는 박 넝쿨 아래서”(Under the Unpredictable Plant)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출판하였다. 원서 제목부터 상징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천방지축 예측불허의 럭비공을 연상케 하는 선지자 요나의 매우 의도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동시에 날카로운 메스를 가지고 때론 유머러스한 풍자를 통해 이 시대의 목회를 비판하면서도 요나와 자신의 삶을 인내심을 가지고 명품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긍휼을 맛보게 하는 책이다. 그리고 그 끝은 열려져 있어서 독자들에게 펜을 쥐어주고 미완성 작품을 완결하도록 요청한다. 마치 마가복음의 이상한 종결처럼 말이다.
어쨌든 한국어 출판사인 포이에마는 이 책의 한글 제목과 부제를 “목회자의 소명: 한걸음씩 부르심을 따라가는 거룩한 여정”이라 아주 적절하게 붙였다. 한글독자들에게 손쉽게 책의 내용을 미리 알려주는 과도한 배려와 친절함(!)이 돋보인다.
저자의 화두는 “목회자의 소명”에 관한 것이다. 그는 탐정소설 작가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응답해야 하는지를 요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집요하게 추적한다. 이 목적을 위해 저자는 요나서의 내러티브(1장, 3장)와 시문(2장)을 모두 5부로 나누어 이야기 실타래를 풀어간다. 제 1부에선 “뱃삯을 주고 다시스로”, 2부는 “폭풍을 피하다”, 3부는 “물고기 뱃속에서”, 4부는 “니느웨로 가는 길”, 마지막 5부는 “하나님과 다투다”로 잡았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요나서에 등장하는 시간과 장소, 사건과 사물과 인물, 그리고 그것들을 담아내고 있는 이야기의 발단과 전개와 절정과 대단원이라는 거대 플롯(Plot)을 그가 살아가고 있던 미국적 상황에 맞춰 재해석하고 자신의 경험과 풍부한 독서를 통해 얻은 통찰력을 적절하게 섞어 적용하는 발군의 실력을 뽐낸다. 요나 이야기를 원용하여 쓴 목사 유진 피터슨의 회고록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유진 피터슨은 기성 목회자들과 목회 지망생들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함의(含意)를 이해하느냐는 질문이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종종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그가 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의사에 반하여 부르실 때가 부지기수가 아닌가? 그래서 그분의 부르심으로부터 도망하고 싶은 법이다. 우리가 원치 않는 곳으로 그가 부를 때 우리 내면에는 다시스로 도망할 충분한 이유들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다. 다시스는 미지의 세상이다. 목회자들이 꿈꾸고 그리는 목회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그렇지 못하다. 니느웨 같은 곳, 제발 이런 곳이 아니기를 바라는 곳으로 부르시고 그곳에서 한 평생 목회 하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시기 때문이다. 지루하고 고단한 현실을 뒤로 하고 이상적인 목회를 꿈꾸는 자는 마치 다시스를 열망하는 음란한 성도착증 환자란다! 다시스 관광 팩케이지를 즐기려면 먼저 욥바 여행사로 문의하면 된단다.
다시스를 향한 뱃길은 헤라클레스의 기둥, 아틀란티스, 헤스페리데스, 극점으로 대변되는 숭고한 열망, 완성과 온전함을 갈망하는 충동을 가리킨다. 종교는 바로 이런 충동을 이용한다. 그러나 목사의 소명이 이런 곳으로 발출되기 시작한다면 그는 종교적 성공주의를 지향하는 어리석은 길로 들어가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원하든 원치 않던 어둠과 눅눅한 감방 같은 물고기 뱃속 안에 있어야만 한다. 그곳이야말로 목회적 소명이 성숙과 탁월함으로 주형(鑄型)되어지는 공방(工房)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목사는 기도를 통해 부르심의 의미와 그 목적을 배우게 된다. 고난과 고행이 없이는, 제한과 집중의 시간과 공간이 없이는 영혼의 에너지도 없기 때문이다.
본서는 철저한 자아비판에서 시작된다. 수치스러울 정도로 창피한 현대 미국 교회의 모습을 날카롭고도 유머러스하게 동시에 슬픈 어조로 서술하고 있다. 그는 제도화된 종교에 대한 심한 거부감과 서글픔을 간직한 사람이다. 그러나 단순히 세속적인 목사와 교회 행태에 대한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그의 목적은 아니다. 유진 피터슨은 긍정적으로 목회의 본질과 목사 됨의 목적을 말하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자아에 대한 관심 때문에 주변으로 밀려나는 현상에 대해 애통하면서 이 책을 저술하고 있다.
