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4.09 13:39
“끝나지 않은 이야기”
(부활절 설교)
마가 16:1-8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희망의 끝
3년 전 그러니까 2010년 3월 26일을 기억하십니까? 서해안 백령도 해상에서 북한의 폭침으로 천안 함에 타고 있던 46명의 해군 병사가 목숨을 잃었던 비극적 사건 말입니다. 이런 죽음들에 대해 이제는 익숙해지기 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전사한 군인들이 여러분이 사랑했던 아들이었거나 동생이었다면 그 슬픔과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죽은 자의 가족들은 그들이 그렇게도 사랑했던 자들이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희망의 종언입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아직도 내 옆에 있는 것 같은데….”라며 말끝을 흐리는 어떤 전사자의 어머니의 목소리가 하늘에 사무칩니다. 아들을 그리워하는 엄마는 아직도 아들의 유품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남겨놓은 방에 들어가기가 두렵습니다. 매일같이 아들의 무덤을 찾아 묘비를 닦고 계신 아버지의 심정을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아들이 돌아올 수 없다기에 희망의 끝인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4월 5일)에 저명한 복음주의자이며『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인 릭 워렌(Rich Warren) 목사는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잃었습니다. 27살의 아들 매튜는 오랫동안 정신질환을 앓아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렸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워렌 목사는 사고 당일 아내·아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왔는데, 아들이 “순간적 절망에 휩쓸려” 자살했다고 밝혔습니다. 워렌 목사는 계속된 치료에도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한 아들이 "난 내가 천국에 갈 것이란 것을 알고 있는데, 왜 지금 죽어서 이 고통을 끝낼 수 없느냐"고 한 말을 잊지 못한다고도 덧붙였습니다. 어쨌든 아들의 죽음은 워렌 목사의 가족에겐 희망의 끝입니다.
이번 주에 누군가 직장을 잃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지키려고 애를 썼지만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누군가 결혼생활의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누군가 암 투병에서 패했습니다. 이제 모든 이야기는 끝난 것입니다. 모두 자기들이 원했던 대로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목사의 위대한 특권은 이런 상실들로 슬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놀라게 하는 일들 가운데 하나는, 그런 갈등과 상실이 끝이 나면 그들 모두 걱정을 덜게 되거나 그 괴로움에서 해방된다는 사실입니다. 모두 이렇든 저렇든 결말을 보기 때문입니다. 끝장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끝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 주간 엊그제 나사렛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남겨진 그의 제자들과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와 몇몇 여인들은 깊은 슬픔과 비통함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졌던 모든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메시아였기를 바랐으며 메시아로서 예수께서 새로운 왕국을 세우시고 현재의 질서를 바꾸어 놓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지난 금요일과 함께 모든 희망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고, 이렇게 하여 이야기의 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끝장 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소중하게 가슴에 담았던 “그 무엇”을 잃어버리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더 미치게 만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게 될지 모를 때입니다. 행복한 결말로 끝나든, 슬프게 끝을 맺든, 어느 경우든 끝장을 보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결말을 잘 핸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말이 없는 이야기,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은 정말 견디기 힘듭니다.
∞ ∞ ∞
오늘 이른 아침에, 모든 것이 끝이 난 후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예수의 죽음을 슬퍼하고 곡하러 무덤에 갔습니다. 아마 그들은 모든 것이 끝장나게 되자 울먹이면서 서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 뜬 눈으로 어제 밤을 새웠을 것입니다. 아마 살아생전 갈릴리에서 보냈던 즐겁고 보람 있던 날들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젠 모든 것이 다 끝났고 그 시절은 아득한 과거가 되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으로 온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덤에 도착하여 보니 무덤입구를 막고 있었던 큰 돌이 젖혀져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이 그 안에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놀라움 가운데 무덤으로 들어갔는데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 우편에 흰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찾고 있구나. 그러나 그는 부활했다.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제자들에게 가서 그가 너희 앞서 갈릴리로 가셨다고 전하라. 너희가 거기서 그를 보리라.” 그리고 그 다음 문장, 즉 마가복음의 마지막 문장이 나옵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이렇게 마가복음서가 끝이 납니다.
이상한 종결
그래서 그 다음은? 그러나 마가복음은 이렇게 갑작스럽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이렇게 어정쩡하게 끝이 난단 말입니까? 좀 더 들어야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그 나머지 이야기는 어디로 갔습니까? 아마 여러분이라면 “마가 선생님, 좀 더 이야기 해주세요. 이슈를 해결해주고 끝을 맺어야할 것이 아닙니까? 이 부활 이야기의 중요성을 설명해주세요. 부활하신 구세주를 보았던 사람들의 놀라운 경험들을 들려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가 들어갔으면 멋진 종결이 될 것 같습니까?
