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안 계시는 동안에”

마가 13:24-37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소 묵시록”

우리가 방금 전에 읽은 열네 절은 무섭고 두려운 장(章)의 결론 부분입니다. 신약신학자들은 마가 13장을 ‘소 묵시록’(little apocalypse)이라고 부릅니다. 이 장에는 예수께서 안 계시는 동안에, 즉 예수의 부재(不在) 기간에 일어나게 될 종말론적 무서운 사건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없는 동안 성전은 파괴될 것이다.” “자, 저 장엄하고 위용에 찬 건물들이 보이느냐?” 그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철저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마치 고별설교처럼 “내가 없는 동안에…”라는 말을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을 이어가십니다. “내가 없는 동안에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메시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뿐 아니라 너희는 사방에 전쟁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전쟁의 소문들을 듣게 될 것이다” “각 곳마다 기근과 굶주림과 지진들이 있을 것이며, 박해와 핍박들도 도처에 있을 것이다.” “세상이 창조된 후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고통들과 환난들이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무후무한 고통과 환난이 있은 후에 너희는 역사의 최종적 사건을 보게 될 것이다. 즉 인자(人子, 사람)가 큰 능력과 영광으로 구름 가운데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자, 이 두렵고 떨리는 장을 잘 이해하려면, 여러분은 먼저 마가 13장이 예수님께서 한 장소에서 설교하신 한편의 설교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와는 달리 마가 13장은 예수님께서 여러 기회에 여러 장소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모아둔 어록입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여러 상황과 장소에서 하신 말씀들을 수집하여 하나의 메시지로 만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 왜 마가는 이런 작업을 했을까?

   ․ 왜 마가는 예수께서 이곳저곳에서 하신 말씀들을 하나로 모아 단일한

    메시지로 만들었을까?


대답은 이렇습니다.

   ․ 마가가 이렇게 한 것은 목회적(pastoral)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 당시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던 로마의 연약한 교회를 돕기 위해 마가는

    이런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서가 탄생하게 된 이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좀 더 이해가 잘 되실 것입니다. 주후 64년 여름이었습니다. 로마 시에 엄청난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화재가 진압되자 로마의 열네 개의 지역구 중 세 지역구는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고 다른 일곱 지역구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화재 후 얼마가 지나지 않아 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황제 네로가 자기를 위한 대규모 건물을 짓기 위해 공간과 장소가 필요해서 불을 놓으라고 명령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물론 정부의 관료들은 이런 소문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소문을 잦아들지 않았고 오히려 일파만파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민심이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로마 정부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방편으로 희생양을 찾았습니다. 마침내 로마 정부는 희생양으로 크리스천들을 지목한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이 그런 짓을 했다!”고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크리스천들이 체포되었고 방화범으로 몰려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마가는 이러한 심각하고 중대한 상황에 처한 로마의 크리스천들에게 목회적 대답을 하기 위해 이 복음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마가의 복음서를 읽게 되게 된 로마의 크리스천들은 그들이 겪고 있는 박해와 핍박이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과 박해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로마의 크리스천들에게 전하는 마가의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박해를 당하고 고난 가운데 있다는 것은 여러분이 지금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인이 그의 주인보다 위에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핍박하였다면 여러분도 핍박할 것입니다. 그 정도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놀라거나 의아해 하지 마십시오. 예수께서는 이미 수없이 이런 일들이 앞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이런 일과 관계된 예수님의 여러 말씀들을 모아서 하나의 말씀, 하나의 설교로 만들어놓게 된 것입니다.” 마기복음이 이런 책입니다.


마가 13장을 읽는 전망대

그렇다면 어떻게 이 메시지를 이해야야 할까요? 특별히 오늘 읽은 메시지들을 어떻게 어느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까? 이 메시지의 어느 곳을 붙잡아야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까?


