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설교: “거인을 죽이는 강심장”

2010.12.05 22:08

류호준 조회 수:19673

“거인을 죽이는 강심장”

삼상 17:32-37

 

 

32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하니 33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37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추구하는 마음”이란 주제 아래서 지난주부터 다윗의 생애에 대한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오늘은 시리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끌렸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그 마음이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오늘 처음 듣는 분은 없을 겁니다. 어린 시절 주일학교 다닐 적부터 자주 들었던 매우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어렸을 때 성경 이야기 중에 제일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였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나고 나보다 힘이 세거나 강한 애들은 다 골리앗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네가 아무리 크고 힘이 세다하더라도 나는 다윗이야!”라고 속으로 외치며 위로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물맷돌을 돌려 거인을 거꾸러뜨렸으니 너무 멋지지 않습니까? 아주 통쾌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는 그들이 앞으로 살면서 피치 못하게 만나게 되는 수많은 괴물 같은 거인들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겁니다. 그러나 좋은 어린이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이 이야기의 힘은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야 자명해집니다.

 

성경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늙은 사사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젊은 다윗에게 실제로 바뀐 것은 없었습니다. 왕으로 선택을 받았지만 왕위로 등극한 것도 아니고 실제로 왕권이 주어져 나라를 다스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은 베들레헴을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윗도 다시 양을 치는 목동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아직도 사울은 나라를 다스리는 실질적 왕이었습니다. 그 때 불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넘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이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엘라 골짜기에서

 

엘라 계곡의 평원에서 일촉즉발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불레셋 군은 계곡 위쪽 산에 진을 치고 있었고 히브리인들은 반대편 산 쪽에 자리를 잡고 불레셋 군대를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계곡 아래 평원에 골리앗이라 이름 하는 기골이 장대한 사람(거인, giant)이 무겁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놋 투구를 쓰고 있었으며 그의 비늘갑옷 무게는 5,000세겔이나 되었습니다(정확하게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무거운 것처럼 들립니다! 대략 58킬로그램). 어깨에는 놋 단창을 X자로 메었으며 손에는 긴 창을 들고 있었는데 창 자루는 베틀 채 같았으며 철로 된 창날 무게만도 600세겔(대략 7킬로그램)이었습니다. 거인의 키는 2미터가 넘었습니다. (참고로 칠십인[LXX]역본에는 210센티 정도지만 히브리어 본문[MT]에는 3미터 정도). 그가 창을 휘두를 때는 마치 장난감을 갖고 놀듯이 그렇게 다루었습니다.

 

골리앗이 히브리인들을 향해 소리 지릅니다. “너희 이스라엘의 장군들과 전사들은 들어라. 오늘이 너희 장례식 날이다. 자, 너희 중 한명을 뽑아서 내게 보내라. 그와 한판 승부를 가리자.” 아마 여러분들은 ‘트로이’라는 영화를 보셨을 것입니다. 그리스의 작가 호머의 작품 일리아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파리스(Paris)와 메네라우스(Menelaus)의 결투, 헥토르(Hector)와 아킬레우스(Achilles)의 처절한 결투 장면을 기억하실 겁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전쟁을 할 때 전쟁하는 양쪽에서 각각 대표 전사를 뽑아 결투를 시켰습니다. 그렇게 승부를 결정하곤 하였습니다. 아마 고대 근동지방에서도 이런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불레셋 인의 대표 전사인 거인 골리앗의 오만불손한 소리에 “사울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놀라 크게 두려워 떨었습니다.”

 

 

우리와 맞붙을 거인들, 괴물들

 

조만간 우리 모두는 ‘거인’을 직면하게 될 겁니다. 상대하기에 너무도 버거운 거인, 우리를 향해 호통하며 조롱하는 거인을 만날 것입니다. 빈정대며 조롱하며 우리와의 ‘싸움을 돋우는 자’(4절)를 만나게 될지 모를 일입니다. 오늘일지 내일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소름끼치는 상상이 현실이 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만나게 되는 거인들, 우연히 만나게 되는 괴물들, 감당하기 버거운 상대들이 누구입니까? 어떤 것들입니까?

         ․ ‘큰 종양덩이’가 여러분의 목숨을 위협합니다.

         ․ 깨어진 심장 안에 ‘큰 구멍’이 나있습니다.

         ․ 결혼 생활에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 중요한 인간관계 안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 우리 가정 안에, 우리가 꾸고 있는 꿈과 희망 앞에 ‘버거운 문제들과 힘든

          숙제들’이 서 있습니다.

