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프레드릭 비크너,『어둠 속의 비밀』홍종락 옮김 (서울: 포이에마, 2016). 519쪽. 정가 20,000원

Frederick Buechner, Secrets in the Dark: A Life in Sermons (2006)

 

 

“우리의 삶과 인생, 이토록 신비로 가득한 것을…”

 

프레드릭 비크너Frederick Buechner(1926-)를 소개합니다. 그는 올해로 90세가 되신 미국의 저명한 작가이며 설교자이며 신학자입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후에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창작문학을 가르치며 작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뉴욕에 살면서 당대 최고의 설교자 중 하나인 조지 버트릭George Buttrick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뉴욕 메디슨 에비뉴 장로교회에 출석하게 됩니다. 어느 날 조지 버트릭 목사는 그리스도는 신자의 “신앙고백과 눈물들과 큰 웃음 가운데” 신자의 마음 한 가운데 왕으로 즉위하신다는 내용의 설교를 하였는데, 그 설교는 비크너에게 인생을 바꾸게 되는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특별히 “큰 웃음”이란 문구는 30년 후에 그가 쓴 소설 「웃음의 아들」The Son of Laughter(여기서 웃음은 야곱의 아버지인 “이삭”의 히브리어 뜻이다)로 이어졌습니다.

 

인생을 바꾸어 놓은 설교 경청의 경험은 그의 발걸음을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로 인도합니다. 물론 담임목사였던 버트릭 목사는 비크너가 신학교에 가겠다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좋은 소설가로 남는 게 평범한 설교자가 되는 것보다 훨씬 나을 텐데 말이야. 그렇게 된다면 참으로 아쉽고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의 문학적 비범성이 목회사역으로 인해 무디어지거나 사라지는 것을 걱정하였습니다.

 

유니온 신학교에 입학한 비크너는 당대 최고의 신학 선생님들을 만나게 됩니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폴 틸리히(Paul Tillich), 그리고 수사비평의 창시자로 알려진 구약학자 제임스 뮐렌버그(James Muilenberg)와 같은 석학들 밑에서 신학을 배웁니다. 흥미롭게도 현대 미국 구약학계의 거목인 월터 브루그만 역시 그와 같은 시기에 제임스 뮐렌버그 밑에서 구약학을 공부했다는 사실입니다. 브루그만이 그의 선생님 뮐렌버그를 깊이 존경했듯이, 위대한 작가적 기질을 소유하고 있던 신학생 비크너 역시 구약의 시문학에 정수를 수사비평으로 확대시킨 뮐렌버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브루그만은 자신의 어느 한 책의 서문에서 비크너를 기억하고 있다는 말로 같은 스승을 둔 훌륭한 제자들의 연대감을 피력한바 있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비크너는 지역교회의 목사가 되기보다는 학교에 남아 있기로 결정합니다. 미국 동부 뉴잉글랜드 지역에는 유수한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기숙 고등학교들 있는데, 그 중 하나인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Phillips Exeter Academy)에 교목으로 부임하여 종교학과를 신설하고 종교와 문학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좀 똑똑한 척하며 “기독교신앙을 품격 있게 멸시하는 녀석들”에게 기독교신앙을 소리 없이 설득력 있게 알려주기 위해 그곳에 갔다고 합니다. 거의 10년을 그곳에서 지내면서 수많은 설교를 했습니다. 새내기 목사로서 채플 설교와 가르치는 사역을 했던 비크너는 그때의 절박한 심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면 대부분 다시는 교회에 발도 들여놓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에, 저는 제가 하는 일에 강한 절박감을 느꼈습니다. 종교적 믿음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지루하고 진부하고 부적절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설득할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기에, 제가 그 일을 제대로 못해내면 그것으로 끝장일 터였습니다. 저는 그들이 관심을 끌고 그들이 듣도록 하기 위해 제가 생각할 수 모든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전통적인 종교적 언어와 이미지는 최대한 피했고, 설교자들이 이도 저도 안 될 때 의지하는 경향이 있는 모호함과 허세와 감상주의도 피하려고 노력했습니다.” (19쪽, “머리말”)

 

이 책에는 비크너가 30대에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에서 전했던 많은 설교문들 뿐 아니라 그 후 수십 년에 걸쳐 여러 곳 여러 환경에서 설교하거나 강연했던 것을 담고 있습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에게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도록 인도하는 부드러움이 묻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회의적인 늙은 신자, 믿음을 가진 늙은 회의자”(459쪽, 32장 “예수님이 안 보이잖아”)라고 부릅니다.

