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설교: "광야에서"(대림절 셋째주일)

2009.12.25 23:01

류호준 조회 수:10806

 “광야에서”
이사야 40:1-1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광야(曠野)에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 한 소리가 외쳐 이르기를,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합니다. 광야에,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을 위한 대로(大路)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모든 골짜기들과 계곡들을 메워 평지가 되게 하고 모든 산들과 언덕들을 깎아 내려 평평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광야와 황무지에서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고르지 않은 땅과 울퉁불퉁한 땅을 평평하게 만들라는 외침입니다. 거친 곳들이 평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이 그곳 광야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광야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성경에는 광야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광야(廣野)는 문자적으로 ‘너른 들판’입니다. 광야와 비슷한 용어로 황야(荒野)가 있습니다. ‘거친 들판’ ‘황량한 들판’입니다. 아마 번역에 관한 한 황무지(荒蕪地)라는 말이 훨씬 좋은 번역일 것입니다. 황무지는 “개간하지 않은 땅 또는 잡초 따위가 우거져 황폐한 땅”을 가리킵니다. 어쨌든 성경에는 광야에 관한 언급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자기의 양떼를 쳤습니다. 거친 들판에서 장인의 양떼를 이끌고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을 백성을 애급에서 이끌어 낸 후로 그들을 데리고 광야에서 40년을 떠돌이 생활을 했던 것을 예기(豫期)케 합니다. 성경에는 정말로 광야로 가득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어떠했습니까?

   ․ 사람들이 더 이상 그들의 삶을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 그래서 유머 감각도 상실한 채 삶이 각박하게 되었을 때, 
   ․ “자유고 독립이고 나발이고 모두 다 싫다. 차라리 애급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세 때 끼니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았던 시절이 훨씬 좋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께 이런 원망과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우리를 죽게 하려고 이 광야로 끌고 나왔습니까?” “애굽에 장사 지낼 장소가 없어서 이곳으로 끌고 나왔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질문인 동시에 외침이었고, 부르짖음인 동시에 반복되는 후렴구였습니다.


모세 보다 한참 전, 아브라함과 사라 때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브라함의 후처 하갈을 내쫓아 버렸습니다. 하갈이 아브라함을 위해 아이를 낳게 되자 아이를 낳지 못한 사라는 심하게 질투하였습니다. 결국 집에서 내 쫓김을 당한 하갈은 아들 이스마엘을 데리고 광야로 도망하게 됩니다. 바로 그 광야에서 주님의 천사가 하갈과 이스마엘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은 광야에 살게 됩니다.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양육 받고 자랍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매일 그를 찾아 추격할 때였습니다. 그 때 다윗은 광야에 숨어 있었습니다. 광야 시절이었습니다.


예언자 엘리야는 자기를 죽이려는 이세벨 여왕의 칼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룻길을 걸어 광야로 들어갑니다. 그곳 광야에서 로뎀나무 밑에 주저앉아 탄식하기 시작합니다. “주님, 이젠 됐어요! 이 정도면 됐습니다. 더 이상 제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엘리야가 광야에서 하나님께 말한 내용입니다. 엘리야가 일어나 호렙 산으로 갔을 때입니다. 주님께서 막 지나가시려던 참이었습니다. 엘리야가 동굴 입구에 서있었습니다. 지진이 일어났지만 그 곳에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강렬한 불길이 치솟았습니다만 그곳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광풍이 불었지만 주님은 그곳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후에 아직 세미하고 작은 소리 가운데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다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에게 “가라, 광야 길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광야에 있게 된 엘리야!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설교하고 외치고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광야는 그의 고향이었으며 일터였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의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마귀에 유혹을 받기 위해 광야로 보냄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예수를 광야로 내 몰아 보내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마귀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광야는 그에게 무서운 시험장이었으며 두려운 결전장이었습니다. “이 돌들을 빵으로 만들어 먹으라.” “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 “내게 엎드려 절하고 나에게 경배하라.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그 영광을 다 주리라.” 이런 일들은 모두 다 광야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충성스런 집사 빌립이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빌립 집사는 그에게 성경을 해석해 주고 예수님에 관한 좋은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 에티오피아 내시는 기뻐하며 자기의 갈 길을 갔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에서 일어났습니다. 성경에는 “광야 길”(a wilderness road)이라고 말합니다. 


“광야에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 성경은 광야로 가득 합니다. 광야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성경의 땅은 황무지와 광야로 가득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동남쪽으로 가사에 이르는 길은 광야를 통해 난 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남쪽 방향으로 가려면, 가사를 향하든, 시나이를 향하든, 마사다를 향하든, 쿰란을 향하든, 사해를 향하든, 모두 사막이며 광야입니다. 성경의 지형은 광야로 가득합니다. 생전 처음으로 보시든지, 경험하시든지 아니면 그 안에 직접 들어가시든지, 모두 광야의 경험입니다.