거의 30년이 되어가는 제 개인의 이야기입니다. 1982년 미국 미시간 주의 4월이었습니다. 위도가 상당히 높은 그곳에 아직도 봄은 오지 않았고 겨울은 꾸물거리며 떠나기를 망설이던 독특한 해였습니다. 4월 4일 주일 오후였습니다. 당시 그곳 그랜드래피드 한인교회의 피아노 반주자는 자동차로 약 1시간 거리에서 살았는데 누군가 매 주일마다 데려오고 데려가는 봉사를 했습니다. 그날의 당번은 저였고, 오후 예배를 마친 그날 그 학생을 자동차로 태워 집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던 중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도로는 깨끗하였지만 그늘진 도로는 아직도 겨울눈이 남아 얼은 채로 있었습니다. 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오던 반대편 도로를 주행하던 중 길게 펼쳐진 내리막길 도로를 달리다가 도로에 엷게 깔린 얼음을 발견하고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그 순간 차가 균형을 잃고 흔들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빙판에서 차가 돌기 시작하며 걷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앞이 깜깜하고, 이제는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큰 딸아이가 태어난 지 12일 밖에 안 되었습니다. 자동차가 세차게 도로 가드레일을 들이받으면서 저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차는 대파되었지만 천만다행으로 얼마간의 찰과상을 입는 것으로 살아났습니다. 차가 얼음판에 미끄러지면서 여러 바퀴 돌고 가드레일을 받는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의 지나온 삶의 모든 중요한 사건들이 내 눈 앞에 쭉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과거의 이런 저런 경험들이 한편의 필름이 돌아가듯이 한 눈에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는 것입니다. 이제 다가온 죽음의 전망대에서, 저는 제 삶을 마지막으로 살펴보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신비롭고 이상한 사실은 이 모든 과거의 일들이 하나의 작품처럼 아주 아름다웠고 의미가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와 비슷한 일이 마가 13장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가 13장은 세계에 관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마치 두루마리가 펼쳐지듯이 그렇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건의 전개방식은 역사가들이 기술하듯이 그렇게 연대순으로 전개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실 역사가들은 언제나 처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역사가들은 말하기를, 대한민국의 광복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시작에서 출발해야한다고 합니다. 즉 광복에 이르게 된 이전의 사건들의 처음부터 시작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말의 관점에서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로 시작하십니다. 그분은 역사를 바라볼 때, 시작의 관점에서 출발하지 않고, 끝에서 바라보십니다. 종말의 관점에서 역사를 돌아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능력과 영광 가운데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시는 ‘왕의 귀환’의 관점에서 이 세상의 역사를 바라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세상의 역사를 뒤에서부터, 맨 뒷줄에 서서 거꾸로 바라보십니다. 뒤돌아서 서서 바라보니 모든 것이 연결이 되고 말이 되고 의미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끔찍스런 사건들, 즉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 전쟁의 소식들, 기근들과 지진들 등, 이 모든 끔찍스런 일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 우리 인간의 역사는 파산되었다! 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 역사는 내적으로 붕괴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세상은 계속해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 세상은 예수님을 파멸하고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돌아오시기 전에 먼저 이 세상은 파멸되어야만 합니다.

- 이 세상은 예수님을 파괴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돌아오시기 전에 먼저 이 세상이 서있는 그 기둥들과 기초들은 무너져

   내려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24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예수께서 영광중에 돌아오실 때,

   ․ 태양이 먼저 어두워져야 하고

   ․ 달이 먼저 그 빛을 잃어버려야 하고

   ․ 별들이 먼저 하늘에서 떨어져야 하고

   ․ 하늘에 있는 세력들이 먼저 요동치고 무너져야 합니다.


물론 예수는 지금 천문학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지금 천체의 움직임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지금 태양과 달과 별들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멸망해야 하는 이유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예수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현재의 세계, 즉 여러분과 제가 알고 있는 세상이 먼저 없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러해야하는지 한 가지 이유를 예를 들어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1,000 조(兆)원이 얼마나 되는 줄 아십니까? 1,000조원을 가지고 여러분이 살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 자, 먼저 10억짜리 아파트 한 채와 5천만 원짜리 자동차 한 대와 5천만 원 어치의 가구장식품들을 삽니다. 그리고 그것을 7만 명의 과천시민들 각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보세요, 77조원이 듭니다.


