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14]

“새 언약 관계 안으로”


[본문]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개역성경, 로마서 7:1-6)



[요절]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롬 7:4)


“So, my brothers, you also died to the law through the body of Christ, that you might belong to another, to him who was raised from the dead, in order that we might bear fruit to God.” (Romans 7:4)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우리는 죄의 파괴적 세력에서 자유로워졌다고 가르쳤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율법의 세력에서도 자유로워졌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잠시 ‘율법’(律法)이라는 용어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일반적으로 교인들은 율법과 법을 다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율법은 종교적 계율이고 법은 사회에서 말하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같은 용어인 law를 서로 다르게 번역한 것뿐입니다. 기독교 서클에서는 ‘율법’으로 일반 사회에서는 ‘법’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율법이 나오면 모두 ‘법’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에서 ‘율법’이라 할 때는 ‘하나님의 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화로운 나라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법규들을 모세를 통해 제정하게 하셨는데, 이런 법규들의 모음집을 가리켜 ‘율법’이라고 합니다. 이 율법은 이스라엘 사회의 공동체를 위한 법들로서, 법의 형식을 보면 정언법과 판례법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하라” 혹은 “하지 말라”는 형태이고, 후자는 “이러이러한 경우에는 이렇게 하라”는 형식입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의 경우는 전자입니다. 그러나 모세오경 가운데 법규들의 상당부분은 판례법들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소가 다른 집의 농작물에 피해를 입혔을 경우 어떻게 배상해야하는지에 관한 것이 판례법에 속합니다.


판례법이든 정언법이든 모두 사람들의 잘못을 드러냅니다. 율법의 기능은 결과적으로 우리를 짓누르고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고, 우리를 벌거벗겨 수치감을 주고 우리가 죄인인 것을 드러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율법의 지배아래 놓여있는 노예와 같습니다. 그것은 율법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율법을 통해 우리의 죄성(罪性)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거울일수록 자그만 흠이나 티도 다 보여주듯이, 율법 역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율법의 세력 앞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7장에서는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율법의 세력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율법의 억압에서부터 자유하게 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그는 결혼과 사별과 재혼이라는 예를 들어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에 관해 설명합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 가르침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는 율법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워졌다. 둘째, 우리는 새로운 관계를 갖게 되었다. 전자가 “… 부터의 자유”라면, 후자는 “… 향한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요점을 말하기 위해 바울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전개합니다.

 

   • 율법은 사람들이 살아있을 때만 적용될 수 있다. 사람이 죽으면 (율)법은 적용이 안 된다.

   • 결혼에 관한 (율)법은 부부 중에 한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효력이 없다 (2절).

   • 배우자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간음죄가 성립된다. 부부 중 한 사람이 죽으면

     간음 법은 적용되지 않는다(3절).

   • 이처럼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우리가 죽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 아니하고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4절) 새로운 관계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혼하게 되는 것과 같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새로운 언약’(New Covenant)이라고 부른다.


핵심적 가르침(교리)을 드러내기 위해 상당히 애를 많이 쓴 셈입니다. 물론 이러한 논지는 결혼의 당사자 중 한사람이 죽음으로써 남겨진 사람(과부나 홀아비)들에 관한 신학적 질문에 대해 대답을 내놓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질문만을 남겨놓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의 관심은 결혼 그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의 삶은 ‘율법 아래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율법 아래 있으면 우리는 계명들 중 하나도 지키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예수를 위해 열매를 맺는 새로운 삶 속으로 들어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은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에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 그 사람은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셨습니다. 신앙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아니라 정말 열매를 맺는 삶인가 하는 것입니다. ‘앎’과 ‘삶’은 결코 분리될 수도 없고 또한 되어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거의 매일 우리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옳고 그른 것과 마땅히 해야 하는 것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와 같다는 것입니다. 잎사귀는 무성하지만 열매가 없는 과실수를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기독교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그리스도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기억해야할 사실은, 우리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새로운 관계 속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사는 일, 달리 말해 새로운 언약의 관계 안에서 살 때 비로소 풍성한 삶의 열매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착함,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같은 것 말입니다(갈 5:22-23). 그리고 그 열매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피와 영을 통해서 맺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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