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곧 출간될 저서『하늘 나그네의 사계』에 실린 저자의 서문 중에서 발췌하여 싣는다.


『하늘 나그네의 사계』에 실린 저자 서문 중에서



창조자 하나님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실 때 어떤 방식으로 계시하실까? 신앙의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합니다. 하나는 자신이 만드신 창조세계를 통하여 자신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드러내신다고 합니다. 일명 ‘자연’이라고 부르는 피조세계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행동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천둥번개와 폭풍한설이 몰고 오는 태고(太古)의 두려움, 시내와 강들과 바다의 한적함과 여유로움, 구름 걷힌 첩첩산중의 신비로움과 신선함, 광활 광대한 대평원의 고즈넉함과 고원지대의 적막함, 별들이 쏟아지는 여름밤의 신비와 오묘함,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의 일정함과 신실함, 석양 녘 낙조(落照)의 찬란함과 아름다움 등 모두는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들입니다. 이런 사실을 마음에 두고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이것을 16세기의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은 ‘신성(神性)에 대한 감각’, ‘신(神)지식’(Divinitatis Sensum) 혹은 ‘종교의 씨앗’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느끼고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그분에게 감사하지도 않고 오히려 생각이 허망(虛妄)하여져 헛된 것이나 비어 있는 것이나 오래가지 않는 것이나 하찮은 것들에 몰입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즉 사람은 모두 우상숭배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숭배하고 추구하는 어리석은 우상숭배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21-23절)


구원자 하나님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 길을 가지 않자 하나님은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번에는 자신을 ‘구원자 하나님’으로 알리신 것입니다. 첫 번째 방식이 충분하지 않다는 뜻도 됩니다. 자연을 통해서 어렴풋하게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알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그런 어리석음과 멸망의 길에서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깊은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오직 ‘구출’뿐입니다. 구원자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은 모두 그런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죽어가는 사람에게 구원자가 필요한 법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구원자는 필요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필요’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구원은 장식품(ornamental)이 아니라 근본적 필수품(structural)입니다. 구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만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구원이 절박하게 필요하지 않는데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신앙은 문화적인 일에 불과할 것이며 자신을 가꾸기 위한 화장품이나 장식용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심각한 문제의 한 단면이 아닌가 합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운동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마르틴 루터는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남긴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거지들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거지들만이 구원자를 기다릴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자를 기다리는 신앙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구성원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에 대해 잘 알고 그가 행하신 일들에 관해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구원역사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일을 가리켜 ‘구원사역’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구원역사’라고 부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역사’를 중요시 하는 이유는 역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사역하시고 활동하시는 무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은 역사를 매우 진지하게 다룹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역사를 심각하게 다룹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인류의 삶과 시간과 공간 안에 들어와서 활동하신 구체적 발자국을 기록하고 있는 ‘구원역사서’입니다.


구약을 읽어보면, 특별히 예언서를 주의 깊게 읽어보신 분들은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과거 역사를 기억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장면들을 많이 만날 것입니다. 과거 그들의 조상들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권고를 귀 따갑게 들을 것입니다. 어떤 사건입니까?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의 기원을 알려주는 역사적 사건,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찾아볼 수 있는 기념비적 사건, 후대의 모든 이스라엘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결 띠(連帶)와 같은 사건, 야웨 하나님 밑에 하나로 뭉쳐진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신기원적 사건이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은 각종 절기를 지킬 때마다 이 출애굽의 구원 역사를 기억했습니다. 그들은 구원 역사를 암송하고 낭송하였습니다. 기억함으로써 그들은 오래전에 발생했던 역사적 사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영어로 ‘기억’(remember)이란 단어는 두 단어(re + member)의 합성어입니다. ‘다시 멤버’(한글 성경에는 종종  ‘지체’로 번역한다)가 된다는 뜻입니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서 서로 간에 그 어떤 물리적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지만, 우리는 ‘기억’이라는 놀라운 지적 영적 기능을 통하여 시간과 세월을 넘어 이전의 우리 선조들이 경험했던 사건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다시 멤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과거 출애굽 역사를 기억하고 낭송함으로써 한분 하나님 아래 ‘하나님의 백성 됨’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런 기억은 반복되는 집회와 절기를 통해 그들의 심장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이처럼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출애굽 사건)에 대한 의식이 매우 강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출애굽 구원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과 행위를 규정하고 형성하는 ‘윤리’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십계명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회적 공동체성을 규정하는 윤리의 뼈대라고 한다면 십계명 서두에 있는 ‘전문’(前文)은 십계명을 지켜 갈수 있는 동력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야웨이니라.” 즉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에 대한 보답과 반응으로 열 가지 포괄적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달리 말해 십계명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감사의 반응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율법의 제 3의 용법’(the third use of the law)이 이것을 가리킵니다. 율법은 크리스천의 삶과 행위의 원리와 규범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역사의 중심 예수 그리스도