․ 그 젊은이가 무덤 관리인인줄 알았던 여자들의 간증 이야기
․ 너무도 많은 회의와 의심을 품고 있어서 예수의 상처에 손을 직접 만져보아야 했던 어떤
제자의 간증 이야기
․ 자기 주인을 배신했지만 용서를 받았던 어떤 제자의 간증이야기.
아니면
․ 제자들에게 선교사명을 위임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 마태처럼 그렇게 멋지고 웅장한
스케일로 끝을 맺거나,
․ 아니면 하늘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승천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누가처럼 그렇게
드라마틱하고 장엄하게 끝을 맺어도 좋을 것입니다.
어쨌든 행복하게 끝이 나든 슬프게 끝이 나든 상관없습니다. 제대로 끝이 난다면 좋겠습니다. “마가 선생님, 제발 하시던 이야기를 제대로 끝내 주세요. 이런 식으로 어정쩡하게 끝나게 되면 끝난 게 아닙니다. 완성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고민스런 끝부분
마가복음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 마가복음의 미완성의 이야기에 대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하며 고민하던 사람들은 우리가 처음이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도 똑같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보수적인 성경학자들도 이제는 마가복음의 가장 오래된 사본이 무덤을 방문했던 여인들이 두려워하여 황망히 도망치는 광경으로 끝을 맺는 8절에서 끝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나머지 부분(9-20절)은 주후 2세기경에 이르러 몇몇 복음서 사본 필사자들이 다른 복음서 저자들이 말하고 있는 내용의 일부분을 첨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첨부한 이유는 처음의 마가복음이 8절에서 이상하게 끝나고 있는 것을 어쩔 줄 몰라 했기 때문입니다.
결말이 있는 이야기에 친숙한 우리들
모든 이야기들은 그 나름대로 결말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 어느 여인이 암에 걸렸습니다. 그 여인의 이야기가 그것으로 끝나서는 궁금합니다. 결말이
있어야 하겠지요. 암 투병에서 이겼는지 아니면 쓰러졌는지?
․ 누군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결혼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 결혼이 끝까지 갔는지 아니면 중간에 이혼으로 끝났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 누군가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것으로 이야기가 끝날 수는 없지요. 그가 살아 돌아왔는지
아니면 한줌의 재로 돌아왔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이처럼 모든 삶의 이야기에는 결말이
있어야 합니다. 결말이 있어야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런 식으로 결말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상하게 끝을 맺습니다. 이렇게 끝을 맺는 이유는 “끝이 끝이 아니다”라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천사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는 이곳에 계시지 않는다.…” “그러자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였다”는 것입니다. 원문의 뜻을 그대로 살리자면 “공포(terror)와 놀람(amazement)이 그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무덤에서 도망 나왔다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놀람
우리가 부활절을 축하하면서도 종종 잊기 쉬운 요소가 이 부분(“놀람과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부활절이 탐스런 토끼와 노란 병아리, 화려한 색상의 달걀과 예쁜 옷으로 차려입은 어린 소녀들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절에 공포에 떨며 긴 드레스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며 무덤에서 도망쳐 나오는 여인들을 연상해야 합니다. 부활절은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무섭고 두려운 이야기에다 행복한 결말을 살짝 첨부로 붙여놓은 날이 아닙니다. 마가복음서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보면 부활절은 두려우면서도 놀라운 날이라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우리는 예수님을 무덤에 안장했습니다. 수의로 잘 싸서, 사망진단서를 첨부하듯이 큰 돌로 무덤 입구를 막았습니다. 죽음으로 끝장이 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무덤을 들여다보았는데 수의가 개켜있었고 무덤을 막은 돌이 옆으로 옮겨져 있었고 무덤 속에는 시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전혀 예기기 못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에 대해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끝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모르게 되었으니 그저 “놀라고 두려울”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삶이 죽음으로 끝이 난다는 것을 알면, 사람들이 하는 일은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기 전에, 즉 죽기 전에
․ 할 수 있는 경험을 다 해보는 것이거나,
․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손 안에 쥐어보는 것이거나
․ 할 수 있는 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보는 것이거나,
․ 흙으로 돌아가기 전 영웅적인 일들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우리는 삶에 대한 전혀 새로운 시각과 사명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에 대한 시각이 바뀌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천사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리보다 갈릴리에 앞서 가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부활하신 구세주를 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아니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다면 “보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구원자를 뵙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서서 갈릴리에 가 계신 부활하신 구원자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부활에 대한 오해
“부활”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어떤 분들은 부활을 생존하려는 불굴의 정신에 대한 은유용어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너는 부활할 거야!”라는 식의 생각 말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그렇게 막연한 감상적인 확신으로 축소 환원시키는 것은 무덤에 돌을 다시 굴려 덮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해, 인간의 불굴의 정신과 의지는 그렇게 신뢰할만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인상적이지도 못합니다. 언제라도 무너져 내리기 때문입니다. 역경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선다는 식으로 부활을 이해한다면 저는 빌라도처럼 이 모든 일에서 결백하다는 식으로 손을 씻겠습니다.
