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첫째 강론]

“하나님은 어느 곳에든지 계신다!”

에스겔 1장

 

류호준 목사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되다?

 

추방되어 이방의 땅에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만 명의 유대인들과 함께 자기의 본토인 예루살렘에서 강제로 추방된 사람입니다. 이름은 에스겔입니다. 그는 바벨론의 유브라데스 강의 그발 수로(水路)에 자리 잡았던 집단 거주지에 살고 있었습니다(왕하 24:14). 열여덟 살 밖에 안 된 유다의 왕 여호야긴도 포로민이 되어 그곳에 살게 되었습니다.

 

대략 25살 정도의 젊은이였던 에스겔은 제사장으로서의 책임을 맡아 일하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꿈은 사라지고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강제 이주하게 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의 철권 독재 아래 새롭게 부상하고 있던 신흥 강대국 바벨론은 세상을 완전히 장악한 듯 보였습니다.

 

에스겔서는 희망들과 꿈들이 산산조각 나버린 어떤 사람에 관한 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는 추방되었고 고국과 성전과 아마 하나님(야웨)로부터 떠나 머나먼 외국 땅으로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야웨에 대한 신앙을 움켜잡고, 희망가운데 미래를 기대하고 있었던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사로잡혀 간지 5년이 되었을 때 ‘야웨의 손’이 그를 움켜잡더니 전혀 새로운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강가에 있었을 때, 야웨께서 그에게 비범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환상은 낙심한 유대인 포로민들에게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로부터 떨어져나갔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은 바벨론 사람들의 신인 ‘말둑’(Marduk)의 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포로민들은 야웨가 다스리는 영토는 오직 예루살렘에만 한정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이 이방 땅에서 찬양의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참조, 시 137장)

 

에스겔의 환상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제한적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교정 역할을 합니다. 예언자는 야웨의 강력한 현존과 임재가 예루살렘뿐 아니라 바벨론에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 환상과 에스겔의 소명은 뗄 수 없는 관계가 됩니다. 온 천지를 마음대로 활보하시는 하나님, 아무 것도 거칠 것이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 한 지역이나 영토에 국한되어 있지 않는 자유롭고 주권적인 하나님에 관한 놀라운 환상은 에스겔에게 포로민을 위한 사역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사역자가 될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전통적으로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분 짓는 기준은 천상의 어전회의에 참석하여본 경험 여부였습니다. 제사장이 되려했지만 바벨론 강제이주 때문에 좌절을 맛보아야했던 그를 야웨 하나님께서 찾아와 그를 따로 세워 하나님의 독특한 대변자(예언자) 그리고 백성을 위한 제사장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환상은 야웨의 병거보좌(chariot throne)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병거보좌를 붙들어 창공으로 치솟던 네 생물들은 스랍천사들이었습니다(겔 10:9ff). 이 환상의 충격효과는 금방 분명해졌습니다. 사람들이 통념적으로 알고 있던 하나님은 언약궤가 있었던 예루살렘의 성전에 계시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일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하나님으로부터 잘려나간 유대인 포로민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환상이 가리키고 있는 사실은, 당신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시간과 장소에 제한을 받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하늘과 땅의 주님이십니다.

 

 

병거보좌(chariot throne)

 

에스겔서는 “하늘들이 열렸습니다”(1:1)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그의 책에서 이 사실을 하나씩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늘들이 열렸다는 말은 에스겔이 환상을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환상이기 때문에, 환상의 특성들과 자료들은 상징적으로 비유적으로 이해해야합니다. 문자적이거나 사실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환상’들은 유대문헌의 일정부분을 차지하는 문학적 장르입니다. 우리는 이 장르를 ‘묵시록’(apocalyptic)이라 부릅니다. 묵시록이란 용어는 “베일을 열어젖히다”는 뜻입니다. 성경 안에는 묵시문헌에 속한 부분들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 계시록, 다니엘서 후반부, 마가복음 13장, 이사야의 소묵시록(24-27장)등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지들의 베일 뒤로 가서 인간 역사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활동의 원리들을 발견해야 합니다. 환상에 나오는 구체적인 사건들과 모형들에 구체적인 의미들을 부여할 때 조심해야하겠지만, 병거보좌를 타고 오시는 이 하나님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몇 가지 실마리들이 있습니다.