옛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 백성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위대한 구원 사역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구약에서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절정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일입니다. 일명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 역사 안으로 들어오셔서 사람이 되신 ‘성육신’(incarnation) 사건은 구약 성경 전체가 역사를 통해 움직여 갔던 동력의 절정입니다. 구약에서 계속되어 온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는 깊은 수렁 속에 빠져 죽음의 막장으로 치닫는 인류를 구출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약의 큰 물줄기를 형성하면서 계속됩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로부터 기독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유지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원 역사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 매 주일의 첫째 날에 모였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금요일에 죽으시고 유대인의 안식일에 해당하는 토요일에 죽음의 권세아래 지옥을 경험하시고 안식 후 첫날에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여 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안식 후 첫날을 ‘주님의 날’(主日, Lord's Day)로 지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고 믿는 신앙’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날이 ‘주일’입니다. 주일(主日)은 문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로 고백하고 기념하고 그분의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주일에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듣기 위해 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모임과 설교는 주인 없는 잔치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을 기억하고 선포하고 그에 따라 살기로 결심하고 그분의 온전한 다스림의 때가 오기를 고대하며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구원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력과 예수 그리스도


역사의 중심점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건(오심과 고난당하심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반복적으로 기억하기 위한 방편중의 하나가 ‘교회력’(christian calendar)에 대한 이해와 올바른 사용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살아가야하는 달력을 교회력이라고 부릅니다. 이 달력은 우리가 집에 걸어놓고 보는 달력이 아닙니다. 12개월로 구성된 달력이 아닙니다. 교회가 기념하고 지키는 달력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달력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력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분을 기다리는 일, 그분이 이 세상에서 당하신 고난들을 묵상하고 참여하는 일, 그분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함께 경험하는 일, 그분의 부활에 참예하는 일, 그분이 만왕의 왕으로 우주의 주님으로 등극하신 사건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일, 지상에 남겨둔 교회를 위해 보냄을 받은 성령과 그의 사역 등, 이런 것들을 기억하는 공동체가 신앙 공동체입니다. 종교적 날들과 절기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사역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장차올 영원한 나라를 기대하게 하는 기회들입니다.


교회력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우리의 신앙이 세워져야한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 선포(설교)의 중심 주제라면,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 ‘하나님의 크신 일’을 반복적으로 기념하고 선포해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가운데 어떤 사건을 중심으로 만들어질까? 쉽게 말해서 교회의 절기들 가운데 어떤 절기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아마 두 절기가 떠오를 것입니다. 성탄절과 부활절입니다. 산타클로스와 성탄절을 혼동하지 않은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기독교 신앙에서 분명 가장 중요한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날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절기입니다. 성탄절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심적 질문은 “왜 하나님은 사람이 되셔야만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신학적 대답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주어져왔습니다. 이와 함께 또 다른 절기가 부활절입니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 신앙을 생각할 수 없고, 교회가 초기로부터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해 회집한 날이 지금의 ‘주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기독교 절기 가운데 부활절 보다 더 중요한 날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 전통은 교회력을 생각함에 있어서 서로 다른 두 가지 입장을 견지해왔습니다. 하나는 부활절을 중심으로 시작하는 교회력이고(The Easter Cycle), 다른 하나는 성탄절을 중심으로 시작하는 교회력입니다(The Christmas Cycle). 내용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볼 때 부활절 중심의 교회력이 우선적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구약에서 시작되는 구원역사의 흐름에서 볼 때 메시아를 기다리고 기다리던 분의 탄생으로 시작하는 성탄절 중심의 교회력 역시 신앙 교육적 측면에서 유익하다고 생각됩니다.


