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성례(聖禮)로서 인간의 성(性)”

- 아가서 읽기 -

 

류호준 목사

 

 

성경 안에는 아가(雅歌)라는 책이 들어 있다. 한자어의 뜻은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이다. 영어 성경도 제목을 “노래 중의 노래”(Song of Songs)라고 잡았다. 그런데 도대체 이 책은 어떤 종류의 책이란 말인가? 두 연인이 서로에게 잠자리를 같이 하자는 애타는 속삭임들로 가득한 연시(聯詩)다. 일종의 연서(戀書)라고 할 수 있다. 낯이 뜨거울 정도로 육감적이고 애욕적인 시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연서(戀書)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안에 들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달리 말하자면, 무슨 이유 때문에 주전 90년경에 열렸던 얌니아(Jamnia)의 종교회의는 금서 목록에나 들어갈 이 불경건한 책을 히브리 성경 안에 포함시키기로 하였단 말인가? 또한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인 여러분들이 어떻게 당황하거나 어색한 감정 없이 이 책을 읽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우리가 짚어볼 문제다.

 

 

노래 중의 노래, 사랑 이야기

 

원래 아가서는 순수하고 소박한, 그러면서도 아주 육감적인 연애 시 모음집이었다. 사랑에 빠진 두 젊은 남녀가 서로에게 애틋한 마음을 주고받는 사랑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런 연가(戀歌)가 성경 안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랐다. 왜냐하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성경은 종교적일 일, 거룩하고 경건한 문제를 다룬 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성경은 기도나 예배 혹은 도덕과 같은 고상한 것들과 관련이 있어야지, 남녀 간의 육감적인 사랑을 다룬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가서는 공개적으로 그리고 아주 당당하게 한 청년과 한 처녀사이의 성적이고 육감적인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 청년이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그러자 한 처녀가 이렇게 화답한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다.” (2장에서)

 

이 젊은 청년은 너무도 깊은 사랑에 빠져있었다.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내 누이, 내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너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진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향기롭구나.” (4장에서)

 

자, 이런 내용이 연이어 나오는데 설교자들에게 아가서를 설교한다는 것이 어떻게 꺼려지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교회에서 아가서가 설교되는 것을 들어보신 일이 있는지 궁금하다. 더욱이 가정 예배시간에 아가서를 자녀들과 함께 돌아가면서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거북스럽겠는가? 어느 부모가 다음과 같은 아가서 구절을 자녀들에게 낭독해 줄 수 있겠는가?

 

     “머리는 순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 같이 검구나.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는구나.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구나.

      다리는 순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생김새는 레바논 같으며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입은 심히 달콤하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5:11-16)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네 두 유방은 꼴을 먹는 암사슴의 쌍태 어린 사슴 같구나.” (7:2-3)

 

 

출애굽과 아가서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성경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무시해 버릴 수는 없지 않는가? 왜냐하면 성경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아가서도 성경이기 때문이다. 성경 안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입 기운을 불어 넣으셨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에 이르도록 지혜롭게 한다는 뜻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가서를 영적으로 해석한다. 일명 영해(靈解, spiritualization)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유대인들이었더라면 “아가서에서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말할 것이다. 한편 기독교인들은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상징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아가서는 영적인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라는 것이다. 아가서는 육체적인 것도, 성적(性的)인 것도, 함께 잠자리에 들고 싶어 하는 두 연인에 관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각 가정마다 유월절 예식을 지킨다. 유월절 예식 중에 눈에 띄는 순서가 있다. 아가서에서 길게 인용하여 읽는 순서다. 매우 놀랄만한 일이다. 어떻게 출애굽(유월절)과 아가서가 관련이 되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아가서 봉독은 원래 유월절 예식의 한 부분이 아니었다고 한다. 유월절은 아가서가 써지기 상당히 오래 전부터 지켜져 내려왔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아가서가 유월절 식사시간의 마지막 순서에 읽히게 되었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목회적인’ 것이다. 아시다시피 유월절은 애굽에서 탈출한 사건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민족적 절기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광복절이며 미국으로 말하자면 독립기념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유월절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행위를 찬양하고 노래한다. 그러나 출애굽을 매년 축하하고 기념하다 보니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너리즘에 빠져 구원을 제례화(祭禮化)시키는 위험에 들게 된다. 하나님의 장엄한 구원을 제도화하고 격식화시키는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출애굽을 수세기에 걸쳐 반복적으로 매년 기념한다면, 달리 말해 유월절이 반드시 지켜야 할 절기로 고착화되었기 때문에, 혹은 많은 사람들이 출애굽을 반드시 기념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혹은 출애굽을 축하하는 것이 오랜 전통이 되었기 때문에, 혹은 달력에 그 날을 기념하라고 하기 때문에 지킨다면, 이것은 순전히 습관이고 관습이고 죽은 관례가 될 뿐이다. 혹은 그날을 기념하거나 지키지 않으면 여러분의 신앙이 무엇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비난할지도 모르는 친구나 이웃 때문에 지킨다면, 유월절의 정신은 사라지고 그저 빈 껍질만 남은 격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러한 위험에 빠져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목회적인 통찰력을 지닌 어떤 사람이 아가서를 유월절 예식의 끝 부분에 낭독하도록 하였다. 즉 아가서는 출애굽의 사건을 매우 사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아가서는 출애굽 사건을 두 연인사이에 성적 친밀성의 차원으로 내린다는 것이다. 이 말이 여러분에게 좀 더 분명하게 이해되도록 하기 위해, 방금 말씀드린 내용을 기독교적인 음조로 바꾸어 말해보겠다.