 

이 환상의 배경은 정말 장엄하고 놀랄만합니다. 병거보좌 뒤쪽에서 에스겔은 폭풍이 북쪽에서 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폭풍이 불 속에 싸인 광대한 구름을 자기를 향해 불고 있었습니다. 문자적으로, 이 불은 “스스로를 불태우고 있는 불”이었습니다. 화염들이 구름 주변으로 엄청난 속도로 퍼지기 시작하는데 순식간에 불꽃들이 연속해서 떠지는 것이었습니다. 붉은 색깔이 구름 한가운데를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이 불과 열기와 빛은 분명히 심판을 집행하러 병거 타고 오시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어떤 공격도 항상 북쪽에서 온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북쪽’은 유대인들에게는 언제나 ‘심판’과 동의어입니다. 덧붙여, 에스겔은 후에 보좌에 앉은 어떤 분으로부터 ‘두루마리’ 하나를 받는데 그 안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메시지가 담겨있었습니다(겔 2:9,10). 에스겔은 누구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부인하거나 무시해서는 큰일을 당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오랫동안 행해진 ‘우상숭배’(idolatry)와 ‘불의한 행위들’(injustice)은 이제 마땅히 심판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로잡혀 포로민이 되었다는 것으로 그들이 저지른 죄의 값을 다 치룬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다가오는 불행과 저주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은 곧 다가올 파멸의 날을 기다려야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을 침공하는 당사자는 느부갓네살과 그의 강력한 군대가 될 것이지만, 실제로 예루살렘의 저주와 파멸을 계획하시고 집행하시는 당사자는 야웨 하나님이십니다.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심판의 도구일 뿐입니다. 주전 586년, 에스겔이 이 환상을 본 날로부터 6년이 되던 해,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의 말발굽 아래 짓 밟혀졌습니다. 예루살렘 최후의 날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바퀴들 안에 바퀴들

 

에스겔이 본 환상의 중앙에는 불타오르는 것이 있었고 그 안으로부터 생물체처럼 보이는 네 형상들이 나타났습니다. 그것들은 각각 다리와 발과 손이 있는 인간의 형체를 띠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천사들처럼 날개가 있었으며, 얼굴도 하나가 아니라 네 얼굴이었습니다. 각 생물마다 사자와 소와 사람과 독수리의 얼굴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생물들은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하나님의 영이 지시하는 대로 어디로든지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일사불란하면서도 아주 빠르고 매우 효과적으로 그들 위에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이런 신속한 동작과 순종적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 “바퀴 안에 바퀴” 상징입니다(16절). “그 바퀴들은 사방 어디로 가든지, 방향을 돌이키지 않고서도 앞으로 나아갔다”고 합니다. 사실 이런 바퀴를 재구성하여 그려내기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각 모퉁이에 있는 두 바퀴들은 엇갈려 있어 사방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퀴가 앞으로 나갔다고 하는 것은 번개 같은 속도를 상징하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또한 바퀴의 바깥쪽 둘레에는 “눈(眼)들도 가득했습니다.” 병거보좌가 가는 길에 놓여있는 모든 것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역사의 모든 사건들, 심지어 우리 개인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 역시 인격적이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제아래 있습니다. 다스림과 운영을 통해 하나님은 미래로 이어지는 개인과 국가와 세상과 피조세계의 모든 얽히고 복잡한 사건들을 통제하시고 지휘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역사의 수레고삐를 단단히 쥐어 잡고 게십니다. 이 일에 있어서 실수가 없기를 바랍니다.

 

에스겔은 보좌 위에 ‘사람과 같은’ 형체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을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상징을 통해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거룩한 하나님을 본 자도 없었고, 또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찬란한 빛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분 위로는 구름 속에 무지개가 아름답게 아치를 이루며 둘러있었습니다. 이 무지개는 놀랍고 두려운 광경을 부드럽고 온화한 아름다움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든 피조물들과 맺은 언약의 증표로(노아의 언약), 하나님의 영원하신 신실하심을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무지개(rainbow)라는 영어 단어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비(rain)가 온 후에 창공에 떠있는 활(bow)을 연상해 보십시오, 히브리어로 무지개라는 단어는 ‘무기’(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가득한 고집스런 인류를 홍수로 심판하신 후에 노아와 그의 후손들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증표로 하늘에 활을 걸어두신 것입니다. 다시는 너희와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평화의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무지개는 이처럼 심판을 가리키는 천둥구름들 사이로 하나님께서 은혜의 계획을 디자인하고 계신 것을 보여줍니다. 진노가운데 그분은 자비와 긍휼을 기억하고 계신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오늘날 하나님의 계시들의 방편과 도구들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해 성경에 보존되어 있는 이전 시대의 환상들로부터 어떤 유익들을 얻습니까?

 

2. 포로가 되어 강제 이주된 사건은 하나님의 심판과 동시에 은혜를 보여주는 방편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신 흔적들을 우리 개인의 삶들이나 혹은 인류 역사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보십시오.

 

3.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환상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벅찼습니다. 그들의 신학이 그분을 제한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식으로 우리고 이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까? 예를 들어 보십시오.

 

4. 성경의 환상들을 너무 문자적으로 해석하거나 받아들일 때 따라오는 위험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보십시오.

 

5.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특정한 장소나 지역에 한정시켰습니다. 마치 다른 나라들도 각기 자기들의 신들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떻게 우리도 하나님을 특정한 장소, 교회, 도시, 지역, 국가 혹은 특정한 인종에 한정시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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