본서에서는 교인들의 신앙 교육적 측면에서 교회력을 살핍니다. 성탄절을 중심으로 시작하는 교회력을 사용하여 각 절기들이 표명하고 있는 메시지들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설하고 있는 본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알아야할 복음의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본서에서 채용하고 있는 기독교 달력은 거칠게 말해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릅니다. 대림절(Advent) → 성탄절(Christmas) → 주현절(Epiphany) → 사순절(Lent) → 수난주간(Passion Week, [종려주일(Palm Sunday) → 성금요일(Holy Friday)]) → 부활절(Easter) → 승천기념일(Ascension Day) → 성령강림절(Pentecost)로 이어지며 그 후에는 다시 대림절이 돌아 올 때까지를 삼위일체 주일(Trinity Sundays)이 부르는데, 이 명칭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일상적 삶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주일들이라는 뜻입니다.


“희망에서 기쁨까지”


먼저 교회력을 성탄절을 중앙으로 삼아 대림절(待臨節)과 성탄절과 주현절을 함께 묶는다면, 그 주제는 “희망에서 기쁨까지”(From Hope To Joy)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초림)을 기억하고 다시 오실 그분을 기대하는 신앙공동체는 언제나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대림절 메시지들은 이런 희망에 관한 주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합니다. 우리가 지닌 희망은 떡 반죽에 숨겨진 누룩과 같아서 비록 그 존재성이 희미하거나 미약하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반드시 반죽을 부풀게 할 것입니다(1장). 희망을 품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까치발처럼 발뒤꿈치를 들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아니면 ‘학수고대’(鶴首苦待)란 용어같이, 학의 목처럼 목을 길게 빼고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2장). 그들은 흑암이 지배하는 이 세상 속에서도 성탄절의 식사를 기다리는 희망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이 언제 어느 때에 오실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3장).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오시자 그분의 영광을 음미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대림절의 크리스천들입니다(4장). 희망이 기쁨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의 오심이 유대인들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민족적 경계선을 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물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분을 찾는 자만이 찾을 것입니다. 구원과 은혜를 받는데 있어서는 기득권이란 없기 때문입니다(5장).


“재(灰)에서 불까지”


교회력을 부활절을 중심으로 삼아 사순절과 부활절과 오순절을 함께 묶어 본다면, 그 주제는 “재(灰)에서 불까지”(From Ashes To Fire)입니다. 재(灰)로 상징되는 인간의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가멸성, 可滅性)을 기억하는 성회(聖灰) 수요일(Ash Wednesday)로부터 40일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광야 40일의 기도와 금식과 명상 기간을 기억하며 동시에 옛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 40년에 참예하게 됩니다. 사순절은 옛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한 것(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의존하여 사는 것)을 새 이스라엘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극복하시고 회복하신 사실을 기억하며 회상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한 광야에서의 체류 기간에 예수께서 경험하신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을 묵상하는 기간입니다(6장). 동시에 사순절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일어나는 세례전적 영성을 가다듬어야 합니다(7장). 수난주간에 발생한 최대의 비극은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를 배신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가룟 유다 한 사람에 국한 되는 이야기일 것입니까? 그렇다면 누가 배신자입니까? 열두 명 중의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누구도 그런 운명에 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순절의 메시지는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도록 합니다. 영적 성찰의 기간이기 때문입니다(8장).