 

 

청중석에 앉아 듣는 세레나데?

 

자, 제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오늘날 65억이나 되는 전 인류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매우 광범위하고 일반적인 진술이다. 문제는 요한복음 3:16을 수천 번 이상 들었지만 그저 무덤덤할 뿐이라는 데 있다. 그 말에 크게 영향을 받거나 마음에 커다란 요동이 없다. 물론 “그 말이 맞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은 그 말에서 제외되거나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지, 그리스도께서 정말 나를 위해 죽으셨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내가 들어야 하는 소리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문자적 단어들이 아니다. 내게 필요한 말씀은 아주 개인적이고 친밀한 말씀이다. 나는 그분께서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나’에게 가까이 오셔서 친밀하게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

 

내가 들어야 할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씀, 하나님께서 나 류호준을 사랑하신다는 말이다. 내가 꼭 들어야만 하는 목소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따스하고 매우 사적이고 친밀하여 마치 사랑에 빠진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달콤한 사랑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내게 필요한 것은 (1)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다. 그러나 그것을 너머 (2)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사랑하시고 계신다는 확신이다.

 

자, 이것이 유대인의 유월절 예식에서 아가서 낭독이 차지하는 역할과 의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의 신비와 장엄함이 습관적으로 지켜는 유월절 예식을 통해 상실되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권태기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처음 경험했을 때 어떠했는가? 우리를 압도하는 사랑으로 인해 숨이 막힐 지경으로 감격했고, 마치 헤어날 수 없는 사랑에 빠진 듯하지는 않았는가? 마치 “하나, 둘, 셋” 외치면서 대형 성탄절 트리에 붉을 밝히듯이, 온 세상이 갑자기 환한 불빛으로 밝혀지는 경험을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그런 경험에 너무 익숙하고 너무 친숙해져 버린다. 동시에 그 때의 신비와 장엄함과 감격을 상실하게 된다.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첫 번째 경험, 혁명적이고 세상이 뒤바뀐 듯 했던 첫 번째 경험은 시간이 흐르자 그 짜릿함과 황홀과 탄성을 상실한 채 굳은살이 되어 버린다. 220볼트의 전류에 감전된 듯한 충격적인 경험은 사라지고 그저 목석을 만지듯이 무덤덤함과 권태로 젖게 된다.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서 거듭나던” 그 시간들, 내가 주님을 처음으로 찾았던 그 때의 복된 상태는 지금 다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이 내 영혼을 새롭게 하고 소생시키던 그 때 그 일이 지금은 다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우리는 우리의 첫 사랑을 상실했다. 우리는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기적인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저 교회 달력에 무의미하게 박아 놓고 있을 뿐이다. 기껏해야 “올해 부활절은 4월 셋째 주에 떨어지네. 잊지 말자! 4월 셋째 주일! 달력에 형광펜으로 표시해 놓자!”라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머지 51주일에는 해당되지 않는가? 매주일 우리의 삶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초점 맞추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매일같이 우리의 삶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영양분을 공급받아야하는 것이 아닌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아는 친밀감은 어떤가?

 

바로 이것이 아가서가 경종을 울리며 경계하고 있는 사항들이다.

     ․ 아가서는 살아있는 신앙이 일상적인 종교로 바뀌는 위험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 아가서는 우리의 첫 사랑이 생생하게 살아있도록 자극을 준다.

     ․ 아가서는 딱딱한 정통주의 가운데서 친밀성을 보존시키려 한다.

     ․ 아가서는 살아있는 신앙을 딱딱한 교리로 환원, 축소시키려는 경향에 경종을울린다.

