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만남: 로버트 건드리, 김세윤 그리고 나

 

최근에 미국 신약신학계에 커다란 논란을 일으키는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저자는 저명한 신약신학자 로버트 건드리(Robert H. Gundry)입니다. 1932년생이니 올해로 84세의 노학자입니다. 내가 이 학자와 학문적 인연을 맺게 된 시기는 지금부터 35년 전으로 올라갑니다. 당시 나는 미국 캘빈신학교(M.Div. 과정)에서 공부하는 신학생(1980-1984)이었고 나의 공관복음서 신약학 교수님은 배스티안 밴 앨더른(Bastiaan Van Elderen, 1924-2004) 교수였습니다. 언어학(헬라어)에 통달하신 선생님은 헬라어 본문의 구문법을 통하여 본문 해석의 방법론을 가르치셨는데, 매 수업 시간마다 5-10페이지 정도 되는 강의안(syllabus)을 나눠주시곤 했습니다. 그의 마태복음서 강의를 통해서 로버트 건드리 박사를 알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35년이 지난 지금 그 때 모아두었던 그분의 강의안들을 다시 살펴볼 때마다 감탄과 감사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얼마나 소중하고 무게가 있는 내용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성실하시고 친절하신 선생님이었는지 모릅니다.

 

1985년에 나는 캘빈신학교의 목회학 석사(M.Div.) 과정을 졸업한 후 구약학 전공의 신학석사(Th.M.)과정 입학하여 존 스택(John H. Stek) 교수 밑에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김세윤 박사라는 분이 캘빈신학교에 특강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시 캘빈신학교의 바울 신학 과목은 또 다른 신약학 교수인 50대 후반의 앤드류 밴스트라(Andrew J. Bandstra, 1926년생, 그의 대표적 저술은 The Law and the Elements of the World: An Exegetical Study in Aspects of Paul's Teaching) 박사가 가르치셨는데 그의 강의시간에 20살 연하의 새내기 한국 학자 김세윤 박사를 초빙하여 특강을 부탁한 것이었다. 당시 김세윤 박사는 영국에서 박사 학위 취득 후 한국의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한 신참 교수였습니다. 그는 1982년에 그의 출판된 학위논문인바울복음의 기원(The Origin of Paul’s Gospel)이라는 책을 캘빈신학교가 소재하고 있는 미시간 주 그랜드래피드 시의 어드만 출판사(Eerdmans Publishing Company)에서 출판한 이력이 있는 장래가 촉망되는 학자였는데, 당시 캘빈신학교가 속한 북미 기독개혁교단(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약칭으로 CRCNA)에는 한인교회로서 기독개혁교단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던 고 김의환 박사(나성 한인교회 목사, 전 총신대 총장)가 김세윤 박사를 신약학 교수로 천거한 일이 있었고 이런 저런 이유로 선을 보러 오게 된 경우였습니다. 당시 캘빈신학교의 복음서 과목 담당 교수였던 밴 엘더른(Bastiaan Van Elderen) 박사가 네덜란드 자유대학교(Vrije Universiteit, Amsterdam, 약칭으로 VU) 신약학 교수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그 자리가 비었던 것입니다. 김세윤 박사는 바울신학 전공자였기 때문에 자연히 신약학 교수 임용 후보자 군에서 빠지게 되었고 그 자리는 네덜란드 자유대학교에서 요한복음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당시 캘빈대학교의 성서학과에서 20년째 가르치던 데이비드 홀베르다(David Holwerda, 출판된 학위논문, The Holy Spirit and Eschatology in the Gospel of John, Kampen: Kok, 1956) 교수가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특강을 맡은 김세윤 박사는 성서신학으로 세계 신학계에 중요한 공헌을 한 독일의 튀빙엔 학파”(Tübingen School)에 대해 강의하였는데 그랜드래피드에 오기 방금 전에 튀빙엔 대학에서 연구학기를 마치고 돌아왔기 때문에 적절한 토픽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김세윤 교수는 당시에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복음주의 신약학자인 영국의 맨체스터 대학의 F.F. 부르스(Bruce, 1910-1990) 밑에서 공부하고 학위를 취득하면서도 학위논문 연구를 위해서 독일의 튀빙엔 대학에 가서 그곳의 신약학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학자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김세윤 교수는 자신의 박사 지도교수(Doktor Vater)F.F 부르스 교수의 학문적 영향에 대한 언급은 거의 하지 않는 대신에 독일 튀빙엔의 피터 스툴마허(Peter Stuhlmacher), 오토 호피우스(Otto Friedrich Hofius)와 같은 교수들과의 인연을 매우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김세윤 교수 개인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인식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즉 영어권 학풍과 독일어권 학풍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국은 현재 여러 측면에서 유럽권의 영향보다 영어권 특별히 미국의 영향력아래 있다고 보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에 이르기까지 아메리카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영어 학습 돌풍이 한반도를 강타한지도 상당히 오래되어갑니다. 이 회오리바람은 아직도 그 기세가 꺾일 줄 모릅니다. 오히려 더욱 강해지는 현상입니다.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어린이 영어학원에서부터 학원재벌이 세워질 정도로 흥왕 하는 서울 강남의 유수한 영어 학원들, 도심지의 세련된 영어 간판들과 텔레비전 광고 문안들, 일반인들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영어표현들, 각종 디자인과 아파트와 신종 출시 자동차들의 이름들, 컴퓨터 용어와 책표지부터 국제학회 언어도 온통 (미국식)영어입니다. 대학교에서 원서강독이나 원문이라고 할 땐 대부분 영어책을 의미하고 미국에서 출판한 미국영어원서가 대부분입니다. 이러다 보니 영어는 매우 익숙한 언어이며 그래서 지성적으로 정서적으로 거리감이 덜하며 부담감이 적은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부담감이 덜하고 친숙하다고 해서 영어라는 언어가 쉬운 것인가요? 거저먹을 만큼 만만한 언어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세상에서 어느 언어가 제일 복잡하고 숙달하기 어려운 언어인 줄 아는지? 대답에 앞서 많이 발전한 언어일수록 언어체계가 복잡할 것이고, 복잡하기 때문에 변수가 많을 것이고 따라서 숙달하기에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덜 발달된 언어일수록 쉽다는 뜻이 됩니다. 언어학에 호소하지 않아도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고대로 올라 갈수록 언어구조는 단순하고 쉽습니다. 내 학문 분야를 예로 들어보지요. 내가 가르치는 구약학 분야는 고대 근동학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고대어인 수메르어, 아카드어, 우가릿어, 히브리어, 아람어 등을 도구로 배웠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이런 고대어들이 낯설고 또한 생김새도 이상하기 때문에 배우기가 무척 어렵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의 언어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아주 쉽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지요. 성경 가운데 구약성경은 히브리어(약간의 아람어)로 기록되었고 신약성경은 그리스어(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어느 언어가 어려울 것 같으냐고 물으면 거의 다 히브리어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상 그리스어(헬라어)가 히브리어보다 어렵습니다. 히브리어보다 더 많이 발전되어 왔기 때문에 복잡합니다.

