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08 23:28
“천상의 예배와 지상의 예배”
계시록 5장
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4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어리석게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 멋지고 으리으리한 집을 짓다가 가정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압니다.
· 화려하고 성공적인 경력을 쌓느라고 자녀들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압니다.
· 보물들과 재물들을 쌓아둘 큰 창고들을 짓다가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압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진짜 중요한 문제들, 진짜 시급한 일들에서 부차적이고 이차적인 것들로 눈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사소하고 일시적인 것들에 집착하고 몰두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에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신앙’에 대해서도 같은 일이 일어 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들로서 우리는 신앙에 대해서도 쉽게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우리가 크리스천인지”, “삶에 있어서 우리의 진정한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주 쉽게 눈이 가리게 됩니다. 영적 시력과 분별력을 상실한 채로 무덤덤하게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주변적인 것에 몰두하다가 가장 중요한 것을 잃고 산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무슨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입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묻는 첫 번째 질문입니다. 대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지구상에 두신 핵심적 이유는 그분을 찬양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일 때 우리의 지음 받은 목적이 온전하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우리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아마 이 아침에 이곳에 오시면서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 헌금 통에 얼마를 집어넣어야 할까?
· 사람들이 내가 왔다는 것을 알까?
· 내가 교회에 왔다는 사실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갖을까?
· 오늘 듣게 될 설교가 내 일주일의 삶을 잘 견디게 도움이 될까?
· 오늘 교회에서 무엇인가를 얻어갈 수 있을까?
· 설교를 통해 내 마음에 평안과 안위를 얻을 것인가?
그러나 이런 생각이나 질문들은 핵심을 벗어나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오신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을 높이고 칭송하고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시편의 시인은 하나님은 항상 찬양받으셔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145:3-5)
이런 일을 하려면 시간과 장소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시간 이 장소에 모인 것입니다.
·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들을 선포하기 위해서
· 하나님의 위엄과 장엄하심을 읊조리기 위해서
· 한 마디로 “경이와 사랑과 찬양”에 푹 빠지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일을 마친 후, 즉 우리가 “경이와 사랑과 찬양” 속에 푹 담금질 한 후에는 어디로 가든지, 어떤 일들이 우리에게 닥쳐오든지 우리는 괜찮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순수한 예배란?
자, 이렇게 하여 이제 우리는 계시록 5장에 들어갈 준비가 된 셈입니다.
우리가 계시록 5장을 통해 목격하고 있는 장면은
· 가장 순수한 형태의 예배입니다.
· 우리의 지상 예배가 본 받아야할 천상의 예배입니다.
예배는
· 우리 자신들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 우리가 이 예배에서 얻을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초점을 두어서도 안 됩니다.
· 이 예배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줄까 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서도 안 됩니다.
· 예배는 그리스도께, 오직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앞장인 계시록 4장에서 사도 요한은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게 됩니다. 그 광경을 요한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었고, 또 한 음성이 들려오기를,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더라. (1절)
이 목소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하는 예배의식이 진행 중인 천상의 예배장소로 오라는 초청이었습니다. 들어가 보니 하늘 궁정에서 들려오는 대 연합 찬송가의 가사는 이러했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11절)
이렇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자기가 만든 세상을 보존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개인과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찬송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두루마리
자, 바로 이 시점에서(달리 말해 우리는 지금 계시록 5장의 문턱에 들어 서있는 중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장면에 등장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두루마리를 - 안팎으로 썼고 일곱 도장으로 인봉되어 있었다. - 건네주십니다. 그러나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었습니다.”(3절)
둘둘 말아져있고 철저하게 인봉 된 이 두루마리는 무엇입니까? 무엇을 상징합니까? 그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무슨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까?
물론 이 두루마리는 성경은 아닙니다. 성경은 봉함되어 있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펼쳐진 책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루마리는 무엇입니까? 어떤 책입니까?
· 여러분과 저에 대한 책입니다.
· 우리 각 사람의 운명과 미래에 관한 책입니다.
· 이 책안에는 우리 모두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들어있습니다.
· 이 두루마리 안에는 모든 전쟁들과 재난들과 재앙들과 비극들의 의미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루마리는 개인과 나라들과 우주의 역사의 비밀을 담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묘사하고 있는 책입니다.