 

아가서는 하나님의 장엄한 행동들이 아무리 인상적이고 놀랍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들이 아무리 고상하고 훌륭하다 하더라도, 결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반복되는 매일의 삶 속에서 경험되지 못할 만큼 장엄하거나 고상하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 주는 온전한 사랑

 

출애굽의 이야기는 구원에 대해, 노예에서 해방되는 일에 대해, 언약 관계에 들어가는 일에 대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함께 걷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는 장엄한 이야기다. 아가서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비록 매우 친밀한 사랑의 언어, 매우 육감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가서는 이와 동일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외로움과 고독으로부터의 해방에 관해, 언약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일에 관해,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가 함께 걷는 일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그의 입술로 내게 열렬하게 키스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Let him kiss me with the kisses of his mouth) 아가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친밀하게 다가오기를 열렬하게 사모하는 한 여인의 목마름이다. 우리의(정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두 연인들은 경건하지 않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지금 신학에 대해 심각하게 토론하는 분위기도 아니다. 그들은 지금 예정론에 관해, 신적 작정(divine decree)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마음은 온통 사랑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상대방의 몸과 마음에 전적으로 몰입하는 일을 말하고 있다.

        “나는 그가 그의 입술로 내게 열렬하게 키스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당신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달콤하고

         당신의 기름은 향기로워 아름답고

         당신의 이름은 쏟은 향수 같습니다.

         자, 어서 우리 서두릅시다.”

 

아가서가 우리에게 외친다.

        “자, 이 두 연인들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즐거워하고 사랑에 푹 빠져있는지를 보십시오!”

        “서로가 서로의 육체에 얼마나 만족하고 즐거워하는지 보십시오!”

        “그들이 서로의 벌거벗은 몸을 내려다보며 얼마나 흥분하고 즐거워하는지요!”

 

왜 그럴까? 그들은 낙원에 있던 아담과 하와와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아무런 수치와 부끄럼이 없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즉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을 때 의도하신 방식이다. 그들의 모든 오감(五感)이 어떻게 충만하게 작동하는지를 보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입으로 맛을 보고, 손으로 만지고!

 

교회가 부르는 천 년의 사랑 노래, “마라나타!”

 

이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사랑이다. 이것이 두 사람을 하나로 온전하게 묶어주는 사랑이다. 이것이 모든 차원에서의 온전한 사랑이다. 이것이 깊고 깊은, 풍요하고 넉넉한, 아름답고 눈물겨운 생명이며 충만한 삶이다. 삶이란 이래야 한다. 온전한 생명, 가득한 생명 말이다.

 

이러한 인간의 사랑의 불꽃은 너무도 순결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차용된 사랑이다. 인간의 사랑은 이렇게 순결할 수 있다. 즉 그럴 때 인간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례(聖禮, sacrament)로서 봉사할 수 있다. 인간의 성은 온전한 합일을 위한 ‘거룩한 예식’, 상대방을 향한 온전한 충성과 사랑과 헌신을 약속하는 예식이 되는 것이다.

 

아가서 안에서 사랑받는 자가 이렇게 말한다. “내게 키스해주세요. 당신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낫습니다.” 그렇다.

       ․ 포도주는 우리를 고립에서 교제 속으로 이끈다.

       ․ 포도주는 억제로부터 해방시켜준다.

       ․ 포도주는 대화를 자극한다.

       ․ 포도주는 공동체를 창조한다.

 

그러나 사랑은 포도주 보다 더 낫다.

       ․ 사랑은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 준다.

       ․ 사랑은 분리와 분열의 장벽들을 허물고 마음과 육체를 연결시켜 살린다.

       ․ 사랑은 사람들 안에 진짜 생명으로 가득하게 한다.

자, 이제 우리는 아가서의 끝맺는 부분을 훨씬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 (8:14) 빨리 달려 그 분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그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사무치는 목마름으로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될 것이다.

 

놀랍게도 이것은 신약성경의 기도문과 동일하다.

       - “우리 주님, 어서 오십시오! 당신을 기다리고 사모합니다.”

 

놀랍게도 이것은 신약성경의 대미를 장식하는 끝부분과 동일한 목소리다.

       - “성령과 신부가 말하기를 ‘오시옵소서! 당신의 오심을 갈망합니다!’

 

이 메시지를 듣는 모두 이들은, 저와 함께 큰 소리로 “주님, 어서 오소서! 당신을 사모합니다!”라고 외치자. 아멘.

 

 

[이글은 필자가 편집인으로 있는 백석정신아카데미 발행 2010년 9-11월분 [매일양식]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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