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쓰지 말아야 했던 편지”



1991년 10월 18일로 기억한다. 11년간의 미국에서의 이민생활, 유학생활, 목회생활을 마치고 또 다른 외국인 네덜란드로 늦깎이 유학길에 오르는 날이었다. 오하이오 주에서 주 경계를 넘어 미시건주 디트로이트 공항으로 향하는 차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저 뒤로 아내와 어린 두 아이를 남겨 두고 나 먼저 유럽행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차 뒷좌석에는 무지막지하게 보이는 너덜거리는 이민 가방 두 개가 무표정하게 서로를 의지해서 기대고 있었다. 그 커다란 가방 안에는 한 물 건너간 커다란 컴퓨터 모니터와 본체 그리고 두꺼운 히브리어 사전류와 책들, 옷가지들과 약간의 살림도구들이 정신 사납게 뒤엉켜져 있었다. 피난민 짐 보따리라 하는 편이 나았다. 앞을 생각하니 막막한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이상하게도 무섭지는 않았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만은 지난 세월을 떠올리며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즐기고 싶었다. 지난 10여년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순식간에 스쳐갔다.


투박한 겨울 양복을 입고 단돈 100달러를 들고 - 그것도 우리 부부를 친 동생처럼 사랑했던 최 집사님 부부가 남대문에 나가 암 달러 상인에게 환전한 귀중한 돈 - 김포공항을 떠나 미국 로스앤젤레스 공항을 밟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아니 벌써 10여년이란 세월이 말없이 그렇게 흘렀다. 미국 서부에서 잠시 살던 나는 그 후 아내와 함께 우리의 작은 애마(愛馬) 플리머스 애로우(Plymouth Arrow)를 타고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의 아름다운 금문교를 뒤로하고 대륙의 동서를 횡단하는 도로에 들어섰던 기억이 떠올랐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미국 대륙을 5일 만에 4500킬로를 달려 미시간 주로 이사했던 기억. 신학대학원 수업에 들어가도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해 깊은 좌절과 낙심에 빠졌던 수많은 날들. 들리지 않는 강의와 공부에 온 신경을 쓰다 보니 귀에는 고름이 흐르자 나의 절친 다니엘 크루스가 잠시 쉬어가라고 어깨를 두드려주며 격려해 주던 그 아름다운 날들. 학기 중에 첫 출산을 맞아 당황했던 일들, 분만실에 들어가 해산하는 아내를 돕다가 첫 아이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오 마이 갓” 하며 아들의 출생을 기뻐했던 순간, 그러나 그런 기쁨도 몇 분이 되지 않아 “귀여운 딸입니다!”라는 간호사의 말에 혼란스러웠던 순간들, 곧 이어 내가 탯줄을 남아의 고추인줄 잘못 보았던 착시현상을 알고 부끄럽고 당황스러워했던 추억. 학기말 시험 날짜와 너무도 감동적이었던 미니시리즈 “가시나무새”(thornbird) 방영 시간이 겹쳐 책상이 있던 아파트 거실과 텔레비전이 있던 아내의 안방을 안절부절 하며 왔다 갔다 했던 일들. 다음 날까지 제출해야하는 숙제를 마치지 못하면 아내에게 담당교수에게 전화하여 우리 남편이 아프니 제출일자를 하루 연기해 달라고 사정하도록 강요했던 일들. 공부에 몰두할 수 없다고 투정을 부리면 아무 말 없이 올망졸망한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하나는 유모차에 다른 하나는 걸리고 다른 하나는 손을 잡고 가까운 연못으로 나가 무심한 청둥오리들에 빵 부스러기를 던져 주다가 쌀쌀한 저녁 바람을 뒤로하고 지친 발걸음으로 집에 들어오던 아내의 모습. 긴 여름 방학이면 식료품가계에서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하며 생활비와 학비를 벌다 어느 날에는 총을 든 복면강도에게 돈을 털리고 벌벌 떨던 그 비 오던 날 밤, 그 후 총에 맞아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리고 마치 창호지가 찢긴 창문처럼 살들과 혈관들이 너덜너덜하게 날리던 악몽으로 밤마다 식은땀을 흘리다 벌떡 일어나던 날들. 달랑달랑한 통장 잔고에서 곶감 빼먹듯이 매달마다 돌아오는 아파트비와 생활비를 내면서 근심과 걱정으로 지새우던 날들. 그래 뵈도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라는 체면을 구기지 않으려고 언제나 의연한척 하면서 오히려 아내에게 믿음이 없다고 큰소리치던 내 모습들. 갈림길에 있을 때 어느 길이 정의롭고 올바른 길인 줄 몰라 헷갈렸을 때. 