 

그렇다면 현대어 중에서 어느 언어가 가장 복잡하고 따라서 배우기가 어려운 언어일까? 언어학적으로 말해 영어가 가장 복잡한 언어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현대의 다른 언어보다 그만큼 발전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발전 과정이 복잡하기 때문에 따라잡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고대로 올라갈수록 언어 체계는 단순하고 따라서 습득하기가 쉽지만 현대로 올수록 언어는 복잡해지고 배우기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친숙하고 익숙하다고 해서 배우기 쉽다는 뜻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학문 세계에선 영어가 친숙하고 익숙한 언어이기에 배우기도 쉬울 것이라는 대중적 신화가 유통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신학계에선 영어와 독일어(네덜란드어도 독일어 계통임)의 관계가 그런 것 같습니다. 영어와 독일어 중 어느 것이 쉬운 언어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어라고 대답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라 영어가 친숙하고 낯설지 않게 느끼기에 쉬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언어구조 자체만을 놓고 보면 영어가 독일어보다 어려운 언어입니다. 그럼에도 한국의 신학생들에겐 독일어권에서 공부하는 것이 영어권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좀 더 학구적이고 학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중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독일어는 어려워 보이고 영어는 쉬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한국에선 유치원부터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와 대학에 이르기까지 16년 이상을 영어를 가까이서 보고 공부하지만 독일어(프랑스어)는 거의 학교에서 접해보지 못한 외계어수준입니다. 그러면서도 서양의 지성사를 수놓은 수많은 저명한 학자들이 대부분 유럽 학자들(독일과 프랑스)이라는 생각 때문에 유럽언어는 어려울 뿐 아니라 좀 더 유식하고 학문적이라는 통념을 갖게 된 것입니다. 물론 (유럽)학풍이라는 것을 무시하지 못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그 학풍의 내용을 알고서 그렇게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그런 고풍스럽고 격조 있는 학풍이 있다고 계속해서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런 대중적 신화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영어권에 많이 노출되어 있고 또한 영어권의 영향력을 가장 많이 받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특별히 미국적 영어권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사실은 한국 신학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교회들은 보수적이고 복음적입니다. 한국에 온 초기의 미국의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이 이러한 현상에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도 이런 이유는 합리적입니다. 선교지에선 복잡한 신학은 오히려 복은 전도에 방해가 됩니다. 대중들은 단순하고 명료한 것을 요구합니다. 단순하게 성경의 복음을 가르치려면 성경해석 역시 단순하고 명료해야했습니다. 사실 성경의 역사 비평적 문제들(사회학적 이해, 문헌의 전승사와 편집 등)이 일반 신자들의 신앙에 무슨 도움이 될까? 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적 학문이라는 것이 유럽에서 시작되었고 거기서 발전되었지만 한국적 토양에는 잘 맞아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한국 교회들이 복음주의적이고 보수적이듯이 한국의 신학계 역시 신학적으로 대부분 복음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참고로 유럽에선 복음주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미국적 토양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영어로 evangelical은 진보주의나 자유주의에 대조되는 복음주의적이란 뜻이지만 유럽에서 독일어나 네덜란드어로 evangeliche는 복음주의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가톨릭과 대조되는 개신교적이라는 뜻입니다] 언어와 관련하여 한국의 복음주의 내지 보수주의적인 신학교들의 교수들의 상당수는 영어권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대부분 미국의 복음주의 권역의 학교들(Fuller, Gordon-Conwell, Trinity, Westminster, Southern Baptist, Asbury, Talbot)이나 영어를 사용하는 네덜란드 개혁파 영향의 남아공 대학들(Stellenbosch, Pretoria, North-West, Bloemfontein)이나 신학적 색깔이 유별나게 드러나지 않는 영국이나(Glasgow, Durham, St. Andrew, Bristol, Liverpool, Sheffield, Manchester, Wales, Oxford, Cambridge)이나 호주(Sydney, Queensland)와 캐나다(Toronto, McMaster )에서 공부를 한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한국의 진보적인 신학교들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의 상당수는 독일어권(Bonn, Tubingen, Bochum, Heidelberg, Munster, Marburg, Berlin, Humbolt, Bethel )에서 공부하였거나, 유럽의 비평적 학문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주류교단(mainline church)의 신학교들(Harvard, Yale, Princeton, Union, Chicago, Duke, Boston, Claremont, GTU[Graduate Theological Union], SMU[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McCormick, Garrett-Evangelical)에서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언어적으로 신학계에선 유럽 언어권(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심지어 노르웨이)에서 공부한 학풍과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영어권에서 공부란 학풍의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한국에선 영어권의 학문성보다는 독일어권 학문성에 대한 동경심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언어 사용 빈도만 따져보아도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이 쉽게 입증됩니다. 