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성경을 작은 교리서로 축소하지 마세요!”

 

교리를 위해 성경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위해 교리가 존재한다.”

 

성경과 교리의 관계는 매우 오래된 신학적 주제입니다. 특별히 신학 논쟁들 중 불편한 논쟁이 성경신학과 조직신학과의 관계입니다. 아쉽게도 한국의 개신교회, 특별히 개혁 신학적 전통의 장로교회는 16세기의 종교개혁운동(실제로는 교회개혁운동)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신학적 구호로 축소 환원하는 경향성을 보여 왔으며 이러한 현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구호가 잘못된 거란 말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100%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신앙의 뼈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신칭의교리가 성경전체에서 가장 높은 독보적 주봉인가요? 그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종교개혁운동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원천이 오로지 성경에 있으므로 성경으로 돌아가자(ad fontes, “수원[水源]으로!)는 교회개혁운동이었습니다. 당시의 기독교회였던 가톨릭교회가 성경이외에 다른 권위들을 말하자 종교개혁자들은 아니오!”라고 강하게 부정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종교개혁운동의 유산을 성경중심”(Sola Scriptura)으로 남기게 된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성경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구약에선 이스라엘민족을 중심으로, 신약에선 교회공동체 에게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자기의 뜻과 계획(경륜)이신칭의교리보다 더 크고 포괄적입니다. 물론 신자 각 개인들은 다른 인간적 노력이나 공로를 쌓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시고 베푸는 구원의 은혜를 온전히 믿음으로만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이신칭의교리를 폄하하거나 왜곡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의 광대한 가르침을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이신칭의교리로 축소하거나 환원하려는 경향은 삼가야한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이신칭의교리에서 오직 믿음”(sola fide)의 요소를 잘못 이해하여 오직 믿음이 열불을 가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믿으려고 애를 쓰는 인간적 노력을 의미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믿음만능주의의 해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한국교회 안에는 믿음만능주의가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특별히 1970년대부터 시작한 경제발전과 함께 하면 된다!”는 자아확신이 사회전반에 퍼지면서 교회도 하면 된다!”는 자기주술형적 구호제창과 함께 교회의 양적성장이라는 놀라운 성공을 이룬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여기서도 한국교회의 열정자체를 평가절하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믿음과 긍정의 힘을 동일시하였던 경향은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믿음만을 강조하는 목회자들의 강단에서의 외침이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식의 믿음 강조로 잘못 전개되어 평신도들안에서는 믿음이 천국에서의 상급 규정의 척도나 심지어 행위구원을 위한 도구로 생각되고 있다는 슬픈 현상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잠간 언급 한 것처럼 믿음을 강조하는 현상은 언제나 기복 신학적 천국관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습니다. 달리 말해 열심을 내어 교회 생활을 잘하는 신자들에겐 믿음이 있으면 천국에 가서 많은 상급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여기서 천국이라 할 땐 죽어서 가는 장소로서 천국을 말하곤 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천국에 대해서 말할 때 천국에 간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그들에게 천국은 가는 곳입니다!

 

그러나 천국이 가는 곳일까요? 아닙니다! 성경 전체를 자세하게 보면 천국은 가는 곳이 아니라 오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 세상에 와서 하신 최초의 말씀이 무엇이었으며, 그가 가리켜 오시리라고 했던 메시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첫 마디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가 아니었습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오고 있는 천국에 관한 것이 구약성경에서 시작하여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성경의 핵심적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향해 돌입하고 있는 하나님의 왕국, 하늘 왕국(천국)이 성경의 핵심 주제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하늘 왕국(천국)이나 하나님 왕국(나라)이나 같은 말입니다.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서는 구약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통치와 다스림을 유대인들 독자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천국”(하늘왕국)이란 용어를 사용한 반면에 다른 복음서들은 이방인들에게 마태가 말하고 있는 동일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하나님 왕국(나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가르치고 있을 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늘은 곧 하나님을 가리키는 대명사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늘왕국(천국)은 곧 하나님왕국과 동의어입니다.

 

다시금 주의를 환기시키자면, “하나님의 왕국,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 우리가 살고 있는 죄로 일그러지고 얼룩진 이 세상 속으로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와 공의로 자신의 온 피조세계를 다스리시기를 바라시는 하나님께서 죄와 불의로 하나님의 정의로운 다스림을 거절하고 배척하는 이 어둠의 세상 속으로 자신의 천군천사들을 대동하고 진군하여 오시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해 하나님은 자신의 세상이 정의와 공의 위에 세워지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고 구약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면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의 구약의 역사 전체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왕권(Kingship)과 그의 왕국(Kingdom)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고 온갖 인간의 야망으로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려고 하는 이 세상과 대비하여 읽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불의와 암흑, 분열과 교만, 욕망과 탐욕, 착취와 고통으로 점철된 악한 세대와 대비되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의 왕국이 이 세상 속으로 진입하여 들어오면서, 항복(회개와 전향)을 촉구하는 장엄한 나팔소리가 들려오는 곳이 성경입니다. 구약의 율법과 예언자들, 신약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바로 이러한 장엄한 나팔수 역할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 역시 하나님 왕국의 도래를 알리는 봉화산들이며 이 세상 속에 투입된 하늘왕국의 전초기지(outpost)들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왕국에 투항하고 그의 신민과 백성이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신약적으로 말해 세례식을 통해 새로운 왕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고 신실하게 끝까지 그의 왕과 그의 왕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선서합니다(참조, Sacrament). 이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정의로우심과 신실하심에 신실하게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태도가 믿음입니다. 변절(배도)하라는 유혹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한분 하나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주님이심을 고백하고, 그의 나라가 훈령으로 보내온 가치들과 덕목들을 이 세상에서 구현해 나가는 사람들이 신앙의 사람들이며 언약백성들의 삶입니다. 그들이 삶은 전방위(全方位)적 유연성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과 신민들로서 삶의 모든 방향과 국면에 대해 책임성 있게 응답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것이 소금의 역할로, 빛의 역할로, 다리의 역할로, 화해의 전령 역할로, 때론 용맹스런 신앙의 전사로서의 역할로 나타날 것입니다. 마치 트랜스포머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면서 하나님의 왕국을 옹호하고 확장하고 전향자를 받아들이고 상처 입은 자들을 싸매고 약한 자들을 훈련시키고 궁극적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왕국이 임하도록 애를 쓰는 것입니다. 시편의 한 문구에서처럼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출 때까지왕국의 일군들(Kingdom workers)로서 당당하게 오늘도 땀을 흘리는 것입니다.

 

오늘의 메시지는 단순명료합니다. 교리를 위해 성경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위해 교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경의 방대한 내러티브를 단순히 한두 가지 교리적 명제들로 환원 축소하는 일에서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장엄하고 풍성한 큰 그림(하나님의 왕국)에 매료되어 상상력을 갖고 그 그림 속으로 들어가기는 권하는 바입니다. 교리는 신앙의 뼈대이지만 신앙 자체는 아닙니다. 교리는 성경에서 나온 이차적 진술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자체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 세계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왕국과 공의로운 왕권에 대한 경외감을 갖도록 마음의 옷깃을 저며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의 핵심이 하나님의 나라(왕국)가 이 땅에 임하기를 소원하라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Robert Cox의 작품, 묵시론적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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