광야라 할 때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혹시 광활한 삼림이나 험한 산들이나 우거진 나무숲이나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둠침침한 그늘들, 하늘을 찌를 듯한 전나무들, 아주 좁은 오솔길들을 상상하게 한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사하라 사막을 생각하신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광야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광야’와 ‘사막’이라는 단어가 병렬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앞부분에는 광야로 번역하고 뒷부분에는 사막으로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단어는 각각 ‘미드바르’와 ‘아라바’입니다. 이 단어들은 황무(荒蕪)한 고원, 황량한 들판을 가립니다. 황폐한 땅, 황량한 들판, 황무지를 말하는 용어입니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은 그저 풍경이나 경치를 말하는 일반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매우 구체적인 지역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이 거친 들판, 이 광야 바로 이곳 여기에 우리 하나님을 위해 대로를 곧게 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와는 달리 신약 헬라어에는 광야나 사막을 가리키는 단어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성경에서 광야는 단순히 풍경이나 경치나, 형태나 지리적 언급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원어를 분석해 보아도 기후나 토지의 상태에 대해서는 별로 건질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광야에 대해, 사막에 대해 상당히 많은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광야는 사막이요, 사막은 광야입니다. 이 단어들은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용어들이 사용될 때 무엇을 이야기 하려는지,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광야에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


성경에서 광야, 사막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는 일차적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 곳, 버려진 땅, 황폐한 지역, 생산성이 전혀 없는 곳, 죽음이 지배하는 영토를 가리킵니다. 생명체가 살지 않는 곳,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곳입니다. 이곳이 광야입니다. 광야가 어디입니까?

   ․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난 곳입니다. 
   ․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모세 홀로 있었던 곳입니다. 
   ․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이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방랑하던 곳입니다.
   ․ 엘리야는 광야에서 자기 혼자 남았다고 생각했던 곳입니다.


광야가 어디입니까?

   ․ 세례자 요한은 아무도 설교하거나 준비하거나 세례를 주지 않았던 곳,
    광야에 나타났습니다. 
   ․ 에티오피아 내시의 개종은 광야에서 일어났습니다. 그의 마음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에 의해 온전히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곳이 
    광야였습니다. 행전 8장의 끝에 이야기의 결론부분에 이르면, 빌립은 
    신비롭게 낚아 채임을 당해 어딘가에 이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광야 
    길에서 내시의 조우(遭遇)는 궁극적으로 그와 하나님과의 조우였기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 예수와 그분의 고독한 유혹의 경험 역시 모두 광야에서였습니다.


모두 광야에서입니다. 광야 길을 따라서였습니다. 고독하고 외롭고 홀로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개별적이고 따로 떨어진 존재로 있는 곳입니다. 아무도 없는 곳, 사람이 살지 않는 곳, 버려진 곳, 폐허가 된 곳, 바로 거기 여러분과 하나님만이 조우하는 곳입니다. 그곳 광야에 주님의 길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매우 상투적인 말이 되기는 했지만, 이것은 현대인들의 영적 주소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입니다. 매우 분주하게 사는 어떤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피곤한 몸을 일으켜 세웁니다. 어제 저녁에 늦게까지 일을 합니다. 회사일로 출장을 다닙니다. 이 공항 저 공항을 배회합니다. 걸려오는 전화, 해야 할 전화가 끝이 없습니다. 짜증날 정도로 기다려야하는 시간들, 이리저리 눈앞으로 오가는 수많은 군중들, 양손에 끌고 다니는 짐 보따리들, 지겹고 힘든 비행시간들, 길고 긴 세관검사 대열 등. 매일같이 서둘러야하고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고 정신없이 분주한 날들과 끝도 없는 회의들,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행할 때마다 최소한 나는 얼마동안이라도 홀로 있어야만 합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수많은 사람들로 둘려 싸여 있는 공항 같은 복잡한 곳에서, 그러면서도 홀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신 홀로 있을 때, 즉 당신과 하나님만이 있을 시간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광야가 올 때, 그 때가 어떤 시간입니까? 그 때가 어느 장소입니까?

   ․ 전혀 예기치 않은 시간과 때가 올 때, 
   ․ 전혀 기대하지 않은 장소에 자신이 앉아 있게 될 때, 
   ․ 조용한 해변에 길고 긴 해안선을 홀로 걷게 될 때, 
   ․ 호젓한 산 속을 이른 아침에 걸을 때, 
   ․ 아니면 홀로 세 시간 정도 한적한 고속도로를 달릴 때, 
   ․ 약 백 명 정도의 사람들과 이런 장소에 있을 때, 
   ․ 어디론가 기차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갈 때, 
   ․ 가족들과 조용한 성탄 식사를 할 때, 
   ․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식사테이블에서, 
   ․ 캠퍼스의 강의실에서,
   ․ 병실에 홀로 누워있을 때,

이런 광야의 순간들 가운데 하나에 있게 될 때, 그 때는 오로지 당신과 하나님만이 있게 됩니다. 그런 장소와 때가 광야입니다. 광야가 오고 있는 순간들입니다. 그 때에 말로

   ․ 마음은 하나님의 평화로 신선하게 가득 차고, 
   ․ 눈은 이제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볼 수 있고, 
   ․ 귀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듣고, 
   ․ 입술은 기꺼이 기도와 찬양을 하려고 움직이고, 
   ․ 영혼은 다시금 하나님 그분 한분만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도록 
    만들어지는 순간들입니다.