         ․ 여러분이 반복해서 짓고 있는 ‘엄청난 큰 죄’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무지막지한 거인들이 우리를 공포와 두려움에 질리게 합니다.

 

이런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거인이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눈을 들어 좀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는 ‘거대한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무엘에 의해 기름부음 받았던 것처럼 우리 크리스천들도 예수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고 세상을 바꿔보라는 왕적 임무를 받았습니다.

 

 

엘라 골짜기에 무슨 일이?

 

우리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넓은 전망대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아세가와 소고 사이에 위치한 엘라 골짜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십시오(삼상 17장 1-2절).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무지막지한 거인들, 거대한 이슈들이 무엇입니까?

       · 전 세계적 가난과 기근, 인종문제와 폭력

       ․ 우상숭배와 같은 성공지상주의와 자기만을 아는 철저한 개인주의

       ․ 하나님을 떠나 세속화되어 가고 있는 사회와 교회

       · 쉽게 고칠 수 없는 경제 난국, 직장과 집에서 사람들을 내어 쫓는 경제,

 

아마 이런 목록은 끝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골리앗 같은 버겁고 무서운 문제들이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런 것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것입니다.

      · 사울과 그의 부하들처럼 두려워 벌벌 떨고 있어야 하는가?

      · 골리앗이 오만방자하게 말할 때 우리는 그저 옴짝달싹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어야하는가?

      · 아니면 누군가 내 대신 싸워주기만 기다려야 하는가?

      · 아니면 우리가 뛰어들어 뒤집어 놓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중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 안으로 다윗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나 다윗은 조용히 문제 속으로 들어옵니다. 거인의 문제, 무시무시한 골리앗의 문제 안으로 들어올 때 그는 아주 조용히 슬그머니 들어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는 잘 훈련된 전사나 장군으로 전쟁터에 오게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러 전쟁터에 왔습니다. 사울과 함께 전쟁터에 나온 그의 형들에게 먹을 것을 전하라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러 왔다가 이 긴박한 상황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과 그의 군대가 겨우 ‘한 사람’ 앞에서 벌벌 떨고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 거인을 상대할 사람이 우리들 중에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아마 그 때 사무엘이 자기에게 기름을 부으면서 하신 말씀이 귀에 맴돌았을 겁니다. “너냐, 바로 너란 말이다!” 그 소리 말입니다!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리가 아닙니까? ․ 네 문제를 고치거나 해결하는데 다른 사람을 찾지 말라!

       ․ 네 앞에 있는 전쟁을 상대할 사람을 다른 곳에서 찾지 말라.

       ․ 너다. 바로 너란 말이다! 네가 해야 해!

       ․ 바로 이때를 위해 기름부음 받은 것이 아니냐!

 

우리의 소명을 자극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선택을 새롭게 기억하는 순간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야.” “내가 너를 택하였노라.” “내가 너와 평생 함께 하겠노라.” 아마 이런 찬송이 입술에서 흘러나오지 않겠습니까?

          [1절] 나는 비록 약하나 주의 힘은 강하다

                   어려울 때 도우시니 날마다 가까이 걷겠네.

          [2절] 세상 유혹 당할 때 자주 넘어지오나

                   주님 밖에 그 누가 내 짐 대신 질수 있을까

          [3절] 아침 안개와 같이 나의 생명 걷힐 때

                   주의 인도함 받아 저 천국에 갈수 있겠네.

 

          [후렴] 나를 허락하시어 주 가까이 하도록

                     날마다 더 가까이 나를 이끌어 주소서.

 

 

다윗은 사울에게 자기가 전쟁에 나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사울이 말합니다. “너는 소년이야. 너는 애야. 저 골리앗은 자기와 상대할 사람을 찾고 있어. 그런데 너는 누구야?”

 

