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26 00:58
목회 에세이
“베뢰아 사람들만 같았으면”
목회를 하면서 목사들은 그들이 바라는 이상적 교인상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역으로 목회를 바라보는 교인들의 입장에선 그들이 바라는 이상적 목사상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상적 교인상에 관해 이야기 해봅니다. 물론 성경에서 모범으로 보여주는 이상적 교인상입니다. 행전 17:11에 등장하는 베뢰아 사람들입니다.
누가는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을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평을 합니다. 먼저 행전 17:11을 다양한 번역으로 비교해서 살펴보세요.
(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개역개정)
(2)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개역)
(3)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표준새번역)
(4) “베뢰아 유다인들은 데살로니카 유다인들보다 마음이 트인 사람들이어서 말씀을 열심히 받아들이고 바울의 말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서를 연구하였다.” (공동번역)
(5) “Now the Bereans were of more noble character than the Thessalonians, for they received the message with great eagerness and examined the Scriptures every day to see if what Paul said was true.” (NIV)
(6) “These were more noble than those in Thessalonica, in that they received the word with all readiness of mind, and searched the scriptures daily, whether those things were so.” (KJV)
(7) “Now these were more noble-minded than those in Thessalonica, for they received the word with great eagerness, examining the Scriptures daily to see whether these things were so.” (NASB)
(8) “They were treated a lot better there than in Thessalonica. The Jews received Paul’s message with enthusiasm and met with him daily, examining the Scriptures to see if they supported what he said.” (Eugene Peterson’s Message)
위의 번역들이 공통적으로 알리고 있는 사실은, 바울의 설교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어서 베뢰아 사람들과 데살로니가 사람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베뢰아 인들의 성격을 묘사하고 있는 다양한 번역에 주의를 기울여보세요.
“너그럽다.”(개역개정)
“신사적이다.”(개역)
“고상하다”(새번역)
“트인 마음이다” (공동번역)
“고상하다. 품격이 있다.”(NIV, KJV, NASB)
이렇게 다양하게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유게네스”(eugenes)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잘 태어난”이란 뜻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사회적 신분이 고귀하고 품위가 있는 경우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라고 합니다. 즉 태도와 성격과 품격에 있어서 “고상하고” “관대하고” “너그럽고” “은혜를 베풀 줄 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막무가내로 사람을 함부로 막 대했던 것과는 달리, 베뢰아 사람들은 타인을 너그럽고 관대하게 대하는 온유한 품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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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데살로니가 사람과 베뢰아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달랐을까? 합리적 상상을 해보자면 이렇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에게해 해안의 항구도시였습니다. 고대의 항구도시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향락산업이 번창하고, 거리는 활기차고 분주합니다. 불량배들도 많고, 부정부패의 지수도 높습니다. 사람들의 성격은 일반적으로 거칠고 과격합니다. 한편 베뢰아는 내륙의 자그마한 시골동네였습니다. 대부분 올리브 농장이나 밭농사를 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순박하고 온순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실상, 특정 지역마다 그 지역 주민의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상으로 알지 않습니까? 산골마을, 대도시, 항구 도시, 평야지대, 농촌마을, 어촌마을, 대학촌 등,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충청도, 강원도 등, 아마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특이하고 간과하지 말아야할 사실은 사람들의 성격과 성품이 설교와 복음과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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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를 하면서 나는 이 점을 뼛속까지 느낍니다. 마음이 곱고 품성이 관대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은 말씀(설교)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도 부드럽고 좋은 태도를 갖습니다. 마치 옥토에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진지하고 순수하고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써레질한 농토에 비가 오면 흡족하게 물이 스며들어가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성격이 까칠하거나 거칠거나 삐딱하거나 심할 경우 폭력적이기까지 한 사람들은 말씀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대충 듣거나, 덮어놓고 듣거나, 삐딱하게 듣거나, 자기중심적으로 듣거나, 귀 흘려 듣습니다. 