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누가 주님을 만날 것인가?”

마태복음 2:1-12



마태는 우리에게 흥미로운 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그 이야기는 예수께서 태어나신 후 동방으로부터 점성가들이 예루살렘에 와 매우 급한 소리로 “그가 어디에 있습니까?” “유대인들의 왕으로 태어나신 그분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많은 꿈과 추억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성탄전야에 많이 읽혀지고 들려지는 이야기다. 함박눈이라도 소복이 내리는 성탄전야라도 되면 우리들은 상상의 날개를 펴고 동화 같은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를 기억해 낼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네 명의 복음서 저자들 가운데, 왜 마태만이 이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 유일한 사람일까? 왜 나머지 세 명의 복음서 저자들은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해 주지 않은 것일까?

 

 


점성가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


성경 본문으로 돌아간다. 예수님은 예언자 미가서에 기록된 말씀을 성취하신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여러 세기 전 이스라엘에는 미가라는 선지자가 있었다. 그는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적이 있었다. 예수님을 ‘예보된 위대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는 마태가 예수님의 출생과 관련된 점성가들에 관해 말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마태는 예수께서 구약의 확고한 경력 증명서를 지니고 오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가 동방의 점성가들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가 살던 당시에 교회 공동체가 직면하였던 문제들에 대해 밝은 빛을 제공하여 주기 위하여 마태는 점성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주후 70년과 80년 사이 언젠가 썼다. 그 당시 기독교회에는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많은 유대인들이 교회로부터 떠나 버리고 있는 실정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이방인들이 교회로 들어오고 있었다.


마태가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였을 때, 많은 숫자의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정 반대로, 많은 숫자의 유대인들이 예수는 절대로 메시아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동방의 점성가들에 관한 이야기를 포함시킴으로써,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동방으로부터 찾아온 점성가들의 방문은 교회로 이방인들이 유입되는 것을 미리 예견해 주고 있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탄생에 보여 주었던 철저한 무관심은 수십 년 후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에 대한 또 다른 예견이기도 하다. 보시다시피 놀랍게도 이방인인 동방의 점성가들은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그러나 구약의 성경, 특별히 메시아의 출생에 관해 정확한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의 지도자들을 그러하지 않았다. 엄청난 대조이며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점성가들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종이나 국가나 종교에 상관없이 자신을 진정으로 찾는 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점성가들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의 능력 아래서 살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분이 주시는 은총의 수혜자들이다. 아무 나라나 민족이나 국가나 교회나 교단도 하나님으로부터 특권을 받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신을 진실하게 찾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든지 발견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의 장과 절을 정확하게 잘 찾으면서도 그분을 진정으로 찾지 않는 자들로부터 차단되실 것이다.  

 

 


하나님을 추구한 점성가들 


본문은 간접적인 계시로 주님을 만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하나님의 소리이기는 하지만 마치 별처럼 자연적인 것을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관한 본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의사전달은 항상 애매모호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항상 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것으로 잘못 오해되기 십상이다.


점성가들은 확실치 않은 모호한 것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길고도 머나먼 여행’을 하도록 한다. 아니 그들은 매우 희미한 하나님의 계시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그들의 모든 것을 걸고 매우 위험천만한 여행을 감행하였다. 강을 건너고 사막을 넘어서는 매우 험한 여정을 기꺼이 택했던 것이다.


반면에 토라(율법)의 선생들은 매우 분명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간접적인 계시를 가진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토라가 들어있는 구약 성경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정확한 지도가 들려져 있었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그들은 예루살렘 신학교의 탁월한 신학자들이며 훌륭한 구약학자들이었다. 모든 것을 머리로 알고 있었고 지식적으로 암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은 기꺼이 자리에서 일어나 베들레헴으로 향한 여정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매우 짧은 여행길을 말이다. 그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정확한 종교적 지식은 그들로 하여금 일어나 움직이도록 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시편 14장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펴 현명하여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신다.” 적어도 시편의 시인이 볼 때 ‘현명,’ 혹은 ‘지혜,’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 일’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뒤집어서 말하자면, 하나님을 찾는 일이 진정으로 사람을 지혜롭게 하고 현명하게 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잠언의 현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 말씀에 기준을 삼아 볼 때, 점성가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동방의 ‘현자[賢者]들’(wise men)이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박사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다투시지 않으셨다.