대부분의 일반 신학생들의 경우 영어에 탁월하지는 않지만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나 부담감은 다른 유럽 언어에 비해 훨씬 덜합니다. 여러 가지 사회적 환경 요인 때문에 영어는 익숙하고 친숙해 보이지만 독어나 프랑스어나 네덜란드어와 같은 유럽 언어는 낯 설고 사용되는 경우도 거의 없기에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그 언어로 공부하는 것에 대해선 일말의 존경심과 함께 동경심을 갖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잠정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내 자신도 영어권에서 오랫동안 살고 공부했을 뿐 아니라 유럽의 네덜란드에 거주하면서 그 나라의 언어를 습득하고 그 언어로 된 책으로 공부하고 또한 박사 학위를 마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좀 더 객관적으로 이런 판단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자부해 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유럽언어(독일어권)권이 학문적으로 우수한가 아니면 영어권이 학문적으로 우수한가를 놓고 쓸모없는 신경전을 부리거나 말하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들의 유치한 주도권 싸움밖에는 달리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사람이지 독일 사람도 미국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어느 학문 분야든지 학문세계의 세계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가까이 들여다보면 학문 세계의 지역성이라는 것이 더욱 강하기도 합니다. 학문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토양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모국어로 연구하고 공부하고 학문을 발전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점점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세계의 신학계를 둘러보면 독일 학계에선 대부분 자기들의 언어로 쓴 학문서나 논문들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사상적 교류를 합니다. 내가 유럽에서 공부하면서 경험했지만 심지어 네덜란드만 해도 대부분의 신학서적은 네덜란드어나 독일어로 된 책이었지 영어권 서적들은 별로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영어권의 학문성을 낮게 본다는 뜻은 아닙니다. 학문의 지역성을 보여주는 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어권에서도 동일합니다. 영어권의 전문 신학서적들을 각주나 참고문헌들만을 대충 보아도 대부분 영어권의 책들과 저자들을 인용할 뿐입니다. 그만큼 학문의 시장은 각 언어의 내수시장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아쉽게도 한국의 신학은 어쩔 수 없이 영어권과 유럽에서 배워서 이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외국의 것들을 많이 인용해야 권위가 있고, 그것도 친숙한 영어보다는 낮선 독일어와 같은 유럽의 언어를 사용하거나 인용하면 더더욱 학문적이고 권위가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의 사고가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치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혹시 이것이 우리 속에 잠재해 있는 유아기적 학문적 사대주의가 아닐까 합니다. 자신이 공부한 나라에 대해 학문적 주종관계를 설정하고 다른 나라에서 공부한 사람들과 학문적 우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도토리 키 재기하는 것이 아니고 뭘까? 어디서 배웠던 그 배움의 가치는 결국 우리나라의 신학발전과 그 신학을 통한 한국교회의 건강을 위해서 사용될 때만이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러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학자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재능을 현학적 과시용으로 사용한다면 그건 학문의 교만(hubris)일 것입니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등 수많은 언어들은 평범한 학생들에게 동경심과 존경심을 심어주지만 동시에 깊은 좌절감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랜드래피드에 특강하러 온 젊은 김세윤 박사는 내가 살고 있던 집에 와서 함께 식사를 하며 상당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당시 한국 학생은 나와 고 이정석 교수(국제신학대학원 대학교) 정도만 있었는데, 김세윤 박사와 이정석 교수는 고 김의환 박사와 함께 동향인들이었기 때문에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우리 집에 온 김세윤 박사의 첫 인상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나처럼 대두형에 그리 크지 않은 키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털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곧 친숙해졌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영어로 처음 강의하게 된 일에 대해 약간의 조바심을 갖고 있는 듯 했습니다. 어떻게 강의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뭔가를 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김세윤 박사가 나 보다 7살 연장자이니깐 당시 김세윤 박사는 39살이었고 나는 32살의 한창 때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때 김세윤 교수는 두 번째 영문 서적을 어드만 출판사에서 출간하였는데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자, The ‘Son of Man’” as the Son of God, 1985]라는 책입니다.