지금 위험천만한 상황을 바꿔 보려는 긴박한 우리의 노력에 대해 콧방귀를 끼고 있는 골리앗이 있다는 것은 여간 불쾌하고 기분 나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편이 되어야할 사람마저도 우리를 우습게 보는 것입니다. “너 누구야?” “누가 너를 이곳에 오라고 했어?” “네가 무슨 힘이 있다고?” “네가 할 수 있기나 하겠어?” “이 문제는 매우 복잡한데, 당신은 경험이 별로 없잖아?” 이런 식입니다. 참 기가 찰 노릇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이 거인을 상대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점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는 자기가 목동일 때 하나님께서 곰과 사자의 입에서 양을 건져내도록 하셨으며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 지금 저 불레셋인 골리앗을 자기에게 넘겨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악화되어 갑니다. 그러자 다윗을 조롱하고 빈정대던 사울이 다윗을 도우려고 합니다. 자기의 갑옷을 다윗에게 입혀주었습니다. 놋 투구, 비늘갑옷과 대검과 창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무거운 갑옷을 입고서 도무지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 무게에 눌려 주저앉을 것 같았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 눈앞에 있는 거인을 상대하기로 일단 마음을 먹었다면 - 그 거인이 여러분의 삶 속에 있는 괴물이든 아니면 우리 사회 안에 있는 거인이든 상관없습니다. - 사방에서 이런저런 충고와 도움의 말들을 많이 받게 될 겁니다.

           · “이것을 보세요.”

           · “이 방식을 따라서 하세요.”

           · “저곳에 가보세요.”

           · “이런 책을 읽어보세요.”

           · “좀 정치적이 되셔야 할 것 같아요.”

           · “끝까지 싸워야합니다.” 등등 수많은 조언과 충고가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갑옷들’은 여러분을 짓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할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첫째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어떤 하나님입니까?

       이 거인에게 오게 한 그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 둘째로, 이 거인을 상대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불레셋 군대 전부와 싸우라고 부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상대할

       대상은 이 거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거인과 상대하도록

       부르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셋째로, 여러분은 여러분이어야 합니다. 당당해야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 전투에 부르셨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이기를

        바라십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처럼 그런 사람의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 왕의 갑옷을 모두 내 던졌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나이지 다른 사람의 옷을 입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계곡 아래 시내로 달려갔습니다. 시냇가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돌팔매질하기에 딱 좋은 부드러운 돌 다섯 개를 주웠습니다. 이 일은 그가 목동으로 있을 때 자주 하던 일이었습니다.

 

 

무릎 꿇은 다윗

 

무릎을 꿇은 다윗의 이미지를 기억해 보십시오. 이 광경은 이 이야기의 신학적 중심입니다. 이 겸손한 자세를 통해 다윗은 그가 세상의 중앙을 어떻게 발견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흔들거리는 세상에 중심을 잡고 서기를 바라신다면 여러분은 중심이 어딘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저 거인의 문제가 온 세상의 중심인줄 생각합니다. 거인문제가 그들 삶의 중심축이 되도록 허락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거인을 가운데 두고 그 둘레에 서서 두려움과 공포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무릎을 꿇음으로서 이스라엘 역사를 바꾸려고 하는 동안 사람들은 각각 안절부절못하며 히스테릭한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다섯 개의 돌을 주우면서 이렇게 똑같은 말을 반복했을 것입니다. “나를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던 그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구출해내실 것이다. 그가 나를 다시 구출해내실거야! 그가 나를 다시 구출해내실거야!” 여러분은 이것이 ‘기도의 자세’라는 것을 보시고 계십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복음서들은 많은 시간을 기도하시고 있는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주께서도 힘을 얻기 위해 기도해야하셨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솔직하게 사실을 직면해 봅시다. 여러분과 제가 이 거대하고 힘겨운 거인들과 괴물 같은 장애물들을 상대하여 상황을 바꾸어 놓으려 한다는 것이 때론 아주 바보스럽고 어리석게 보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어느 것이든지 어느 상황이든지 바꾸어야 한다면, 바꾸고 변화를 가져오는 분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셔야만 합니다.

 

     · 기도, 매일의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고정’되게 하는 도구(anchor)입니다.

     · 기도, 매일의 기도는 하나님 안에 우리의 ‘중심’을 놓기 위한 방편입니다.

     ·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심한 난기류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똑바로 서기를

       바라신다면 우리는 먼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다윗을 쳐다보던 골리앗이 빈정대면서 소리쳤습니다. “내가 개(犬)인줄 알아! 막대기를 들고 오게? 기가 막혀서.” 그러자 다윗이 대답합니다. “여호와는 칼과 창으로 구원하시지 않는다. 전쟁은 여호와의 것이니 그가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저와 교회는 칼과 창의 숫자를 믿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삶의 모든 전쟁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거인을 쫓아가 잡아 죽이려면

       ․ 무기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 분노하고 비열한 사람에게 도전하기위해 여러분도 분노하고 비열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마땅히 해야 할 유일한 일이 있다면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는 것입니다.