처음 풀타임으로 사역하러 갔던 교회가 교회 재정이 어렵다고 그리고 우리는 아직 젊은 목회자 가정이니 이 정도면 된다고 책정한 사례금에 너무 화가 나고 슬퍼서 어쩔 줄 몰랐던 시절들. 매우 까칠하게 굴었던 그 재정 담당 집사님이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훗날 들었을 때 슬픔과 눈물보다는 “안됐군!” 하는 정도의 미덥지 않는 마음을 보였던 속 좁은 내 모습을 떠올리며 정말 슬퍼하며 회개했던 기억들. 사방이 칠흑같이 컴컴해지고 천둥번개가 요란스럽게 치며 장대비가 억수같이 쏟아 붓던 밤, 대형 거실 유리창 밖 파란 잔디 위로 청둥오리들이 이리저리 뛰어 도망하던 그 밤에 나와 아내는 배를 깔고 누워 창밖을 내다보며 미래를 계획하던 그 안온한 밤들. 천지가 진동할 정도의 뇌성이었지만 우리의 마음에는 그윽한 원시의 자연을 만끽할 때도 있었다. 어떻게 살까. 무엇을 먹고 살까 어떻게 우리의 삶이 전개될 것인가 등 하등하고 원시적인 질문에서 보다 고상하고 형이상학적 질문들까지 뒤엉켜 오곤 하였다.


그리고 오하이오 주의 한 작은 도시에서 지난 6년간 정겹고 행복한 목회생활을 하였다. 톨리도 한인연합교회에 청빙을 받아 약관 33살에 담임목사로 6년간 교회를 섬기게 되었던 추억을 회상해보니 여간 감개무량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때때로 누르는 책임의 무게감과 그에 부응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무력함, 그리고 허탈감, 또한 교회내의 여러 가지 자그마한 인간관계의 문제들은 젊은 목사의 의욕을 꺾어놓기도 했고 내 개인과 가정의 문제, 자녀 교육의 문제, 젊은 날의 부부지간의 갈등 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래도 가장 순수하고 정열적으로 살았던 세월로 추억되는 앨범의 한 장면들이다. 업적이나 성취보다도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원칙과 공평을 중요시하고, 삶의 질에 관심을 두었던 시절이었다. 목회자로서 무엇보다도 신앙의 진실성과 순전함을 귀한 가치로 여기려고 했으며 어느 정도 그 목표에 이르려고 애쓴 시절이었다. 돌이켜 보면 아직 철도 덜 들었던 그 나이였지만 열과 성을 다해 교회를 섬겼고, 또한 마음씨 착한 교인들을 만나서 내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보내었으니, 떠나 올 때 서운하고 슬픈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마 첫 목회지에서의 아름답고 정겨운 추억이 있어서인지 나는 아직도 교회와 목회에 대한 이상적 그림과 아득한 향수를 갖고 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즐겁고 보람 있는 목회사역을 하면서도 언제나 내 마음에는 공부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처음 미국에 유학 올 때도 박사학위까지 하리라고 결심을 하였지만 그 사이 여러 가지 형편상 그럴 수 없었던 지난 세월이었다. 아내와 나 단둘이 시작한 가족은 자녀들의 출생으로 점점 불어났고 또한 나는 가족의 우두머리로 생계를 이끌어야했다. 당시 한국에 홀로 계신 어머니와 가족들의 생활비로 대야했던 나로서는 어깨가 여간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리저리 시달리기는 했지만 한 번도 휘둘리지는 않았다. 때때로 힘들다거나 어렵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였지만 그것 때문에 내 인생관과 신앙관이 휘둘리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있었던 공부에 대한 소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목회 하고 있던 어느 날 아내와 상의하고 나는 교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제는 떠날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호수들, 아담한 집들, 넓디넓은 잔디들, 대형 트럭들,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숲들에 파묻혀 깊은 상념이 잠겨 있었던 나를 깨운 것은 “이제 다 왔습니다.”하는 동행한 장로님과 권사님의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우리는 서로의 아쉽고 서운한 마음을 달래며 깊은 침묵 속에 있었다. 간단히 작별인사를 하였다. 한 달 정도면 대충 자리를 잡을 것이고 그 때 아내와 아이들을 불러가겠다고 말씀을 드린 후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초초함과 근심걱정으로 어둔 내 마음은 비행 내내 계속되었다. 조금 있으면 해야 할 일 때문에 기인된 초초함이었다.


