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일상 에세이: "가은이 이야기"

2010.01.20 18:25

류호준 조회 수:8274

 가은이 이야기



나는 원래 장난 끼가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언제나 그저 다소곳이 저편에 앉아있던 말없던 어린이였다. 사람들은 나를 내성적이라고 했고 그런 평가가 그리 싫지 않았고 그런대로 익숙했다. 게다가 목회자와 신학자로 지내온 수많은 세월 때문에 이런 성품은 무의식적으로 가속화 되었다. 그러나 나는 최근에 들어서야 내가 그렇게 짓궂기 까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내 속에는 발산하지 못한 장난 끼가 들어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위대한 발견이었다. 사실 예민성이 많았던 십대에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에 장남으로서 남모를 정신적 중압감에 시달리며 지냈고, 후에는 오랜 외국 유학생활과 초년병의 목회생활에 누군가와 터놓고 이야기를 한다든가 아니면 자녀들과 재미있는 생활을 즐기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지, 아니면 코헬렛(전도서의 화자)처럼 “해 아래 뭐 별것이 있나?” 하는 식의 현실론자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때론 자그마한 삶의 재미와 즐거움을 일상에서 발견하는 현자(賢者)가 되어가고 있는 자신을 보고 깜짝 놀라기까지 한다. 와우!


   

나이가 들어가면서 장난기가 발동한다. 특별히 어린 아이들과 놀 기회라도 있으면 어김없이 장난을 치거나 때론 울리기도 한다. 당황스럽기는 해도 내가 아직 살아있구나 하는 자기존재감을 확인해보는 기회이니 결코 놓치려고 하지 않는다. 얼마 전 나는 어떤 젊은 목사 가정에 점심 초청을 받고 아내와 함께 갔다. 유학생 부부였는데 딸이 둘인데 지금 이야기하려는 아이는 5살배기 가은이다. 가은은 똑 소리 나는 영악한 아이다.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사용하지 않는 언어구사능력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점심을 잘 대접받고 답례로 한참을 보낸 후에 일어서려고 하자 가은이가 하는 말, “우리 엄마 아빠랑 좀 더 대화를 나눠야 하는 것 아니에요?” 라고 할 때는 고압 전류에 감전되는 느낌이었다. 어째든 정말로 깜직하고 귀엽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귀여운 아이다. 엉거주춤 일어나려했던 나는 그 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어린아이들은 집에 손님이 오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손님이 일찍 자리를 뜰까봐 언제나 좌불안석이다. 앞뒤 모르는 강아지처럼 손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 괜스레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손님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하자 가운이가 받침대를 놓고 냉장고 위에 둔 무엇인가를 꺼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모른척하며 신학생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가은이의 행동에 눈을 두고 있었다. 어른들이 식탁대화에는 낄 수 없음을 알고 식탁주변을 맴돈다. 가은이의 손에는 무엇인가 들려있었다. 보니 황금색 포장의 초콜릿 박스였다. 보기에도 멋진 고급스런 초콜릿이었다. 가은이 엄마가 페레로 로쉐(Ferrero Rocher)라고 일러주었다. 이 상표는 꽤나 유명한 초콜릿 브랜드로 헤이즐넛을 우유 초콜릿으로 덮어씌운 것인데 언제나 황금색 종이로 포장한다. 보기에도 명품처럼 보였다. 투명한 박스를 보니 대략 7개가 남아있었다.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게 하나 줄 수 있겠니?”하고 물었다. 당황스럽고 망설이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하나를 건네려고 했다. 하는 말이 “목사님, 이것 드릴 테니 좀 더 있다가 가세요.” “오, 그래? 좀 더 있으려면 적어도 세 개를 먹어야하는데 어쩌지?” “세 개를 줄 수 있니?” 가은이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안색이 매우 안 좋아보였다. 나는 큰 헛기침을 한번하고는 “아무래도 가야하겠어”라고 하자 초콜릿 3개를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고마워, 가은이가 최고네!”하고 그 아까운 초콜릿 3개를 덥석 받아 내 앞에 놓았다. 가은은 내가 저것을 정말 먹을 것인가 하고 초초한 눈으로 멀찍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처롭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하였지만, 나는 모르는 척하고 3개의 초콜릿을 만지작거렸다. 조금 후에 가은이가 “목사님, 왜 안 먹어요? 빨리 잡수세요!” 하는 것이었다. 사실 먹지 않았으면 하는 탄원으로 속으로는 울음을 억지로 눌려 참으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가은아, 그런데 나는 3개보다고 네가 가지고 있는 것 전부를 다 먹고 싶은데 어쩌지?” “7개 전부를요?” “그래, 나는 7이란 숫자를 좋아해. 완전한 숫자이기 때문이지. 네가 가진 것 전부를 갖고 싶은데…” 아마 이 순간 가은은 그녀의 전 생애에서 이보다 더 가혹하고 견디기 힘든 시험과 시련은 없었을 것 같이 보였다. 정말로 터질듯 한 눈망울로 슬프도록 애잔하게 보였다. 한참 동안 말없던 가운이가 이제는 모든 것을 체념이라고 한 듯이 조심스레 내게 다가왔다. 마지막 4개마져 내려놓았다. “목사님, 그런데… 좀 더 있다 가실 수 있지요?” 질문이라기보다는 정중한 강요였다.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초콜릿 박스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명품은 맞는데 얼마짜리일까?” 그리고 속으로는 이런 계획을 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비정한 외인처럼 가은이의 것 전부를 몰염치하게 다 받아 주머니에 넣고 박절하게 그 집을 떠날 것이야. 물론 작별인사를 하고는 쇼핑센터로 차를 돌려 황금색 색종이로 싼 로쉐 초콜릿 한 박스를 사야지. 그리고 다시 이 집으로 돌아와야지. 아마 내가 떠난 후 무정하기 그지없는 나를 원망하며 통곡하고 있을 가은에게 온전한 로쉐 초콜릿 한 박스를 선물로 주면 어떨까 하고 생각 중이었다.