두루마리, 역사의 비밀
계시록 5장을 좀 더 확실하게 이해하려면 그 다음 장들을 잠시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6장에서부터 16장까지입니다.
6장에서 우리는 두루마리를 봉인한 일곱 인봉에 대해 읽게 됩니다. 이 인봉들이 하나씩 개봉될 때마다 끔직한 재앙들이 지구상에 일어나게 됩니다. 일곱 째 인봉이 열릴 때 즈음, 우리는 “아아,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겠구나. 이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덮칠 큰 재앙이 시작되는구나. 이것으로 끝이 나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틀렸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일곱 천사들이 일곱 나팔을 들고 나오는 장면이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팔을 하나씩 불 때마다 ‘새로운’ 재앙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일곱째 나팔이 불 때 즈음, 우리는 또 다시 “아아,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야. 이것이 마지막 재앙일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틀렸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잠깐의 간주(間奏)가 있은 후에 우리는 다시 일곱 천사들을 보게 됩니다. 일곱 천사들은 제각기 그릇들을 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가득 담은 그릇입니다. 그 안에는 비참과 재앙으로 가득 했습니다. 비참한 사람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재앙을 담은 큰 그릇이었습니다. 고통스런 상처와 죽음과 불과 어둠과 기근과 한발과 지진과 같은 비참한 재앙들이 가득 담긴 그릇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여러분은 “죄송합니다. 목사님, 너무 복잡해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이미지들이 많이 등장해서 정신을 못 차리겠어요. 다시 한 번 요약해서 이야기 해주시겠어요?”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다시 이야기 해드리지요. 제일먼저 일곱 도장으로 인봉된 두루마리가 있습니다. 각 인봉들을 부숴 두루마리를 열 때마다 대재앙이 하나씩 일어납니다. 일곱째 인봉을 뗀 후에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들이 나옵니다. 각 천사가 자기 나팔을 불 때 마다 비참한 재앙들이 세상에 쏟아져 내립니다. 일곱째 그릇을 이 세상을 향해 부을 때 남아 있던 마지막 재앙들이 쏟아져 내립니다.
끝이 안 보이는 재앙과 재난들
달리 말해, 일곱 인봉 환상, 일곱 나팔 환상, 일곱 대접 환상은 우리에게 재앙과 비극과 재난은 끝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여러분과 저는 이미 수많은 재앙과 재난과 환난들을 보아 왔을 겁니다. 볼 뿐 아니라 경험했습니다.
· 2차 세계대전이 있었습니다.
· 한국 전쟁이 있었습니다.
· 베트남 전쟁이 뒤를 따랐습니다.
· 중동의 걸프 전쟁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 이라크 전쟁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 아프카니스탄 전쟁이 동시에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북 아일랜드, 중동, 남아메리카, 보스니아, 르완다 등지에서 일어난 다른 전쟁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 비극의 현장들, 아르메니아인 150만 명, 유대인 600만 명, 캄보디아인 200만 명이 당한 대학살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재앙과 재난은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가 채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재앙이 들이 닥칩니다. 헨리 포드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기랄, 역사란 끝없이 계속되는 재앙의 연속일 뿐이다.”(History is just one damn thing after another)
이 모든 사건들, 이 모든 재앙들, 이 모든 재난들과 불행들이 하나님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넘겨준 두루마리 안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건들이 역사라는 각본을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 5장 3절에서 요한은 “하늘과 땅 위에 그 누구도 두루마리를 열고 그 안을 들여다 볼 자가 없다!”고 외칩니다. 이 모든 것을 의미 있게 설명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들이 왜 그런 식으로 일어나게 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비밀은 하나님의 손 안에
역사의 비밀들은 오직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역사의 비밀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4절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저는 울었습니다.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습니다.”
재난과 환난에 끝이 없으니 눈물도 끝이 없습니다. 한 고비 넘기면 되려니 했건만 또 다른 고비가 찾아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 때문에 밤을 지새우기 일쑤입니다만 광명의 아침은 오질 않는 것 같습니다.
끝없는 눈물을 흘리는 것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그들을 덮치고 파괴하는 재난들과 재앙들과 불행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소리 내어 엉엉 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울음과 슬픔 뒤에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좀 더 깊은 이유입니다.