나는 어제 밤새도록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오늘 멀리 네덜란드로 혼자 떠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난 며칠 동안 내 가족은 힘들 날들을 보냈다. 약 이주일 전에 큰 딸과 큰 아들을 할머니 편에 딸려 한국으로 보냈다. 지금까지 함께 이곳 미국에서 함께 살았던 가족들이 서로 떨어져 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의 자유대학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기로 결정한 후에 가장 급박한 문제는 경제적인 쪼들림이었다. 이민 목회생활이 영적으로 큰 보람을 주었고 기쁘고 즐거운 기간이었지만 경제적으로 넉넉함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내가 책임지고 있는 식구의 숫자는 7이었다. 완전 숫자였지. 나를 포함해서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딸 둘과 아들 둘 모두 7명이었다. 교회를 사직하고 7명의 식솔을 데리고 30대 후반의 나이에 또 다른 나라로 유학길에 오른다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었다. 그러나 길이 그렇게 열렸으니 쉽게 닫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해서 내린 결정이 어머니와 큰 아이 둘은 한국으로 가는 것이고 나는 아내와 아래로 두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네덜란드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생활이었다. 우리 가족이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을 것인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책임하게 저지른 만용인가? 한국에서의 가족의 생계, 네덜란드에서의 생계 등 두 집 살림을 어떻게 꾸려가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디트로이트에서 보스턴 행 비행기를 탔다. 그곳에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야한다. 어느 덧 두 서너 시간이 흘렀다. 보스턴 공항에 착륙했다. 여기서 약 다섯 시간 정도 기다렸다가 네덜란드 항공(KLM)을 타야한다. 지금은 공항에서 기다리는 것은 너무도 익숙한 예식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 보스턴 공항에서의 다섯 시간은 내 일생에 가장 길고 괴로운 시간으로 기억된다. 나는 전날 밤을 꼬박 지새웠다. 수많은 생각에 잠을 못 이룬 것은 아니었다. 길고 긴 편지를 쓰느라 밤을 꼴깍 새웠다. 뭔 편지? 막막한 미래가 검은 구름이 되어 나를 뒤덮는 것이었다. 어떻게 살까? 한국으로 돌아간 식구들의 생활은? 네덜란드에서의 생활은? 지금 가진 것이라고는 3,000달러가 전부다. 엊그제 우리 가족이 타고 다니던 중고차 미니 밴(Plymouth mini van), 즉 우리 가족의 유일한 재산인 자동차를 팔아 생긴 돈이다. 그 차는 비가 오거나 습한 날이면 가다가도 멈추어 서는 아주 고약한 버릇이 있는 차다. 차를 수리하자면 비용이 많이 들어 그냥 조심스럽게 타고 다녔고, 비오는 날엔 제발 차가 운행 중에 서지 말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도하고 다니던 차였다. 기도 덕분인지 가끔가다 섰고 그런대로 몇 년간 잘 타고 다녔다. 한 달 전에 차를 내놓았지만 마땅한 작자가 없어 애를 태우더니 출국하기 전날, 그것도 부술 비가 내리던 날에 차를 사겠다는 사람이 나온 것이다. 그 사람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아주 드물게 시동이 꺼지는 경우가 있지만,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고 얼버무리고 그에게 자동차 키를 건넸다. 그가 차에 올라 시동을 거는 순간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혹시나 시동이 걸리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말이다. 다행이 시동이 걸리고 현금으로 3,000달러를 받았다. 이것이 내 전 재산이다. 이 돈으로 나는 네덜란드에서 생활을 시작해야한다. 아무런 안전보장이나 생활수단을 확보하지 않은 상태로 무모하게 발을 내딛은 것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떠나기 전날 밤에 나는 정 장로님 댁 이층 방 하나에서 아내와 어린 두 자녀와 함께 미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자게 되었다. 지난 일주일 내내 이사하고 짐을 정리하느라 아내는 피곤에 못 이겨 곤한 잠에 떨어졌다. 두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어두운 방 한 구석의 책상에 불을 밝히고 앉았다. 방안 사방에 정신없이 널려있는 짐들과 널브러져 잠든 식구들의 얼굴들을 보니 한숨과 애잔함이 섞여 나왔다. 마음을 가다듬고 편지지를 가지런히 책상 위에 놓았다. 그리고 미친 듯이 써내려갔다. 대략 7장 정도의 장문의 편지로 기억한다. 한국에 있는 내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그에게 편지를 보내게 된 사연인즉 이렇다. 몇 년 전에 한국을 잠시 방문하러 나갔다가 그 친구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나보다 서너 살 위였지만 학교는 동기였다. 