차 한 잔을 더 마시면서 7개의 초콜릿을 만지작거렸다. 가은이 부모와의 대화는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순간 어린 가은이의 ‘헌신’이 갑자기 크게 느껴져 왔다. 온전한 헌신이란 없는 법이다. 갈등하고 고민하고 원망하면서도 달라하시는 그분에게 드릴 수밖에 없는 헌신만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가은이가 7개의 초콜릿 전부를 안타까움과 망설임 속에서 내게 건네주었을 때, 그리고 멀찍이서 자기의 손에서 떠난 7개의 초콜릿의 향방을 예의주시하면서 쓸어내리는 가슴과 눈으로 내 손의 움직임을 쳐다보고 있었을 때, 그 마음은 어땠을까? 아마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악몽의 순간이었을지 모른다. 설령 내가 7개보다 더 많은 온전한 한 박스를 나중에 다시 사다준들, 그 고통스런 결정의 순간을 잊을 수 있을까?  가은을 보면서 구약의 성자 욥이 오버랩 되었다. 욥은 이유 없는 고난, 설명될 수 없는 고난 가운데 열 명의 자녀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그 열 명의 자녀들을 잃었다. 그리고 고통의 긴 터널 끝에 다른 열 명의 자녀를 얻었단다. 그러나 그렇게 얻었다 한들 그 열 자녀가 그 열 자녀일까? 그것은 아니겠지!


하나님께서 내게 내가 가진 것 전부를 달라고 하실 때, 하나님도 장난기가 발동하여 그런 장난을 하실까 하고 궁금해 한다. 그분이야 장난으로 하시겠지만, 그리고 나를 위해 더 큰 것을 준비하고 계신다고 하시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나중에 주어질지도 모르는 온전한 한 박스의 초콜릿을 소유하는 것보다 지금 내가 애지중지하며 갖고 있는 7개가 더 귀중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그것을 달라고 하시다니? “하나님, 제발 그런 장난은 저에게 하지 마세요!” 라고 부탁해본다. 그런 부탁을 들어준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러기를 간절히 소원할 뿐이다. 삶이 내 생각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할 수 없이 라도 그분의 손에 맡기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 같다. 달라면 다 드리겠습니다. 주님! 흑흑.

 

요한 칼빈의 모토

[My Heart I Offer To You Lord, Promptly And Sincerely]

[내 마음을 주님께 드립니다. 즉시 그리고 신실하게]


[2010년 1월 13일 눈 덮인 미시간 그랜드래피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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