사순절의 한 부분인 종려주일 역시 왜 예수를 따랐던 군중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그를 환영하긴 했지만 그들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걸어가시는 그 길의 끝을 내다 볼 수 없었는지를, 즉 그들의 어리석은 단견과 그들 앞에 놓인 장애물들을 생각해 보라는 절기입니다. 예수가 진정으로 누구이신지 알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었던 무리들의 어리석음을 기억해야 합니다(9장). 사순절의 절정은 수난주간과 그 안에 들어있는 성금요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그분의 외마디가 비극적 절규였는지 아니면 그 이상이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비극적 절규로 숨을 거두었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었겠는지 의아할 뿐입니다(10장).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가 길고 긴 금요일 밤과 무료하고 식상한 토요일로 끝이 났더라면, 아니 요한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밤’(Night)들만이 계속된다면 인생은 정말 생지옥일 것입니다. 물론 삶은 계속해서 어둡고 음산한 날들로 가득 할지도 모릅니다. 인생은 계속해서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찬 날들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 생(生)에서는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는 고통의 날들이 매일 우리를 집어삼키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삶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부활절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밤 시간들’을 ‘영원한 아침’으로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이른 아침에 햇살이 온 하늘을 비추던 순간에 마리아는 알았습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온다”(시 30:5)는 사실 말입니다(11장).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승천 없이는 절정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부활을 축하하는 대규모 불꽃놀이가 이뤄질 수 있는 최상의 적절한 시기가 있다면 예수님의 승천 때일 것입니다. 하늘의 보좌로 등극하시는 천상의 대관식이 열리는 때가 승천일입니다. 개혁교회는 전통적으로 승천일(오순절로부터 열흘 앞인 목요일에 떨어진다)을 기념하여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로소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님으로 등극하시는 우주적 실황이 전개되던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왕이여, 영원하소서!” “우리의 주님, 만만세(萬萬歲)!”라고 외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실까? 십자가 위에서 모든 구원 사역을 다 이루셨다면 지금은 휴가를 즐기고 계실까? 이에 대한 대답을 찾고자 합니다. 결코 그는 한가하게 쉬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고 계실 것인가? 12장은 이에 대한 대답을 제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은 그가 지상에 두고 가신 열두 제자들을 세워 그들에게 맡긴 ‘위대한 지상명령’ 혹은 ‘위대한 선교 위임’(Great Commission)을 이루게 함으로써 계속됩니다(마태 28:18-20). 그러나 위대한 선교 명령은 단순히 인간의 열정이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전파와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오셔야만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행전 1:8).

성령강림절(오순절)은 구원역사에 대 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바벨에서 반역했던 인류가 그 후 분열과 깨어짐과 흩어짐의 역사를 만들어 갔다면 오순절의 성령은 언어와 인종과 문화의 장벽을 극복하고 동일한 한 언어로 하나님의 크신 구원행동을 이해하고 찬양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은 첫 번째 오순절뿐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입니다. 성령 없이는 교회의 출생이 불가능했고,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서는 교회가 자랄 수도 없고 복음의 증인이 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강력한 성령의 바람이 불기를 간구하고 기도해야할 것입니다(13,14장).

부활절을 중심으로 한 사순절에서 오순절까지는 이처럼 ‘재에서 불로’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종교개혁기념주일과 전 세계의 교회들이 함께 지키는 성만찬주일에 관한 메시지를 첨가하였습니다. 전통적인 교회력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이런 절기들은 우리의 신앙적 유산을 되돌아보고 복음의 기초를 재천명하며(15장),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어야할 가시적 표현으로서 성만찬 시행은 복음의 핵심을 가르쳐줍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며 성만찬은 말씀선포인 설교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중요한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위한 변호


