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복음의 변증 (2)

 

기독교신앙과 관련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또 다른 특징은 종교다원주의를 지지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용어에 관해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다원화된 사회 속에 사는 것과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이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교통수단의 발달과 함께 인터넷과 같은 정보통신수단의 발달로 인해 가히 “지구촌”(global village)이란 말이 피부에 와 닿고 있다. 문화들의 교류는 자연스럽고 신속하며 우리들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다문화세계가 되었다. 미국과 유럽 중심의 세계는 전통적으로 유대-기독교적 가치를 의심할 바 없이 받아들여진 전통으로 삼았다. 그러나 제3세계의 약진과 함께 다양한 종교들이 함께 공존하게 된 세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문화적으로 다원화되었을 뿐 아니라 문화의 정점에 있는 종교들 역시 다원화 시대에 함께 어깨를 겨루며 같은 문화 공간 안에 서게 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종교의 다원화 현상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다양한 종교가 같은 사회와 문화권 안에 공존하다보니 자신들의 자리에 대한 재고가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서구에선 전통적 종교들인 유대교-기독교의 전통은 다른 종교적 전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관계정립을 해야 할지에 대해 깊은 논의가 시작되었다. 갑과 을의 관계인가 아니면 갑과 갑의 관계인가? 적대적 세력들인가 아니면 공존하고 상생해야하는 관계인가? 나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상대방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아니면 나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상대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혹시 상대방이 내게 대해 전투적이거나 적대적인 경우는 어떻게 대응해야할 것인가? 둘 사이에 공동의 목표를 세워 함께 일할 수 있을까?

 

이미 감지했겠지만 타 종교에 대한 입장과 이해는 때론 매우 극명하게 나타나기도 하고 매우 모호하기도 하다. 절대자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를 박멸해야할 마귀의 종자들로 볼 것인가? 혹은 무슨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적군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영혼들을 사로잡아와 해방시켜야 할 것인가? 전도라는 것은 십자군 전쟁과 같은 것인가 아니면 좋은 소식을 널리 알리는 선포인가? 종교 다원화 된 세상에서 기독교인들은 상대방 종교를 인정하는 관용적 태도를 보여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유일성과 배타성을 포기하거나 느슨하게 만드는 유약한 태도이며 타협적인 모습인가?

 

단군동상의 목을 쳐 내리는 것이 다종교사회에서 열심당 기독교인들이 목숨 걸고 해야 할 일인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며 지하철 입구에서 외쳐대야 하는 것일까? 심지어 같은 기독교 내에서도 나와 신학적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팻말을 들고 그들의 신학적 잘못들을 지적하는 것은 어떤가? 여러 종교의 지도자들이 모여 국가적 사회적 봉사에 함께 손을 잡고 일하는 것은 어떤가? 스님이 목사에게 사찰에 와서 설교해달라고 하면 갈 것인가? 가서 뭐라고 설교할 것인가? 그런 기회를 얻었다고 해서 답례로 목사가 스님을 교회로 초청해서 설법을 들을 수 있단 말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정신은 분명히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적그리스도적인 환경을 배태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관용이란 현대적 덕목의 옷을 입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종교다원주의를 적극 지지한다.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기독교 신앙은 구원에 있어서 유일한 길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죽음”(vicarious death)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천하 만민 중에 예수라는 이름 외에 구원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성경은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종교 사회에 사는 것과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도 인식해야한다. 일찍부터 한국 사회는 종교적으로 단일화 된 사회가 아니었다. 이미 불교, 유교, 도교, 민속종교 등 다양한 종교들이 있었다. 그런 종교들 가운데 기독교도 하나의 종교로 자리 잡고 있는 형편이다. 미주나 서구유럽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는 곳이 한국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토양이라고 생각한 유대교-기독교적 토양에서 소위 이방 종교들이 들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우리 한국의 경우는 정반대의 경우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다종교사회에 살면서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더욱 분명히 하면서도 다른 종교에 대해 이해에 폭을 넓혀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첫째는 기독교의 신앙을 좀 더 잘 변증하기 위해서이다. 상대방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신앙이 때론 얼마나 허술하고 우격다짐식이며 철저하게 자기도취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런 자각의 과정을 통해 신앙의 본질에 좀 더 천착하게 되는 유익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특별히 신앙적 허세와 거품이 많은 한국 기독교계는 기독교 신앙의 긍정적인 변증을 위해서라도 이 점을 깊이 인식해야할 것이다. 둘째로,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하듯이 나의 신앙적 뿌리와 근본을 잘 알고 상대방의 뿌리와 근본을 잘 앎으로서 소위 “잃어버린 영혼”을 다시 창조주시며 구원자이신 참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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