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비오는 날 주차 유감”

 

봄비가 세차게 내리치는 이른 아침 오랜만에 학교에 갔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은 교직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는데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이 도착했습니다. 차를 몰고 지하 주차장으로 진입했는데 오로지 두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럴 수가 있나 싶어 매우 기뻤습니다. 주차장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차량들의 숫자는 많기 때문에 먼저 오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그런데 빈 두 자리 중 하나는 일반인 자리였고 다른 하나는 장애인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결국 나는 유일한 주차 자리를 꿰차는 행운을 얻는 셈이지요.

 

바깥엔 세차게 비가 내리고 아직 예배시간은 한참 남아서 자동차 안에 그냥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어둠침침한 지하주차장 안에 자동차 뒷좌석으로 옮겨 앉아 잠시 명상도 하고 이런 저런 일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내 자동차 앞 건너편에 덩그러니 비어있는 장애인 주차공간에 눈을 주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두 서 너 대의 차량들이 연이어 들어왔다가 바닥에 그려진 장애인 주차 사인을 보고 망설이다가 뒤로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모두 여성 운전자(교수거나 직원)들이었습니다. 잠시 후 다시 묵직한 차량 한 대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일말의 거리낌 없이 비어 있는 장애자 주차 공간에 힘차게 주차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인간이 저렇게 담대하게 차를 세우나싶어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아마 그는 비밀스런 관찰자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요! 우람한 체격의 남성이 내리더니 주위를 한 바퀴 둘러봅니다. 헐, 평소에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었습니다. 자동차 열쇠를 누르자 삑삑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동차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유유히 현장에서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는 장애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입니다. 사실 어쩌다 그렇게 된 사람입니다. 물론 그는 교회에서도 착실한 크리스천일 것입니다.

 

내 마음은 착잡했습니다. 저런 게 혹시 한국교회의 민낯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명색이 교수, 그것도 기독교대학의 교수, 교회에선 열정적으로 기도하고 교회봉사를 하는 크리스천입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된 지하 주차장에서의 자그마한 행동 속에는 그가 평소에 갖고 있던 일그러진 신앙과 신학의 몰골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늘처럼 비오는 날, 장애를 가진 운전자가 그 주차장에 들어와서 그 자리에 떡하니 주차한 비장애인의 차량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하고 생각이나 했을까? 누군가 이야기하듯이 바보와 천재의 차이는 상상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파급에 대해 조금이라도 상상을 할 수 있다면 그는 똑똑한 사람입니다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야 말로 바보 천지 아니겠습니까?

 

오늘 사건을 경험하면서 누가복음 10장에 기록된 예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험한 길에서 강도를 만나 거지반 죽게 된 어떤 유대인에 관한 이야기이죠. 우연치 않게 그 길을 가다가 강도를 당해 쓰러져 있던 그 사람을 만나게 됬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제사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레위 인이었습니다. 모두 유대교 정통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에 익숙한 사람들이었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도만난 이를 그냥 지나쳤습니다. 왜 그냥 지나쳤는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만, 여러 가능한 이유 중에 하나는 구약 제사법에 따르면 레위 인이나 제사장들은 길거리에서 죽은 사람을 만지게 되면 부정을 타기 때문에 그들이 해야 할 종교예식 집전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정결하게 되려면 여러 날 시간이 지나야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에 제사를 집전하러 가는 사람의 입장에선 자기를 기다릴 여리고의 사람들을 생각해야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산술적으로 따져서도 한 사람을 희생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어야하는 것 아닙니까? 달리 말해 레위 인이나 제사장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신학과 신앙적 열심히 강도만난 사람을 지나치게 만들 것이지요. 그들의 골통보수 신학이 사람을 죽도록 방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신학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것이지 그 자체의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깅도를 만난 사람이건 주차할 곳이 없어 어쩔 줄 모를 장애인이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눈곱만큼의 배려나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이 드리는 열정적 기도나 교회 생활, 혹은 권위 있어 보이는 교수 생활이 뭔 가치가 있단 말인가요? 삶에서 드러나지 않는 신앙과 신학은 그저 자기만족을 위한 이념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제발 말로만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의 면전에서”)를 외치는 실질적 무신론자들이 되지 말고, 일상에서 정의롭게 행동하고 약자들을 배려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P선생, 장애인 주차 장소에 주차하면 벌금이 얼만 줄 알아! 하기야 문제는 이런 일에 조금이라도 마음의 찔림을 느끼지 못한다는 불행한 사실입니다. 어쨌든 오랜만에 쓰는 유감(遺憾)이었습니다. 그것도 “비오는 날 주차 유감”이었습니다.

 

"The true test of man's chracter is what he does when no one is watching." (American basketball coach John Wooden).

 

[Little Missouri River overlook in Theodore Roosevelt National Park]

Little Missouri River overlook in Theodore Roosevelt National Park.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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