- 이렇게 하시고도 상당한 액수가 남을 것입니다. 923조원입니다. 그 다음에 100억 짜리 병원을 짓고 100억 짜리 도서관을 지어 우리나라 아홉 개의 도마다 세 개씩 줍니다. 5,400억 원이 듭니다. 이렇게 하시고도 엄청난 액수가 남을 것입니다. 922조 4600억 원이 남아 있습니다!


- 그 다음에는 100억 짜리 학교를 500개 정도 지어 전국의 100개 도시에 나눠 줍니다. 그러면 500조원이 들 것입니다.


- 이렇게 하시고도 남은 액수는 상당합니다. 얼마인줄 아십니까? 422조 4600억 원입니다! 와우! 남은 이 돈을 연리 10%로 계산하여 10,000명의 간호사와 10,000명의 선생님에게 일 년에 연봉 2,500만원씩 주고 서울시 인구 전체에게 가족 당 매년 5백만 원씩 현찰로 용돈을 준다고 합시다. 그렇게 준다고 해도 계산상 일 년이나 몇 년이 아니라 영원히 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Republic Airlines Magazine의 자료를 각색한 것임)


이것이 1,000조원입니다. 이것이 1,000조원으로 할 수 있는 양입니다. 그런데 놀랄 만한 일은 이것이 25년 전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시절 미국이 국방비로만 쓴 돈의 겨우 절반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그리스도의 ‘가치 저울’로 재볼 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굶주리는 사람들을 먹여라”, “헐벗은 자에게 입혀라”, “집 없는 사람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라” 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비쳐볼 때 참으로 기가 막힌 일입니다. 이것은 그저 한 가지 예에 불과 합니다.  


전쟁을 준비하고 무기를 만드는 일에 엄청난 돈을 사용하는 세계에 미래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런 세계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목소리를 높여 “오, 주님 예수여, 어서 속히 오시옵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왕의 귀환을 기다리면서

현대 네덜란드 시인인 얀 빌름 스쿨테 노르트홀트(Jan Willem Schulte Nordholt, 1920-1995)가 여러 시들은 모아 편집한 시집 한 권이 있습니다.1) 그 시들 중 한 시가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 시는 19세기의 독일 목사인 불름하르트(Blumhardt)에 대한 시였습니다. 들어 보십시오. 그가 어떤 자세로 이 세상을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감동적인 시입니다.


그는 한 평생 늘 그의 마차를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마차를 끌 말들이며, 고삐들이며, 승마복 등 모든 것을 잘 준비해 놓았습니다. 여차하여 천사의 노래들이 하늘에 영광스럽게 울려 퍼질 그 때, 그는 마차에 올라 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길쭉한 모자와 최상의 멋진 연미복을 입고 마차의 좌석에 앉아 허리를 곧게 펴고 그의 주님을 만나러 총총히 앞으로 달려 나갈 것입니다. 지금은 온 땅의 왕으로 계시는 그분, 그러나 마침내 반드시 오실 그 주님을 만나러 나갈 것입니다.


오, 하나님, 그런데 당신께서는 그러한 고향 그리워하는 마음, 향수(鄕愁, homesickness)로 가득한 마음, 그러한 큰 꿈으로 충만한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을 어찌하셨습니까? 그는 지금 땅 속에 고요히 누워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 당신은 이 어두운 세상에서 당신의 귀환을 갈망하고, 당신께 간청하고, 때론 의심의 목소리로 외치면서 당신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 모두를 어찌 하려 하십니까?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 오 예수님, 우리를 두고 이 세상을 떠나심은 어인 일이십니까?

   ․ 어떻게 하라고 우리를 그냥 남겨두시고 떠나셨나요?

   ․ 이 어둔 세상에서 당신의 돌아오심을 간절하게 사모하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를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간결한 대답이 마가 13:34-35안에 들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떠남은, 내가 오랫동안 없게 되는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가는 것과 같은데, 그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함과 같으니…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안 계시는 동안에”

그 집 주인이 얼마동안 떠나있는가요? 그가 떠나 있는 기간이 얼마인가요? 2000년이 넘었습니다! 로마의 교회는 ‘얼마동안’의 박해와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가 ‘오랫동안’ 계시지 않는 부재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는 궁금합니다. 어느 쪽이 더 고통스러운 것일까? 어느 쪽이 더 견디기 힘든 것일까?

