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4.08 17:31
금송아지
출 32:1-6,15-20
“이스라엘아, 이것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출 32:4
금송아지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그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누굽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목격한 자들이 아닙니까? 매일 만나를 먹으면서 기적을 경험하던 자들이 아닙니까? 무엇보다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시던 하나님의 장엄한 목소리를 들었던 자들이 아닙니까? “새긴 우상들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게 들려오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게다가 그런 엄중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은 후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행하겠습니다. 우리가 순종하겠습니다.”(출 24:7)라고 힘주어 순종을 서약했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어찌된 일입니까?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친히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위해 말 못하는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제 정신입니까? 이게 군중의 광란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집단적으로 미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른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나온 후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애굽에 가서 바로에게 말하기를, ‘내 백성을 가게 하라, 그러면 그들이 이 산에서 나는 경배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단순히 바로의 노역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공동체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금송아지 사건을 통해 보니 자신들의 정체성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한참 걸어간 것입니다. 이교주의에 깊이 영향을 받았고 오랫동안 노출되었던 것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그렇게 급작스럽게 돌아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그들의 지식은 너무나 얄팍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보이는 신들을 열망하고 손에 잡을 수 있는 리더십을 바랐던 것은 자연스런 결과처럼 보입니다. 사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내 산자락에 그렇게 오랫동안 잡아 두신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하나님의 방식과 길을 배워야 했으며 성막이라는 방편을 통하여 예배하는 공동체로 자신들을 구성해야 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모세는 지금 거의 40일 동안 어디론지 가버렸습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아론은 유약하고 겁쟁이였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위해 다른 신들을 만들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우상을 수단으로 삼아 참된 하나님을 섬기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그들이 깨드린 계명은 두 번째 계명이었지 첫 번째 계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궤변입니까? 그런 변명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라는 무거운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그들을 판단할 수 있는 심판자의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습니다. 우상숭배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대한 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크리스천들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일요일에 신앙고백을 합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월요일에는 금송아지 우상을 섬깁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있어야지!”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긴단 말입니까?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을 위해 간구해 줄 중재자가 없었더라면 잃어버린 백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천만다행으로 모세는 그들의 중재자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고개를 들었습니다. 반면에 모세는 하나님의 분노로 가득한 목소리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소리쳤습니다.
새 언약의 멤버들인 우리 역시 우리의 영원한 중재자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예수의 사랑과 분노가 우리를 우상숭배에서 건지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