저는 주일 아침 이 예배당 안에 예배시간 내내 혼자 홀로 있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에게 정말로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사과를 드립니다. 여기가 불친절하고 외롭고 고립되어 있고 춥고 차디찬 곳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이 자그마한 예배당 안에 자기만 홀로 있는 듯한 기분 말입니다. 우리가 나누는 교제와 친교는 너무도 깨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어떤 분들은 예배 안에서 그들이 경험한 것들이 있다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예배 가운데서 너무도 생생하고 정말로 진하게 경험되는 그 무엇이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경험이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 때 역시 마치 이 예배당 안에 그들 홀로 있었던 기분 말입니다.

   ․ 자기와 하나님만이 있는 경험, 
   ․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를 느끼는 순간들, 
   ․ 마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듯한 하나님의 영을 경험할 때, 
   ․ 하나님께서 옆을 꾹 찌르는 듯이 그렇게 가까이 옆에 있다는 것 사실이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글로 묘사할 수 없는 
    경험들, 
   ․ 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실제로 마음이 설레거나 눈물이 날 때, 
   ․ 아니면 저 깊은 속에서 우러나오는 확신이 온 몸을 전율시킬 때, 
   ․ 오직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이런 일들이 있는 순간들, 
   ․ 자기의 사랑을 다시금 여러분에게 확신시키시려고 부단히 애쓰시는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서만 있는 장소와 시간들, 
   ․ “너는 내 것이야.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렀어. 
    내가 너를 감싸 안고 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내가 있는 곳에 너도 영원히 있을 것이야!”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장소입니다.


목사로서 저는 이런 광야 길에 대해 다시금 반복적으로 들고 싶은 것입니다. 


대림절의 광야(Advent wilderness). “오고 있는 광야”라는 뜻입니다. 이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대림절 광야는 여기 어디에 있습니다. 저기 어디에 있습니다. 그곳은 전혀 기대하지 않는 장소들입니다. 거의 기대하지 않는 시간과 때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의 삶과 저의 삶 안으로 불어오면, 바로 그 순간 모두 여러분과 하나님만이 있게 됩니다. 오로지 여러분과 오로지 하나님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대림절 광야, ‘오고 있는 광야’는

   ․ 일주일의 무료한 일상의 한 부분이 아닙니다.
   ․ 여러분이 항상 해왔던 것도 아닙니다. 
   ․ 여러분이 어떻게 양육되어온 방식도 아닙니다. 
   ․ 여러분의 가족이 기대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거나 만족시켜주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 여러분의 자녀를 위한 역할 모델이 되기 위한 모션들도 아닙니다. 
   ․ 경건과 미신이 하나가 되는 퓨전의 순간도 아닙니다. 
   ․ 일주일을 잘 지내기 위한 지성적 자극도 아닙니다. 
   ․ 아니면 여러분의 가족들이 노래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장소도 아닙니다. 
   ․ 어떤 사회적 이슈나 정의에 관한 여러분의 깊은 관심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도 아닙니다.


광야에는 오로지 여러분과 하나님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누구도 아무도 어떤 것도 없습니다. 광야는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조우(遭遇)입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기에 오로지 당신과 하나님만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비로소 여러분과 하나님만의 고립된 조우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광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가 오늘 아침 여러분에게 설명하고 묘사하고 있는 광야는 우리의 삶 속에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대림절 광야는 그저 교회력에 따른 절기나 계절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대림절 광야를 두 눈으로 보았고 두 귀로 들고 있습니다.


   ․ 대림절 광야,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 광야는 신실하며, 생명을 주며, 
    마음과 심장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 대림절 광야,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 광야는 하나님의 현존이, 주 예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향해 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소리가 있어 외쳐 이르기를, “광야에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 우리 하나님을 위해 대로를 곧게 하라” 하십니다. 마음을 열고 여러분의 광야에서 주님과 독대하십시오. 그분의 길을 따르십시오. 그와 함께 순례의 길을 걸으십시오. 영원한 하늘 나그네(天客)로 오신 그분과 함께 걸으십시오. 그분은 길이시며 진리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무지개 교회 대림절 셋째 주일 아침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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