진짜 우는 이유
-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신들의 운명과 미래의 주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신들의 영혼의 선장(船長)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쓰라린 눈물을 짓습니다. 때론 소리 없이 엉엉 웁니다. 사람들이 언제 분노하면서 쓰라린 눈물을 흘립니까?
· ‘삶의 비밀’을 밝혀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 자신의 운명을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 자신의 보기 싫은 과거를 끊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 현재의 나 자신을 만든 내 과거 역사를 지니고 살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뒤 늦게 알게
되었을 때
그렇습니다. 사람은 동물들과 다릅니다. 동물들은 자신의 역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동물들은 현재의 자기를 결정짓는 역사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물들과 다릅니다.
· 우리의 과거는 현재의 우리를 결정짓습니다. 우리의 과거는 배의 키와 같아 보이지
않으면서도 실제로 배의 항로를 결정하고 인도합니다.
· 우리는 우리의 과거에 의해 결정됩니다. 지우고 싶은 과거로부터 도망칠 수 없습니다.
· 우리는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 없습니다. 엉망진창으로 만든 자리를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습니다.
·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 구부러진 과거를 다시 곧게 펼 수 없습니다.
우리의 과거, 죄책감으로 덮인 과거는 현재를 통제하는 주인(master)입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배의 키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슬피 우는 울음, 쓰라린 눈물의 깊은 이유입니다.
· 우리는 우리의 과거에 갇혀있습니다.
· 우리는 이 견고한 철벽요새를 깨부수고 나올 수 없습니다.
요한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습니다.” “내가 크게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바로 그 때였습니다. 크게 울고 있었을 때 장로 중의 한 사람이 요한에게 “울지 말라! 보라, 유대 지파의 사자(Lion)가 이겼다. 그가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놀라운 순간입니다.
요한은 그 사자를 보려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사자가 아니라 어린양이 서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지금 어린양을 보고 있습니다. 잔인하게 살해된 것처럼 보인 어린양이었습니다. 이 어린양이 지금 두루마리를 펼치려고 한걸음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 그분만이 홀로 우리의 과거를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있습니다.
· 그분만이 홀로 우리의 과거 안으로 들어가서 비뚤어진 것을 곧게 펼 수 있습니다.
어린양이 그 두루마리를 취하자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새 노래, 찬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는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 때 수천수만의 천사들이 그들과 함께 연합 찬양대를 이루어 찬송합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왜 교회에 오는가?
자, 왜 우리가 지금 이곳에 있습니까? 주일마다 왜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 항상 동일한 찬송을 부르고
· 똑같은 예배를 드리고
· 동일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고
· 동일한 사람들과 함께 모입니까?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하늘의 성도들과 함께 그들의 끝없는 찬양의 노래에 조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이 여러분의 개인 역사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통제하시고 계시고 그분이 여러분과 저의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고 돌보시고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즉 천상의 예배와 연합하여 드리지 못하는 예배라면, 종교적 분위기에 이끌린 충동적 발작이며 종교적 감동에 의한 경련 현상이 될 것입니다. 각종 종교적 광고나 각종 매력적 프로그램이나, 각종 유행성 분위기에 휩쓸리는 삶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 우리는 조작되고 통제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 초점을 잃은 삶, 중심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 고정점이 없는 삶, 앵커가 없이 요동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 방향도 목적도 없는 삶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할 때 우리는 우리가 지음 받은 목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이와 사랑과 찬양’ 안에 푹 빠져있을 때,
·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않게 되며
· 우리는 진짜 세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어떤 세상입니까? 어떤 세상에 고정점을 둔다는 말입니까?
·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신 세상
· 하나님의 돌보시는 손길이 없이는 결코 돌아가지 않는 세상
· 어린양이 손에 일곱 인으로 봉한 두루마리를 갖고 계신 세상
· 하늘의 수천수만의 천사들이 큰 소리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를 부르는 세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곳에 고정점을 둔다면 여러분과 저의 삶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무지개 교회 2011년 2월 6일 주일 설교전문]
교수님! 잘 지내셨습니까? 마음에 찌-잉-한 설교를 잘 보았습니다. 2011 봄학기 시간표를 보았는데, 교수님께서 강의하시는 걸로 되어 있어 ... 안식년이 아니었습니까? 암튼 2월 22일(10:00-15:00) 개강식날 교수님의 말씀을 기대하겠습니다. 제자 박주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