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유감: "색바랜 성경책 유감!"

2009.10.07 19:18

류호준 조회 수:6562

                                      "색바랜 성경책"



내게는 여러권의 성경책이 있다. 그냥 여러 권이 아니라 이런 저런 사연을 갖고 있는 다양한 성경 말이다. 몇일전 글을 쓰다가 성경구절 인용이 필요해서 책상에 무심하게 꽂혀있는 성경 한권을 펴들었다. 세월의 흔적을 금방 느낄수 있는  빛 바랜 진갈색의 성경으로, 책 모퉁이들은 셀수 없는 이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표지의 글자는 세월의 무게에 무디어져 금색 글씨가 이제는 은색으로 변했다. 마치 사람의 늙어감 처럼 말이다.

찾아야할 구절을 바쁘게 찾아 사용한후 덮어두었다. 하루가 지난 늦은 저녁이 되었다. 다른 날과 달리 오늘은 산사의 골방처럼 적막하다. 어둑한 방 저만치 책상 위 한 조각만을 밝혀주는 불빛이 유달리 눈에 시리다. 피상적으로 사물이나 사람을 대하기 일쑤인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책상의 전등 밑에 조용히 놓여있는 책의 자태가 오늘따라 눈 속에 박힌다. 깊숙히 패인 주름처럼 그렇게 깊게 색깔이 바랜 그 성경 말이다. 하릴없는 행인처럼 무심하게 책을 뒤척여 본다. 

첫장이었다. 목차가 나오기 바로 그 앞장이다. 갑작스레 손끝에 따스함이 느껴진다. 첫장 왼쪽에는 잃어버린 한마리의 양을 품에 앉고 맨발로 돌아오는 한 젊은 목자가 스케치화 된 수채화속에 들어있었다. 오른쪽 페이지는 보통 누가 누구에게 준다는 것을 기록할 수 있게 넉넉한 여백으로 남겨져 있었는데, 그 흰 여백에 서투른 글씨체가 내 눈에 들어왔다. 검정 크레용과 모나미 볼펜으로 합성해서 쓴 이름이었다. 삐뚤빼뚤한 손놀림으로 "Amy Jee Hyun Ryou", 그리고 그 밑줄에는 "Mom and Dad" 라고 쓰여져있었다. 이제는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큰 딸아이가 아주 어렸을 적 사용하던 영어성경이었다. 날짜 까지 선명했다. 8/30/87. 날짜의 글씨체는  딸의 것이 아니라 아내의 것이다. 나는 적어도 아내의 글씨체와 딸의 글씨체는 구별하기 때문이다! 연도를 계산해보니 딸아이가 6살때였다. 내가 미국에서 신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신입생 선물로 받은 깨알같이 작은 활자의 영어성경(NIV, New International Version)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딸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게 된 기념으로 그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딸아이는 그 성경책 위에 자기의 영어 이름을 간신히 그러나 성공적으로 기록한 것이었다. 글씨체는 삐뚤빼뚤거렸고, 철자는 한 곳에서 약간 틀렸지만 그래도 신기하고 아름다운 글씨였다!

그런데 그 지면 맨 상단에 어디서 많이 본 글씨체가 눈에 들어온다. 분명히 내 글씨체였다. 그 당시 나는 삼십대 중반의 나이로 신학교를 줄업한지 몇해가 안된 새내기로 미국 중서부의 오하이오의 한 작은 도시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당당하고 확신에 찬 목사 아버지가 아직도 목사관 뒤 넓은 정원과 푸른 잔디에서 들 토끼를 잡으려고 뛰어다니기를 좋아하던 어린 딸에게 무슨 신학적 명제를 전수하기나 하는듯, 영어로 이렇게 쓴 글이었다. 

Apply totally yourself to the text
Apply totally the text to yourself!

와우, 내가 봐도 멋진 말을 했던 것 같다! 물론 그 문장은 어디선가 들었던 것을 적어놓은 것이었지만 출처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 어쨌건 그 명문장(!)을 6살밖에 안된 어린 딸 아이에게 금과옥조처럼 명심하라며 일장 연설까지 하면서 적어준 글귀였다. 

이 성경책이 너덜해지고 낡은 것은 많이 읽어서가 아니라 이리 저리 이사다니느라고 그렇게 되었지만, - 미국에서 동부에서 서부로, 미시간에서 오하이오로, 다시 대서양을 건너 네덜란드로, 네덜란드 암스텔담에서 저 북쪽 간척지(polder라 부름) 플레보란드 주의 렐리스타트란 마을로, 다시 유라시아 대륙을 거쳐 한국으로 오며 이리저리 부대끼고 채인 영광의 상처들이다. -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내 자그만 책상 앞에 정중하게 앉아있다. 그리고 바로 이 성경이 내게 다시금 명령한다. "류 목사야! 너나 잘해!"  

(1) "네 자신을 온전하게 성경말씀에 적용하라!" (Apply totally yourself to the text)
(2) "성경말씀을 온전하게 네 자신에게 적용하라!" (Apply totally the text to yourself!)

번역문장은 자구적 번역(번역이론에서는 '형식일치론'[formal equivalence]이라 부른다)이기에 부연 설명이 필요할것 같다. 부연설명이라 함은 자구적 번역을 의미에 기초한 번역(번역이론에서는 이것을 '기능일치론'[functional equivalence]이라 부른다)으로 바꾸어 보겠다는 뜻이다.

(1) "성경을 읽는 당신은 겸손하게 성경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음성을 들어라" 당신의 생각을 갖고 성경 속으로 들어가지 말고, 성경이 권세있게 말씀하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다. 독자로서 우리는 종종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보다 우리가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다급함에서 비롯되는 발설과 잘난체 하려는 습성을 죽이고, 겸손한 마음으로 본문에 고개를 숙이고 들으라는 것이다.

(2)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당신의 삶을 형성하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라" 성경은 단지 정보 습득을 위한 책이 아니다. 하나님에 관한, 인간에 관한, 세상에 관한 '정보'(information)를 얻기 위해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이유는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빚어 만들어 가고, 형성하고(formation) 움직여 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날마다 그 말씀에 의해 바꾸어가고 회개하고 돌이키고 개혁하기(reformation) 위함이다. 그렇지 않다면 부패하거나 일그러지거나 괴상하게 변해갈지(deformation) 모른다.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의 선포를 듣는 이유는 긍극적으로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transformation) 에이전트기 되기 위함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Kingdom co-worker)들이기 때문이다. 

말이 길어졌다. 내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온다. 태평양 건너편 멀리 떨어져 사는 딸이 이 늦은 밤에 더욱 보고픈 것은 왠일일까? 당분간 이 성경책을 사용하련다. 아무리 글씨체가 작아도, 돋보기를 보고 몇시간을 보는 한이 있어도, 그래서 눈이 아파 더이상 글씨가 선명하게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당분간! 당분간! 이 성경을 사랑하기로 작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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