       · 이것이 ‘삶의 중심’을 발견하는 것이며

       · 혼미하고 흔들리는 세상의 ‘중앙부’를 찾는다는 뜻이며,

       · 여러분이 믿는 것을 위해 당당하게 ‘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엘라 골짜기의 중심(center)

 

그러므로 오늘의 이야기는 사실상 다윗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골리앗에 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님은 엘라 골짜기의 ‘중앙’(center)이라는 것입니다.

      · 이 세상의 모든 구석의 중심부이신 것처럼 여러분과 내가 처해있는 엘라 골짜기의

        중앙에 하나님이 서계시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여러분의 학교의 중심에 서계십니다.

      · 하나님은 여러분의 가정의 중심에 서계십니다.

      · 하나님은 여러분의 사업의 중심에 서계십니다.

      ·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간관계의 중심에 서계십니다.

      · 하나님은 세상 역사의 중심이십니다.

      · 하나님은 온 우주의 중심(center)이십니다.

 

물론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있다면 신자는 하나님이 그곳(중앙)에 계시다는 믿음을 가졌다고 불신자는 그렇지 않다는 차이입니다. 이 사실을 볼 수 있는 자들은 각종 거인들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과 공포가 담대함과 용기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은 이 진리를 확신했기 때문에 자기를 약자(underdog)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인을 향해 담대하게 달려갔습니다. 물맷돌을 휘둘렀습니다. 돌멩이 하나가 골리앗의 이마에 세차게 박혔습니다. 장대한 거구 골리앗이 땅에 얼굴을 박고 고꾸라졌습니다. 엄청나게 큰 상수리나무가 쿵하고 쓰러지듯 그렇게 땅에 쓰러진 것입니다. 불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거인이 쓰러진 것을 보자 황급히 도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전사로서 받은 온갖 훈련들, 위압적인 갑옷과 군장들, 장대한 무기들, 이 모든 것들 중 어느 것 하나도 골리앗을 쓰러뜨리는데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개울에서 주워든 돌멩이 하나면 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사용하여 자신의 구속(구원)을 이루시기를 좋아하십니다.

         · 테레사라고 이름 하는 캘커타의 늙은 수녀,

         · 만델라라 이름 하는 남아프리카 감옥의 한 죄수,

         · 다윗이라 이름 하는 베들레헴 출신의 어린 목동,      

         ·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 이름 하는 랍비

         · 여러분과 저,

         · 그리고 여러분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은 그것들은 사용하여 예기치 못한 놀라운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끝까지 가보라!

 

이제 말씀을 마치면서 한 가지를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골리앗을 쳐 죽인 이야기에서 저는 왜 다윗이 돌멩이 다섯 개를 집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면 족하지 왜 다섯 개였을까? 분명히 이 젊은이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가 아니라 다섯이었을까? 물론 그 이유에 대해 성경은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잠시 상상을 동원하여 추측해 보았습니다. 제 추측으로는 다윗이 돌멩이 다섯 개를 집어 든 것은 보완계획(back-up plan)을 갖고 있는 것이 좋아보였던 것 같습니다. 양떼를 돌보며 양을 치던 목동 시절에 그는 종종 사자와 곰들과 맞싸웠습니다. 양을 잡아먹으려고 접근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자와 곰을 쫓아내기에 돌멩이보다 더 좋은 도구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나운 짐승을 물리치는데 ‘돌멩이 여러 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을 겁니다. 하나로 안 되면 두 번째 돌멩이로, 두 번째 돌멩이로 안 되면 세 번째 돌멩이로… 어쨌거나 하나 이상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 암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한번 이상의 키모(chemo) 치료가 필요할 것입니다.

        ․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원을 해야 한다면 한번 이상의 민원을 집어넣어야겠지요.

        ․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화해하려면 한 번 이상의 ‘손을 내밈’이 있어야 할 겁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마음

 

거인을 상대하려면 낙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후에도 다윗에게는 극복해야할 엄청난 장애물들과 난관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그는 그런 것들을 극복하라는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응답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러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개울가에 무릎을 굻었던 다윗의 모습처럼 여러분들도 영성의 살아 있는 물가에 무릎을 꿇으면, 여러분은 세상의 중심부(center)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흔들리지 않고 설 수 있을 겁니다. 기꺼이 준비가 된 셈이지요. 어느 길로 가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어떤 일들 당하든지 기꺼이 상대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아멘. 이것이 “거인들을 죽이는 강심장”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심장)을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2010년 10월 17일 주일 설교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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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 번역에세이: 희망 (바라는 것) 류호준 2007.12.07 186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