   ․ 얼마동안 박해를 받는 교회일까?

   ․ 2000년 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는 교회일까?


제 생각으로는 후자일 것 같습니다. 2000년 동안 기다리는 것이 더 고통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종종 이곳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임재, 그리스도가 함께 계셔주시기를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재가 너무도 깊게, 고통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 예배당에서, 이 예배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임재를 느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분의 충만한 임재와 현존은 아니더라도 그의 옷자락 끝만이라도 만지는 그분의 현존과 임재 정도는 경험하실 것입니다.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삼십 분 후, 예배를 미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니면 내일 다시 직장으로, 일터로, 학교로, 가족을 돌보러 돌아갔을 때, 그리스도의 현존과 임재는 더 이상 확실한 듯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부재가 점점 더 깊게 고통스럽게 다가오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형편입니다. 우리의 현실입니다.


마가 13장 34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부재’(不在, absence)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그가 안 계시는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먼 여행을 떠난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이 집을 떠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이 기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가 떠나고 없는 동안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가 안 계시는 동안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이기간’은 집 주인이 없는 동안 집 주인이 그의 하인들에게 각자가 해야 할 일을 맡긴 것과 같은 시간이라고 하십니다.


주인은 가버렸습니다. 맞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분은 떠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지난 2000년 이상 우리는 집 주인이 지금 떠나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인께서 우리에게 각 사람에게 일을 맡겨두었다는 사실입니다. 책임지고 해야 할 일을 맡겨두고 가셨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테스트의 시간

그리스도께서 안 계신다는 사실은 분명히 고통스럽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부재 기간이 테스트의 기간, 즉 우리의 신실함을 시험하는 기간이라는 사실입니다.

   ․ 정말로 우리는 믿음직한 사람들인가?

   ․ 신실한 사람들인가?

   ․ 우리에게 맡겨둔 일들과 책임들을 성실하게 처리하고 있는 것일까?

   ․ 주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에도 성실하게 우리의 일들을 감당하고 있는

    것일까?

   ․ 우리 자신은 우리의 삶에 관한한 신뢰할만한 사람들인가?

   ․ 우리에게 위탁된 ‘삶’, 주어진 ‘인생’을 책임 있게 관리하고 돌보고 있는

    것일까? 


주인이 있는 동안에만 믿을 수 있는 종은 쓸모없고 무익한 종입니다. 주인이 없는 동안은 우리의 신실함을 시험하는 테스트의 시간들입니다.

   ․ 결국 우리 뒤에 아무도 없을 때입니다.

   ․ 아무도 우리를 쳐다보고 있지 않을 때입니다.

   ․ 주인이 부재할 때입니다.

주인의 부재는 곧 우리의 신실성의 테스트입니다.


예수께서 돌아오실 때, 그분은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냐?”라고 묻지 않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돌아오시면 그는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신실했는가?

   ․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신실하게 자녀들을 길렀는가?

   ․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신실하게 학생들을 가르쳤는가?

   ․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신실하게 자동차를 수리했는가?

   ․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착실하게 페이퍼를 썼는가?

   ․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신실하게 굶주린 사람을 먹였는가?

   ․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신실하게 병든 사람을 고치고 돌보았는가?

   ․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신실하게 보험을 팔았는가?

   ․ 내가 없는 동안, 자녀들 기르는 일에 얼마나 신실했는가?

   ․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신실하게 양들을 먹였는가?

   ․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신실하게 다른 사람들을 대우했는가?

   ․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진실하고 책임감 있게 살았는가?

   ․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신실하게 배우자를 대우하였는가?

이 목록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나머지를 채우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현존과 임재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지금 그리스도는 우리 각자에게 책임을 맡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일들을 성실하게 책임적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집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아멘.


무지개 장로교회 주일 설교 (대림절 첫째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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