 

믿음과 의심, 의심과 믿음이 손에 손을 잡고 가는 신앙인이기에 세상 어느 것도 그대로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비크너는 11세기의 영국 캔터베리의 주교였던 알셀름(Anselm)의 저 유명한 문구,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의 사람인 셈입니다.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과 감수성, 진실이 담긴 문체와 글월, 참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진실한 구도자의 몸부림, 웃고 울고 슬퍼하고 고통하며 거룩한 여정을 향해 길을 떠나는 외로운 순례자의 고독감이 물씬 묻어나오는 글들입니다. 그는 한 곳에서 믿음을 “여정”이라 정의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이고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믿음은 향수병입니다. 믿음은 목이 메는 것입니다. 특정한 위치보다는 지향하는 움직임이고, 확실한 것보다는 직감에 가깝습니다.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믿음은 공간과 시간을 통과하는 여행입니다.(302쪽, 23장 “믿음과 픽션”)

 

신앙의 신비적 본질을 더듬어 살피다

 

“어둠 속의 비밀들”Secrets in the Dark: A Life in Sermons, 책 제목이 암시적입니다. 다층적 암시문구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우리가 살아내려고 애를 쓰고 고뇌하고 때론 눈물 짓는 세상, 땅거미처럼 깊게 드리운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보려고 무던히 이리저리 뒤척이는 사람들, 그들에게 분명 신비롭게 다가오는 비밀들이 어디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제가 말하는 듯이 여기에 실린 37편의 설교들 속에 들어 있는 “인생과 삶”(A Life)이 있는데 그것이 비크너 자신의 삶인 동시에 이 설교들 속에 들어가서 낙심하여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처럼 걷다가 울고 웃고 고뇌하다가 눈이 가리어져서 그(예수)인 줄 알아보지 못했지만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건 아니건, 그분을 믿건 믿지 않건, 그분의 이름을 알건 모르건, 그분은 거듭거듭 다가오셔서 우리가 걷는 길을 따라 한동안 동행하신다고 믿는”(439쪽, 30장 “어둠 속의 비밀”) 독자 여러분의 삶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혹시 한국 독자들 가운데 이 책을 잘못 읽거나 사용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우려를 느꼈습니다. 이 책은 설교문이 주를 이루지만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책으로 읽히기를 거부한다는 점입니다. 나 역시 비크너의 설교문의 구성 원리, 예화 사용, 작성 전략 등과 같은 것을 이 글에서 다뤄야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들을 위해 비크너가 이 책을 썼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실린 다양한 설교들과 강연을 통해 비크너는 신앙의 신비적 본질을 더듬어 살피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런 작업 과정에로 여러분들을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크너의 안내를 받아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면 전혀 예기치 않은 심산유곡의 칠흑 같은 밤에 도무지 상대하기 버거운 낯선 적수와의 사투에서 장엄한 패배를 통해 새로운 날의 여명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1장, “찬란한 패배”), 갈릴리 바다 앞에 차려진 조반식사 때에 물과 물고기와 찬란한 태양이 서로 어울려 거대한 춤을 추는 것을 보며 눈물 솟게 하는 기쁨을 경험하기도 하고(28장 “거대한 춤”), 아이들 동화 정도로 축소 환원했던 노아홍수 이야기가 죽음의 악취 속에서도 우리의 눈에서 억누를 수 없이 마구 솟아오르는 희망 때문에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이야기임을 알게 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종말에 맞서 집어든 희망의 잔가지 하나, 비둘기의 부리에 물린 푸른 잔가지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너머의 세상을 어렴풋하게나마 보여주고 가리키는 귀중한 실재이라는 것입니다(7장, “희망의 잔가지”).