 

내 집 아파트의 거실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김세윤 박사가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캘빈신학교의 신학교육이 상당히 세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요하면서 말끝을 흐렸습니다. 나도 눈치가 좀 있어서 바로 지난 여러 해 동안 공부했던 경험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책꽂이 하단에 여러 개 바인더에 묶어놓은 밴 앨더른(Van Elderen) 박사의 복음서 강의안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김세윤 박사는 그 강의안의 분량과 학문성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보아하니 자세히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약간의 허세를 부리며 나는 김세윤 박사에게 복음서 강의안 여러 개를 건넸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젊은 김세윤 박사를 처음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나는 북미 기독개혁교단(CRC)에서 안수를 받고 오하이오 주 톨리도(Toledo) 시에서 목회를 시작하였고 김세윤 박사는 2년간(1985.91987.8) 캘빈대학교에서는 다인종/다민족 강좌(Multi Racial Lectureship)의 교수로서, 캘빈신학교에서는 바울신약을 교수하였습니다. 그곳에 체류하는 동안 아브라함 카이퍼의 전통의 일반은총과, 신학적으로는 개혁신학의 또 다른 이름인 왕국신학”(Kingdom Theology)으로 대표되는 미국 기독개혁교단의 신학적 전통을 가까이서 접하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 후 김세윤 박사는 Fuller신학교의 교수로 재임하면서 그곳에 함께 일하는 북미기독개혁교단 출신의 리처드 마우(Richard Mouw) 총장이나 이제는 고인이 된 윤리학자 루이스 스메디스(Lewis Smedes)와 신학적 연대감을 가졌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바울신학 전공 분야는 제외하고, 김세윤 박사가 한국 교회와 한국 신학 일반에 대해 일갈하면서 기고하는 글이나 대중 연설의 내용을 보면 그에게서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적 개혁 신학적 틀을 볼 수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또 한 가지는 그가 미국 Fuller신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뿐 아니라 한인목회학박사원의 원장으로 오랫동안 수고하면서 한국인 목사들의 신학교육에 헌신한 것은 큰 공헌이라 생각이 듭니다. 그 후 김세윤 박사는 고 이정석 교수를 한국에서 불러들여 Fuller신학교의 교회사 교수 및 한인목회학박사원의 부원장으로 함께 일하게 된 것도 고 이정석 교수의 가까운 친구로서 내가 김세윤 박사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일입니다.