우리는 설교가 과잉 공급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 라디오 방송이나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쉴 사이 없이 설교가 제공됩니다. 대부분의 교회들 역시 앞을 다투어 인터넷 동영상 설교를 내 보내고 있습니다. 기독교 서점가에도 각종 설교집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개교회의 목사님들은 사실상 끝없는 설교를 기관총처럼 쏟아 냅니다. 한국의 목회자들은 수많은 설교 속에 익사할 정도입니다. 교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 보니 설교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은 그리 높지 못한 편입니다. 목사들 역시 설교에 대해 낮은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마치 섀도복싱(shadowboxing)을 하는 권투 선수처럼 아무런 복음의 파괴력을 느끼지 못한 채로 강단에서 내려옵니다. 설교에 대한 저평가는 우리가 사용하는 좋지 못한 말투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했던 소리를 또 하거나, 뻔한 도덕적 훈계를 하면 흔히 하는 말, “또 설교하고 있네!”라고 합니다. “설교하고 있다니!” 이 말보다 더 비극적이고 슬픈 말이 어디 있을까요? 심지어 목회자들의 모임인 노회나 총회에서 의견이 갈려 말다툼이라도 있으면 누군가 먼저 마이크를 잡고 길고 지루하게 자기의 입장을 개진합니다. 대부분 성경구절을 인용해가면서 반대편을 향한 일방적인 훈계나 권면 혹은 율법적인 판단을 담은 연설이 되기 일쑤입니다. 그러면 좌석에 앉아 있던 반대편의 사람들은 큰 소리로 “그만 설교하시죠!”라고 비아냥거립니다. 듣기에도 거북스런 말입니다. 설교자들 스스로 설교 알기를 우습게 여기니 이것보다 더 서글프고 안 된 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설교가 왜 이리 천대를 받아야 하는가? 천대받는 설교를 왜 설교자 자신들은 끊임없이 하고 있을 것일까? 그렇다면 무엇이 설교를 설교답게 하는 것일까? 유려하고 감성적인 문장이나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예화나 설교자의 확신에 찬 어조나 아니면 친근한 스타일의 푸근함일까? 설교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 차지하는 역할은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정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설교를 진지하고 심각하게 듣고 받아들이는가? 그들은 그 말씀이 천성을 향해 먼 길을 떠난 순례자들을 위한 ‘여정을 위한 양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가야할 길이 아득한 자신들의 순례를 위한 ‘영혼의 양식’으로 설교를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설교에 대한 이런 심각한 인식이 목회자나 설교자나 설교를 듣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없는 한, 신앙생활은 그저 개인적 만족과 심리적 안위를 추구하려는 종교생활이거나 아니면 고단한 종교 활동에 참여하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설교자와 교인들은 함께 진지하게 설교에 참여해야합니다. 설교자는 확신 있고 설득력 있고 분명하게 복음을 전달해야 합니다. 구원이 절실 하게 필요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 ‘복음’(좋은 소식) 선포입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먼저 자신이 그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곱씹어 먹어야 합니다. 자신이 먼저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 다음에 청중들에게 확신 있게 전할 수 있는 법입니다. 청중으로서 교인들 역시 설교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 마치 개가 주인이 던져 준 뼈 고기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것처럼 그렇게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 1장에서 하나님의 가르침(토라)을 밤낮으로 ‘읊조리다’는 히브리어 ‘하가’의 본래적 뜻입니다.


본서에 실린 교회력의 따른 메시지들은 제가 섬기는 교회의 강단에서 전한 설교들을 독자들을 위해 새롭게 고쳐 쓴 문예․신학적 글들입니다. 저는 신학자의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학술 논문이 아니라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설교를 통해 제 개인의 사상을 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실 학술 논문은 가슴으로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가슴으로 말하고 씁니다. 저는 생명의 양식을 먹으러 정규적으로 하나님의 집에 나오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잘 준비된 양식을 먹어야 하는 권리가 주어져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설교는 언제나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신의 영역에 발을 들여 놓고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듣는 일은 마치 모세가 호렙산 중턱 불붙은 가시떨기 나무속에 계신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 자신의 더러운 신발을 벗어야만 하는 두려움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진정한 거지들’이 매 주일마다 주님의 식탁에 둘러 서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한다는 것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지만 동시에 식은땀이 흐르는 ‘고단한 즐거움’을 맛보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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