이런 사람에겐 설교는 늘 부딪혀 튀어 나옵니다. 마치 벽에다 대고 치는 테니스공처럼 말입니다. 때론 테니스공을 친 사람이 튀어나온 테니스공에 맞듯이 그렇게 튀어나온 말씀에 맞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를 잘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의 고결한 성품과 너그러운 성격과 온유한 태도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설교를 듣는 모습을 누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바울의 설교 말씀을 받고, 그가 설교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날마다 성경(토라)을 깊이 찾아보았다.” 이런 교인들이 많았으면 얼마나 좋으랴! 아무래도 베뢰아 지역을 찾아야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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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교인들에게 부탁의 말씀드립니다. 좋은 크리스천이 되기 위한 길이 있다면, 먼저 복음을 기쁜 마음으로 듣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좋은 신앙에 이르는 길은 이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환언하자면, 열정적으로, 간절하게 메시지를 ‘받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적 자세는 무엇을 행하는 일이 아니라 먼저 받는 자세입니다. ‘받아들이는 자세(receptive posture)’가 아름다운 신앙인의 기본자세입니다. 이런 사실을 잘 가르치고 있는 이야기가 마르다와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많이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사람들의 대표입니다. 한편 마리아는 주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 기본자세라고 보여 주는 사람들의 대표입니다. 놀랍게도 마르다는 종교개혁 이전의 삶의 방식이고, 마리아는 종교개혁 이후의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먼저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 다음 받은 것에 대한 반응(報恩)으로써 우리는 그분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의 메시지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가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마음으로 받아들이다’는 표현은 선포된 메시지를 자신의 삶을 바꾸는 힘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냥 머리로 알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학적 정보들을 머릿속에 축적하였다는 뜻도 아닙니다. 요즈음 신학교육이나 교회에서의 신앙교육이 이 수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데, 한갓 쓸데없는 걱정[杞憂]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요약하자면, ‘메시지를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건전하고 건강한 크리스천이 되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러나 베뢰아 사람들에게는 두 번째 단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말한 것을 그들의 성경으로(구약성경) 시험해 봤습니다. 즉 바울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를 구약성경의 빛 아래서 확인해 본 것입니다. 그들은 매일같이 그렇게 했습니다. 즉 성경의 빛 아래서 모든 것을 바라보려고 한 것입니다.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서 마음을 열고 기꺼이 배우고 들으려는 자세로 임하였다는 것은, 그 말씀을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받아 들였다는 것을 뜻하는 동시에 자세하게 살피는 조사관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자세하게 살피는 조사관이란 말인가요? 사도 바울이 진짜로 예수님의 증인인가 하는 점을 살폈다는 말입니다. 들리기에는 매우 교만한 말일지 모르지만, 이것이 누가가 우리에게 보고하고 있는 내용 그대로입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 중심적 증언인데, 이 증언을 구약성경의 빛 아래서 평가하였다는 뜻입니다. 어찌 보면 거꾸로 가는 것 같을 것입니다. 구약을 신약성경의 빛 아래서 조사하고 평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통해 오는 구원 선포의 메시지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으면서 동시에 자세히 비평적으로 살펴보면서 그 메시지를 마음에 확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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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갈무리를 합니다. 목사나 교인들이나 모두 각자의 품성과 성품을 곱게 만들어가는 일에 신경을 씁시다. 언어생활에서부터 직장생활에 이르기까지, 교우관계에서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품성과 성격에 있어서 너그럽고, 고결하고, 관대하고, 온화하고, 진실하고, 포용적이고, 호의를 베풀고, 넉넉하고, 여유가 있고, 환대하고, 베풀기를 잘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품성 형성(character formation)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봄은 여기에" 사진, 이범의 목사
신학생들도 베뢰아 사람들처럼 교수님들 말씀에 귀기울이고 신사적으로 둥글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한 것 같아요~ 본인 마음에 드는 교수님 말은 전부 옳고 반대로 본인의 얕은 지식으로 교수님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학생들을 가끔 보는데요 참으로 풍성 형성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