 

다시 나의 신학대학원 3학년 때로 돌아가 봅니다. 당시 밴 앨더른(Van Elderen) 박사로부터 마태복음서 강의를 듣고 있었습니다. 바로 앞선 해에 나온 주석이 로버트 건드리(Robert Gundry) 박사의 촘촘한 영어로 652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마태복음 주석] = Matthew: A Commentary on His Literary and Theological Art (Eerdmans, 1982)이었습니다. 그 책은 당시에 한창 영향력을 덜치고 있었던 편집비평”(redaction criticism)이라는 도구를 복음주의 서클에 극대화시켜 사용한 대표적인 주석이었고, 그 일로 인해 건드리 교수는 당시 댈러스(Criswell Center for Biblical Studies in Dallas)에서 열린 미국 복음주의신학회 연례 총회에서 퇴출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를 미국복음주의신학회에서 퇴출하는데 앞장섰던 분이 당시 고든콘웰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로저 니콜(Roger Nicole)이었는데, 그 당시 35년 된 복음주의학회의 댈러스의 모임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로버트 건드리 박사가 마태복음서의 역사적 신뢰성(historical trustworthiness)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는 한, 복음주의신학회를 창설한 5명중의 한명으로서 나는 매우 무거운 마음으로 건드리 박사가 복음주의신학회에 사표를 제출할 것을 공적으로 요구하는 바입니다.”

 

이 소식을 마태복음 강의 시간에 밴 앨더른(Van Elderen) 교수를 통해 들은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미국에선 이런 일도 있구나. 학문과 신학적 전통 사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구나. 학문성은 무엇이며 신앙고백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마태복음서는 유대인들의 대표적인 경전 해석방법론인 미드라쉬”(Midrash)의 영향을 받아 쓴 신학적 창작물(편집비평학적 표현임)이라는 로버트 건드리의 말을 확인해보려고 나는 마태복음서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도서관으로 달려가 로버트 건드리 박사의 출판된 학위논문(The Use of the Old Testament in St. Matthew’s Gospel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Messianic Hope. Leiden: E. J. Brill, 1967)을 정독하고 그 분야에 대해 공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세월이 흘러 30여년이 지난 올해, 이미 일선에서 은퇴한 로버트 건드리 박사는 새로운 책을 출간하면서 또 다시 복음주의 신약학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도 다시금 편집비평을 사용하여 마태복음서가 그리고 있는 베드로를 살펴보았고, 그 연구 결과를 책으로 발표하게 된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마태가 그리고 있는 베드로는 거짓 제자였고 배교자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책 제목이 그렇습니다! Peter: false disciple and apostate according to Saint Matthew (Grand Rapids: Eerdmans, 2015). 139페이지에 비교적 짧은 책이지만 건드리는 베드로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가톨릭은 말할 것도 없고 개신교의 입장도 마찬가지)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해석을 내 놓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는 가톨릭에 대해선 치명적 펀치(!)가 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마태복음서가 정말로 베드로를 거짓제자로, 배교자로 그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다시 미국의 복음주의신학회는 이 문제에 대해 술렁거리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통용되는 편집비평에 대해 매우 강하게 부정적이었던 예전의 입장을 되풀이할 것 같지는 않지만, 베드로는 배교자였고 거짓 제자였다는 건드리의 입장은 다시금 복음주의신학회에 불을 지르는 격이 되었습니다. 두고 볼 일입니다. 아무래도 건드리 박사가 잘못 건드린 것 같은 생각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30여년전의 야사(野史)였습니다. 야사를 알면 정사(()가 제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Mackinac Bridge, MI]

Makinaw Bridg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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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 신학 에세이: “루터파와 개혁파의 신학적 강조점” file 류호준 2015.11.29 1773
533 신앙 에세이: “종말론적 중앙공원” file 류호준 2015.11.20 1028
532 일상 에세이: “식사시간이 거룩한 이유” [1] file 류호준 2015.11.19 1246
531 신앙 에세이: “길(道)의 사람들과 교구(敎區)와 순례자들” file 류호준 2015.11.08 1100
» 일상 에세이: “만남: 로버트 건드리, 김세윤 그리고 나” file 류호준 2015.11.06 4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