그분이 다투시는 대상들은 전적으로 다음과 같은 자들입니다: 그 분을 찾지 않는 자들이요, 그 분을 당연한 분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요, 그 분에 대해 무관심한 자들이다.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어도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를 경배하지 않는 자들이다.



점성가들과 신학 교수들


다시금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동방으로부터 온 점성가들은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점술가나 점쟁이들이었다. 가장 유식한 추측이 있다면 그들은 별을 바라다보는 자들, 천체의 움직임에 따라 인간의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말하는 자들, 유대인의 기준에 의하면 정죄 받을 만한 일들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그렇게 ‘현자(賢者)들,’ ‘지혜자들,’ 혹은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 혹은 ‘동방의 세 왕들’이 아니다. 유대인적 관점에서 보면 우상 숭배적인 점술가들이다.


이 이방인 점성가들이 매우 밝은 별을 관찰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귀속에 무엇인가를 속삭이고 계셨다. 그러자 즉시 그들은 길을 떠난 것이다. 그들은 무지한 사람들이고 참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고 순종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가 어디에 있는가” 하고 질문하였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어린이가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물었다.


이러한 질문 속에 마태 이야기의 역설이 담겨져 있다. 도저히 믿어지기 어려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별을 관찰하며 점괘나 치는 복술가들이 예수님을 경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토라의 선생님들은 예수님을 경배하지 않았다. 얼마나 대조적이고 역설적인 일인가!


점성가들이 ‘그가 어디에 있는가?’ 하고 질문하였을 때, 그리고 헤롯왕이 ‘그가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물었을 때, 토라의 선생님들, 요즈음 신학자들은 정확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유다의 베들레헴입니다. 선지자 미가가 그렇게 말했소이다.”(미가 5:2)


자, 여러분은 이 율법 선생들이 그들이 그렇게도 잘 알고 있었던 예언이 마침내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흥분하고 기뻐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또한 여러분은 율법 선생들이 이 사실을 알고 너무 기뻐 펄쩍뛰면서 점성가들과 함께 어울려 그들의 여행 마지막에 함께 동참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들 중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분명히 성경이 비취 주는 밝은 빛 아래 앉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아무도 예루살렘으로부터 베들레헴까지의 거리인 10킬로미터 정도를 기꺼이 여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율법(토라) 선생들, 예루살렘의 신학자들, 유식하고 계몽된 사람들,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 관록 있는 신자들, 다시 말해서 성경의 장과 절들을 자유롭게 인용할 수 있는 사람들, 바로 그런 사람들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스도 발견의 참된 의미


점성가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다. 어떤 사람들인가? 태어날 때부터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이다. ‘그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정확한 대답을 배워 왔던 사람들이다. 이미 그리스도를 발견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그분을 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신을 드러내실 것이다. 누구에게? 오직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그분을 추구하고 찾는 자들에게만 그리스도는 자신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런 사람들만이 그리스도를 찾게 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항상 먼저 이니셔티브를 가지시고 일을 시작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그분을 찾으려는 마음을 먼저 넣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 주신 ‘마음’을 따라 행동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계속적으로 작업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찾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그분을 찾으면서 우리는 우리들이 갖고 있었던 기존 관념이나 아이디어들을 근본적으로 개정하거나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분을 찾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우리들의 행동들을 개혁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찾는 것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일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는다면, 그리고 그것이 진실한 추구라면 우리들은 기꺼이 도덕적인 생각과 행동양식도 바꾸어야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살기 시작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마태가 말하고 있는 그 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즉 유대인들의 왕이시오,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가 주어지신 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류호준, [옛적 말씀에 닻을 내리고] (크리스천다이제스트, 1998), 제 5장을 축약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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