이미 그는 한국교계에서도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고 큰 교회의 담임목사에다 꽤나 상당한 규모의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를 만나려면 사람들은 그의 비서실장을 통해서만 가능했고 직접 통화도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 그 친구가 나에게는 매우 친절하게 대했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를 지원해 주겠으니 마음 놓고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약간의 조건이 있다면 학위를 마치고 돌아와 자기가 하려는 일들을 도와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 때 나는 속으로 사람을 신뢰하는 일은 신앙인으로서 옳은 일이 아니라며 그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라도 생각이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이제 나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있다. 어디에서도 도움의 손길은 보이지 않는 상태다. 눈을 들어 산을 보아도, 주위를 둘러보아도 어디에서도 도움이 올만한 곳은 없었다. 하늘을 보아도 먹구름만 떠 있을 뿐 아무도 그곳에 없었다. 몇 년 전 그 친구의 말이 새록새록 분명한 어조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지원해 줄 테니, 필요하면 언제라도 연락해!” 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말에 내 인생을 걸기로 작정하고 얼빠진 사람처럼 지금 편지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내 인생에 가장 추하고 지저분하고 수치스럽고 창피하고 부끄러운 편지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편지의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그 당시 내가 그에게 정중하게 사양하며 말했던 것이 사실은 내 진심은 아니었다느니, 친구에게 괜스레 부담을 주는 것 같아 그렇게 말했다느니, 그리고 지금 내 형편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에 대해, 이번에 나를 잘 도와주면 내가 평생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느니, 당신은 하나님이 쓰시는 큰 그릇이라느니, 당신이 하려는 하나님의 일에 내 진력을 다해 돕겠다느니 등등… 참으로 그렇고 그런 말을 일필휘지하듯이 휘갈겨 쓰고 있었다. 쓰면서 힐끗 옆을 보니 잠자고 있는 순박한 아내와 철없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이 정도 밖에 안 되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려고 무던히도 애쓴다는 내가 이렇게도 무참하게 무너져 내려야하는 것일까?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도무지 부끄럽고 창피하고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굽실거리는 치사한 자세로 편지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이렇게 쓴 편지를 흰 봉투에 넣어 내 왼쪽 가슴 속 깊이 넣었다. 그리고 디트로이트 공항을 떠나 지금 보스턴 공항에 잠시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비행기 탐승시간은 앞으로 5시간 남았다. 누군가 보스턴 공항 안에서의 나의 움직임을 몰래카메라에 담았더라면 정말 가관이었을 것이다. 나는 공항 안의 우편 편지함을 찾았다. 그 앞에서 초초하게 섰다. 가슴 속 깊이 넣어둔 그 편지를 붙여야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편지통 앞에서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 편지를 붙여야할 것인가 말 것인가? 오른손이 왼쪽 안주머니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간다. 그리고 맨손으로 나온다. 다시 손을 집어넣는다. 편지를 꺼냈다. 이제는 우체통에 집어넣을 차례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다시 안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숨을 고르며 공항 안을 이리저리 배회한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오로지 한 가지 생각에 마음을 쏟는다. 편지를 보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러기를 한참이 되었나 보다. 갑자기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this is the last call, last call for Amsterdam!"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비행기 마지막 탑승 안내입니다.” 나는 다섯 시간 동안 우체통 곁에서 뒤가 마린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서성거린 것이다. 이제 결정의 시간이 왔다. 우체통 앞에 섰다. 편지를 꺼내 들었다. 널까 말까. 붙일까 말까, 순간 내 손에서 편지가 우체통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 안으로 떨어진 것이다! 아니 나는 편지를 그 친구에게 붙인 것이다. 편지가 우체통 속에 떨어지는 순간 나는 알았다. 집어넣지 말아야할 편지를 붙였다는 사실을. 이 순간이야말로 내 일생에 가장 수치스럽고 창피하기 그지 없는 순간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후회를 했지만 묵중한 우체통안으로 들어간 편지를 다시 거뒤들일 수는 없었다. 거의 정신을 잃은 채로 나는 허겁지겁 비행기 탑승구로 달려갔다. 대서양을 건너는 약 7시간의 비행시간 동안 내 눈에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만 흘렀다. 아, 나는 그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to be continued…"


[나의 회고록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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