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로마서 묵상 (18): “인동초 희망”

2010.01.30 07:35

류호준 조회 수:9092

 [18]

“인동초 희망”


[본문]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개역개정, 로마서 8:18-27)



[요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었는데 …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 8:20-21)


“For the creation was subjected to frustration … in hope that the creation itself will be liberated from its bondage to decay and brought into the glorious freedom of the children of God.” (Romans 8:20-21)



내게는 매우 인상적인 꽃 이름이 있습니다. 인동초(忍冬草)입니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른 봄에 꽃을 피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폭풍한설(暴風寒雪)의 세상에서 크리스천들이 소유한 희망을 ‘인동초 희망’이라 부르면 어떨까요? 절해고도(絶海孤島)의 바위틈에서 자라는 풍란(風蘭)이나 차가운 감옥의 독방의 창틈에서 자라는 풀 한 포기나 한 겨울의 인동초의 끈질긴 생명력은 희망을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면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고후 4:8-9). 1994년 개봉작인 영화『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에서 감옥에 있던 흑인 주인공 레드는 희망에 대해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희망, 그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야!”(Hope, it's very dangerous thing). 그러나 영화의 끝 부분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나온 또 다른 주인공 앤디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희망, 그것은 정말 좋은 것이야!” (Hope, it's very good thing!).


우리는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들입니다. 비록 현세의 삶과 인생에게 죽음과 죽어감 보다 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죽은은 가장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손님입니다. 죽음은 언제나 피해야할 장애물이며 물리쳐야할 원수입니다. 결코 삶의 자연스런 한 부분이 아닙니다.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은 죽음을 미워합니다. 아무리 죽음을 미화한다 해도 언제나 추할뿐입니다. 영광스런 죽음보다 가난한 삶이 더 좋습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모두 생명을 위해 투쟁하고 애를 씁니다. 심지어 죽음의 문턱에서도 그러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만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비합리적인 것을 합리화시켰던 어떤 철학자들이나 너무 아파서 더 이상 사는 것에 지친 보통 사람들만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음을 싫어합니다. 솔직하게 우리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창조’의 본래적 뜻은 생명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어느 피조물도 자발적으로 썩지도 죽지도 않습니다. 생명은 언제나 탈취되어 갈 뿐입니다. 우리의 기원과 시작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희망하는 것입니다. 희망 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단테의 신극(神曲, La Divina Comedia) 중 지옥 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곳[지옥]으로 들어가는 모든 자들이여, 희망을 놓고 들어가라!”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희망하는 일과 절망하는 일의 차이입니다. 물론 우리는 모두가 좌절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벽에 머리를 세차게 박으면서도 우리는 희망합니다. 우리는 무덤들과 묘비들 한 가운데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어떻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이고 누군가 언젠가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드실 것이라고 희망합니다. 창조세계는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을 바라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창조세계는 자기가 부패와 썩어짐에 억지로 사로잡힌 자가 되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썩어짐의 감옥에서 신음하며 해방의 날을 고대합니다.


크리스천들은 이러한 희망을 공유하고 이러한 희망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서 생명을 간절히 사모하고 갇힌 상태에서 신음하는 일이 점점 깊어갑니다. 우리는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세계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세계의 시작 안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도래한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나라의 첫 열매인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이미 약속의 땅에서 출시한 첫 포도열매들을 맛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는 이미 낙원의 첫 꽃들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이미 낙원의 시식회(施食會, foretaste)와 시사회(試寫會, preview)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장차올 온전한 연회와 실체를 소망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썩어짐의 감옥 안에서 신음하는 피조물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수공예품들 속에 두신 희망이 노래하는 소리들이 사방에서 들려올 때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새로운 세계가 오고 있다는 믿음을 다시금 확신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고통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왜 이 세상에 고통과 신음이 있는지, 왜 우리는 계속해서 희망하고 살아야하는지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더 나은 나라를 희망하고 그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고 그 나라를 위해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맨 앞에 선 선구자들입니다. 크리스천들은 그 나라를 안내하는 인도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크리스천들은 새로움이 어디서 오는지 어디서 시작하는지 어떻게 완성될는지 압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희망으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24절). ‘인동초 희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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