먼저 가서 일하는 주님을 보라!
우리는 구원자가 우리보다 먼저 “지금 여기 이곳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지금도 구원하고 계시는 주님을 말입니다.
․ 지금도 우리의 이야기들의 “끝”(종말, 비극과 죽음)을 통해 부수고 들어오시는 그분 말입니다.
부활절의 진정한 질문은 “부활이 정말로 발생했다는 것을 믿느냐?”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이 정말로 일어났었다는 것을 믿는 것은 대부분의 우리들에게는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진짜 어려운 문제는 “부활하신 이 예수를 지금 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디서 볼 수 있는가?
이 부활하신 예수를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궁금해 하시는 분이 있다면, 천사가 여러분에게 주신 말씀 속에서 힌트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셨느니라. 거기서 너희가 그를 보리라.”
예루살렘에 아니라 갈릴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선포가 시작되었던 바로 그 장소입니다. 복음의 시작과 종결을 가리키는 장소입니다. 갈릴리가 어디입니까? 갈릴리는 여인들과 제자들의 고향 마을입니다. 그들의 집이 있는 곳입니다. 특별할 것이 없는 장소입니다. 요즘 말로 일상적이고 친숙한 장소입니다. 고기 잡는 그물이 있고, 시장이 있고, 가게들이 있고, 친숙한 노인 분들과 어린 애들이 있는 곳입니다. 인생을 시작하는 결혼예식이 열리고 인생을 마감하는 장례식도 열리는 우리의 동네들입니다.
이런 곳이야 말로 부활절 이야기가 완성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에서 부활절의 이야기가 결말을 본다는 것입니까?
․ 부지런히 살고 열심히 일하고 하나님께 예배할 때 비로소 부활절 이야기는 완성을 보게 될
겁니다.
․ 부활절 이야기는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비범하고 특별한 일들을 하기 위해서 멈출 때 완성
되는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 배고픈 자를 먹이고,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 안식처와 피난처를 제공하고 죄인에게 용서가
주어질 때 부활절 이야기는 완성될 것입니다.
․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 교회 가족의 일원이 될 때, 병든 사람이 심방을 받을 때, 비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결코 죽지 않을 희망으로 위로를 받을 때 부활절 이야기는 완성될 것입니다.
․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부모자신들의 꿈을 강요하는 일을 포기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꿈들이
그들의 삶에 실현되기를 위해 기도할 때 부활절 이야기는 완성될 것입니다.
․ 사업하시는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들어가는 비용에 상관없이 옳고 정의로운 일을 하기로
결정할 때 부활절 이야기는 완성될 것입니다.
․ 사소한 일들과 이슈들에 대해 불평을 멈추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일들을 위해 우리의
에너지를 바칠 때 비로소 부활절의 이야기는 완성될 것입니다.
․ 우리의 지도자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정의로운 왕국으로 인도할 때 부활절 이야기는 완성될
것입니다.
․ 전쟁을 일삼는 나라와 국가들이 평화의 잔잔한 물가로 나올 때 부활절 이야기는 완성될
것입니다.
분명히, 이야기는 이러한 놀라운 결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놀라운 결말에 이르게 되는 것은 우리가 옳은 일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구원자께서 이 세상에서 자기의 일을 다 마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 그분은 자신이 선호하시는 방식과 길들을 통해 여러분과 저의 삶에 계속적으로 간섭하시고
끼어들어 일하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여 사도 바울과 같이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
입니다”라고 고백할 때까지 그분은 우리의 삶에 들어오셔서 일하시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셔서 너희보다 먼저 가셨느니라.” 이제 아십니까? 이제 보이십니까? 마가복음은 이야기의 완성(끝)을 여러분에게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 무덤이 구원자 예수를 붙잡아 둘 수 없었다면, 그가 다시금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 아닙니까?
․ 이것이야말로 완전 흥미대박의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 크리스천의 삶의 특징은 기대와 설렘입니다. 그분이 언제 어느 곳에 불쑥 나타나실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설레는 마음과 기대하는 심정으로 우리의 일터로, 교실로, 사무실로,
병원으로, 일상 안으로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아래 사진은 니카라구아 휴양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