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20 23:41
짧은 글 모음
twitter@danielryou – 71
[서글픔] 모 대학 총장 출마자들 가운데 한 분은 이사회 앞에서의 면접시간에, “선출이 되면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를 학교에 기부하겠다”고 했답니다. 저런 약속을 해야만 하도록 만드는 학교와 교단의 풍토가 한심스럽고 씁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럼 그분의 경우도 선출이 안 되면 어쩌겠다는 것인가요? 이런 것이 한국교회에 답이 나오지 않는 단편적 이유입니다.
[믿음의 차이] “작은 믿음”과 “적은 믿음”의 차이는 뭘까? 예수께서 안타깝게 생각하시는 믿음은 작은 믿음일까 적은 믿음일까? 작지만 단단한 믿음, 이것이 겨자씨 같은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토실토실하게 알차지도 않고 오히려 함량에 미달될 때 우리는 그런 믿음을 적은 믿음이라고 부르지 않을까?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성탄절] 청중의 형편과 사정과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설교자는 성육신의 실제적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피조물의 탄식소리와 궁핍한 처지를 듣고 보기 위해 자신의 길고 긴 허리를 한 없이 굽히신 것입니다. 성탄절은 그런 겸손한 절기입니다.
[의무와 끌림]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에서 하는 것과 해야 하겠다는 끌림에서 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인 동시에 하늘과 땅 끝 차이입니다. 감사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공포왕국] 하나님의 왕국에는 시혜(施惠)와 정의(正義) 시행이 함께 있지만 독재 권력에겐 시혜만 있을 뿐입니다. 정의가 없는 은혜는 언제나 공포정치만 있는 극악무도하고 오만방자한 느부갓네살 왕국의 특징입니다
[지존] 지존(至尊)께서 연설할 때 마지못해 건성건성 박수를 치거나, 다리를 꼬고 앉아 있거나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삐딱하게 앉아 있거나 다른 곳을 쳐다보거나 졸거나 하면 곧바로 처형당합니다. - 북한 장성택의 처형 근거랍니다. 지존 중 지존이신 그분께서 말씀하실 때의 우리의 태도를 생각해 보면, 아직 우리가 처형당하지 않은 것만 보아도 우리는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광고] 언제 어떤 방식으로 출애굽을 하겠다고 여러 차례 알렸지만 그것을 귀담아 듣지 못한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출애굽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광고(announcement)의 힘이며 중요성입니다. 광고(廣告)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매주일 마다 선언되는 출애굽 광고 말입니다.
[십자가 종언]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심은 “나는 종결자다” “나는 끝내주는 분이다”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만사(萬事)가 궁극적으로 그분의 손안에서 최종적인 형태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제1계명] 김정은의 무지막지하고 잔인하고 짐승적인 공포정치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의도적입니다. 철저하게 통제된 TV와 언론매체를 통해 고모부 숙청 시나리오를 생생하게 연출하는 김정은은 고도의 공포 희극을 온 세계에 리얼리티 쇼처럼 드라마틱하게 선보였습니다. "누구든지 내 앞에 또 다른 신처럼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라" “나만이 너희를 위한 유일한 신이니라!”는 자기 신격화 제 1계명의 세기적 연출이었습니다.
[단순] 단순한 것이라고 해서 쉬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복잡한 세상에서 단순하게 사는 것보다 더 어려운 삶의 방식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단순함은 소박함과 일란성 쌍둥이입니다.
[비문] 종교소설『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조르쥬 베르나노스는 자기의 묘비에 이런 글귀를 써 넣었답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천사들께서는 나팔을 아주 크게 불어주시기 바랍니다. 이곳에 묻힌 자는 가는귀를 먹었습니다.”
[아래는 네덜란드 하우다(Gouda)시 광장의 성탄트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