 

비크너의 설교 안에는 믿음 만능주의나 큰 소리 외침이나 특정한 곳으로 몰아가는 강제성이나 단세포적인 아멘 강요나 상투적인 할렐루야가 없습니다. 그는 단편적인 이원론으로 세상과 삶을 바라보기를 단호히 거절합니다. 그는 삶과 인생은 작은 머리로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지나가는 행인의 얼굴에서, 어린아이의 해맑은 웃음에서, 욥처럼 고뇌하고 고통 하는 비천한 자들의 슬픔 속에서 예기치 못한 신의 임재 약속이 있다는 소식에 눈물 지을 수 있다고 호소합니다. 그는 슬픔과 기쁨의 직조물로 엮여가는 삶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역량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의 기막힌 상징적 서술 하나를 들어보십시오. 첫 손주를 처음 만났을 때 장면을 그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제 딸 다이나가 아기를 품에 안고 이층에서 내려오고 있었고 저는 잔뜩 긴장한 채 아이를 보러 올라가던 참이었습니다.… 아이는 이 세상으로 내려오는 길이었고, 저는 이 세상을 벗어나 우리 모두를 기다리는, 하나님만 아시는 상상도 못할 세상으로 올라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눈물이 났습니다. 왜 눈물이 났을까요? 한편으로는 그 아이를 처음으로 보는 기쁨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가 들어가는 세상이 큰 기쁨뿐 아니라 크나큰 슬픔도 가득한 곳이라는 인식, 제가 이 아이의 장래 모습을 알지 못한 채 언젠가 죽게 되듯이 이 아이도 그렇게 될 거라는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 (293쪽, 22장 “짧은 두 단어”)

 

욥의 경우처럼, 모순투성이의 세상, 고통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설교는 고통의 문제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달리 말해 하나님의 대답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믿고 싶어 하는 절규하는 믿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비크너는 이분법적 신학과 신앙의 세계에 살고 있는 근본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좀 넉넉해지면 안 될까요? 삶과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에 귀를 기울여보면 안 될까요? 평범한 것들 뒤에 있는 비범한 것을 바라보고 눈물지어보면 안 될까요?”라고 말합니다.

 

이 책에 실린 37편의 글들을 두고두고 씹어보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한편씩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음미하며 마음에 두어보십시오. 어느 구절에선가 탄복을, 눈물을, 감격을, 혀를 내두를 탄성을, 쓰라림을, 긍휼의 마음을, 큰 웃음을 선물로 얻게 될 것입니다. 신학생들이라면 하던 숙제나 SNS를 멈추고 반드시, 목회자라면 조용한 시간을 따로 내어, 일반신자라면 텔레비전이나 먹거리 방문을 절제하고, 이 책을 탐구해보세요. 결코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를 거절하는 책입니다. 끝으로 이 책에 실은 저의 추천단평으로 북 리뷰를 마치겠습니다.

 

“누군가의 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훔친 적이 있던가요? 계속되는 미로에서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눈을 지그시 감았을 때, 인간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갈망과 그리움이 긴 여운으로 눈앞을 가릴 때, 사각을 통해 들어오는 예기치 않은 은혜의 순간들에 말을 잊게 되었을 때, 삶의 발자국들에서 순례자의 이야기들이 들려올 때, 신성의 처연함에 목젖이 뭉클할 때, 나는 비크너의 얼굴을 떠 올립니다. 언어의 매력과 단어의 마법을 아는 작가, 사소하기 그지없는 삶의 이야기들을 시적 언어로 풀어내는 설교자, 사람의 근원적 목마름을 졸졸 흐르는 경건의 옹달샘 생수로 적셔주는 마법사, 그가 전복(顚覆)적 작가 비크너입니다. 본문을 천천히 곱씹어 마음에 두는 연습을 나는 비크너의 글을 통해 배웠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나의 영적 순례의 길에 고귀한 멘토가 되어주신 그분을 여러분에게 마음을 다해 소개합니다.”

 

[위의 글은 크리스채너티투데이 한국어판 2016년 4월호에 실렸다]

 

류호준 목사,「일상신학사전」(포이에마)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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