먼저 본서에서 요나는 거울 역할을 한다. 특별히 목회자들의 거울 역할을 한다. 그는 우리의 반면교사(反面敎師)인 셈이다. 유진 피터슨은 요나의 경우처럼 누구든지 진정한 목회자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직면하게 되는 수많은 난관과 유혹과 기만을 다양한 은유적 문구로 표현한다. 그가 지적하고 있는 불량한 탁류(濁流)들로는 불순종, 포장된 헌신, 탐욕과 탐심, 숨겨진 교만, 성공 지향적 소명, 자기중심적 목회, 기회주의적 목회, 자기변명과 핑계, 실패에 대한 두려움, 자기 확장이라는 우상숭배, 뼛속깊이 파고든 세속화, 소비자가 이끄는 교회, 성공집착증, 적과의 동침, 경력중심의 전문가주의, 지표 중심적 목회, 자기 연민, 종교 직업화, 프로그램지도자, 메시아적 목사, 효율적 매니저상 등이 있다. 모두 목회자들이 쉽게 걸릴 수 있는 각종 영적 병리증세들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본서는 영적 중병에 빠져 있는 미국 교회를 향한 예언자적 나팔소리처럼 들린다. 물론 한국교회에 그대로 적용해도 과히 틀리지 않은 예언자적 선견지명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본서는 비록 20년 전에 출판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망루에서 불어대는 초병의 양각나팔의 비상성(非常性)을 지닌 고전적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목사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하나님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가슴으로 이해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리라. 목사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갈망과 열정이 있어야 한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면 “내가 목사가 된 것은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서 열정을 가지고 살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현존으로 끌어 모아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기 위해서다.”(75) 그는 목사가 교회나 교인들을 단순히 무 인격체인 것처럼 종교적 “대상”으로 삼지 말라고 한다. 나의 종교적 성취를 위해 내가 밟고 올라가는 사다리의 계단들 정도로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목회란 하나님을 추구하는 인생의 소름끼치는 아름다움, 하나님을 향한 극심한 목마름, 거룩함을 향한 간절한 목마름과 굶주림에 대한 진솔한 이해를 전제해야한다. 결코 인간을 제도화하고 계량화하고 숫자화 시키는 비인간화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깊게 대하면 대할수록 그들 속에서 영원한 굶주림과 갈증, 그리고 하나님이 드러난다. 그렇다. 목사는 자기가 세운 프로젝트의 수행자가 아니라 교인들을 위한 영적 인도자이어야 한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 눈이 뜨도록 인도하는 사람, 하나님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을 인식시켜주는 사람,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고, 사람이든 상황이든 환경이든 그 안에 계신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사람이다. 이 일을 위해 그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유진 피터슨은 고전을 통해 목회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의 소명의 맨토로 러시아의 문호 표도르 도스토엡스키를 든다. 도스토엡스키의 작품을 읽으면서 목회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예를 들어, “죄와 벌”을 통해 사람을 평면적으로나 표피적으로나 피상적으로 바라보지 말라는 가르침을 배우면서 인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영적인 힘이었고 뼈만 남은 정도의 존재라 할지라도 인간은 우리 중 누구라도 뒤흔들어 당혹감과 경외감에 빠지게 할 정도의 충분한 영광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95-96). 목회자가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대해 본 일이 있는가?
유진 피터슨은 한 곳에서 흥미 있는 목회자 유형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엉망진창의 세상에서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목회자를 만난다. 한 사람은 톨스토이적인 목사이다. 그는 가난, 고통, 불의를 없애기 위해서 끊임없이 교육 프로그램과 개혁 정책을 만드는 목사이다. 그러나 톨스토이와는 달리 도스토엡스키는 고난 속으로, 믿음과 의심의 신비로운 도가니 속으로 들어가서 기적과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찾았다. 그는 자유나 하나님을 희생시켜가면서 사람들을 선하고 편하게 만드는 미래와는 상관하지 않으려 했다. 우리 시대의 소위 영적인 지도자들은 교인들에게 순응하고 적응하고 맞추라고, 설명에 굴복하고 기능으로 축소되라고 사람들에게 상당한 압력을 준다. 프로그램화 된 목회는 언제나 효율성을 강조한다. 여기엔 인간에 대항 진정한 이해와 생명에 대한 진지한 태도는 결여되어 있다.”(244)
20년이 지난 후에도 읽을 가치가 있다면 현대판 고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끝으로 이 책의 주제인 목회자의 소명을 한결 자세하게 개인적 삶의 여정을 따라 아름답게 채색한 저자 자신의 회고록인『유진 피터슨: 부르심을 따라 걸어온 나의 순례길 』(IVP, 2012)과 함께 읽는다면 많은 영적 유익을 얻으리라 믿는다.
-『목회와 신학』2012년 12월 호에 실리는 서평문임 -
서평을 읽다가 감명을 받아서 감상을 적고 싶어서 홈피에 들어와 첫 발자국을 찍는군요...^^ 서평 잘 읽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회고록을 감명있게 읽었는데 <목회자의 소명>도 함께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서평을 통해 잠시 드는 생각은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닌 것이 가슴벅찬 먹먹함으로 다가옵니다. 목사는 가슴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라고....그것은 노력하면 될 것 같은데....목사가 된다는 것에서 걸리고 가슴이 먹먹하고 숨막히게 하네요. 진짜루 목사가 된 것인가? 저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으면서 아직 덜 익고 덜 된,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한번 목사는 누구이고, 목사의 소명과 목회하는 것이 무엇인지 서평으로나마 가슴벅찬 도전을 받습니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교수님의 글을 접할 수 있어서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