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02 08:32
이사야서 제 1 강 : 배경적 서론
류 호 준 목사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장
자, 오늘은 계속해서 우리가 예언자, 예언서 혹은 선지자, 선지서, 같은 말입니다. 구약성경 가운데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무슨 서(書)요? 예언서 혹은 선지서입니다. 예언서 즉 선지서. 예언자 즉 선지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등장했던 사람들이 주전 8 세기경의 예언자들입니다. 주전 8 세기의 사인방(四人幇)이 누구라고 했지요?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이렇게요.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자, 이 네 사람 중에서 북한 출신, 북한 출신이 누구라고 했지요? 북쪽에서 사역했던 사람, 누구라고 했지요? 네, 호세아지요. 그리고 그중에 남한 사람으로서 남한 출신인데 북한에 선교사로 파송된 사람은 누구라고 했지요? 네, 아모스. 아모스지요. 아모스서 1장부터 9장까지 읽어보면 아모스서에 흐르는 주제음악이 있습니다. 주제음악. 강력한 주제어가 있어요. 그 아모스 선지자의 강력한 주장을 두 단어로 이야기한다면, 무엇일까요? 그렇지요. “정의와 공의”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들 중에 하나가 무엇이다? 네, 정의롭고 공의로운 것입니다. 정의롭고 공의로워야 한다는 것이 아모스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아모스의 시대에 그 말이 왜 나왔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나요 안 했나요? 엄청 열심히 했어요. 모든 집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신앙생활을 너무 열심히 잘 했어요. 그런데 소위 일상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는 정의롭지 못하고 공의롭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사실상 교회당에서 저와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보다도 어느 예배를 더 많이 받아요? 우리가 일상 가운데서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사느냐? 이것을 목 놓아 외쳤던 분이 있었으니, 이름 하여? 네, 아모스입니다. 교회당에 갇힌 그리스도인처럼 살지 말아라! 그 뜻입니다. 교회당에 갇힌 그리스도인처럼 살지 말아라! 그 뜻입니다. 교회당에 갇힌 그리스도인처럼 살지 말고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정의롭고 공의로운 삶을 살아라! 그래서 이 아모스서의 중심 주제를 한마디로 말해주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아모스서 몇 장 몇 절요? 네, 아모스서 5장 24절, 맞습니다. 우리 집사님, 한 번 큰 소리로 외워보시겠어요? 자, 집사님, 한 번 외워보세요. 외워보겠습니다. 자, 시작!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흘릴지로다.” 네, “오직 정의를 물 같이”라고 말할 때 이 물은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즉 정의가 마르지 않는 물 같이 철철철철 흐르게 하라. 그리고 공의가 마르지 않도록 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나라에 가면 무슨 천(川)이 있다고 했어요? 네, 건기에 가면 ‘와디.’ ‘와디’가 있다고 했어요. 권사님의 기억력이 정말 대단하신데요. ‘와디’가 무엇이지요? 건기에 가면 무슨 강요? 네, ‘와디.’ 한자로 표현하면 건천(乾川). 네, 건천을 가리키지요. 마르면 바짝 바르는 강입니다. 그런 마른 가운데서도 공의라는 물이 졸졸졸졸 흐르도록 하라. 그렇다면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들어 놓은 ‘틀’입니다. 창조질서의 가장 중요한 틀이 있다면, 두 개의 틀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온 우주, 즉 사람과 사람 사이, 만물과 만물 사이에 만들어 놓은 두 개의 틀이 있다면, 그 틀이 무엇과 무엇이지요? “정의와 공의”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의와 정의라는 것은 모든 사람과의 관계, 또 하나님과의 관계, 또 이 세상과의 모든 관계가 삐뚤어지지 않고 똑바로 있는 것을 가리켜서 정의, 공의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공의와 정의의 문제가 아모스서에서 핵심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이스라엘 또는 남방 유다에 있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주여 삼창’을 부르고 십일조도 잘 내고 이런 것들을 엄청나게 잘 했어요. 그런 것들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해야 해요. 그런데 그것을 한다고 해서 우리의 삶 가운데 공의롭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한 것에 면죄부(免罪符)를 준다 안 준다? 예를 들어, 사업하시는 분들이 사업을 잘 해서 교회에 십일조를 많이 내는 것은 좋습니까 안 좋습니까? 좋지요. 그런데 그 돈을 버는 과정 자체가 무엇 하지 않으면, 정의롭거나 공의롭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헌물을 받는다 안 받는다? 안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과 즉 교회생활과 일상생활이 어떻게 되어야 해요? 네, 일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메시지로 이야기했던 선지서가 아모스서입니다.
한편, 우리가 지난번까지 두 번에 걸쳐 배웠던 호세아서, 호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는 1장에서 14장까지 있는데 앞부분에 1장에서 3장까지의 내용에서는 호 목사님의 어떤 이야기요? 네, 불행했던 이야기, 과거의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자, 그 이야기를 통해서 그 이야기가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그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누구와 누구의 관계지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다 하고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못돼먹은 고 여사를, 우리 교인 가운데 고 씨가 없지요. 있나요? 없지요. 없어서 천만다행(千萬多幸)이네요. 잘못하면 시험 들잖아요. 이런 것 저런 것 별것 다 가지고도 시험 들잖아요. 네~에. 자기 이름 불렀다고 해서 시험 들고. 뭐, 보면, 그런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그 고 여사 때문에 가정이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그 이야기는 하나님과 누구사이지요? 네, 우리 사이에. 우리가 다 누구와 같다? 네, 고멜 여사와 같다, 그 뜻입니다. 고멜 여사와 같다.
오늘 아침 설교에서도 우리가 들었지만 양쪽에서 하나만 택해야 편안하잖아요. 한 쪽으로 올인(all-in)하면 가정이 편안하잖아요. 가정이 편안하려면 한 쪽으로 올인해야지요. 다른 데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가정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에서도 신앙이 절름발이로 걷지 않으려면, 고관절(股關節)로 수술 받지 않으려면, 우리의 신앙이 일편단심(一片丹心)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정절 즉 신앙적 정절(貞節)을 지켜야 합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정절을 지키지 못한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통해서 배우는 것은 너희가 얼마나 못됐느냐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못돼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요? 끝까지 변치 않고 그 여인을 사랑하는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지요. 그렇기 때문에 부각된 것은 그 고멜 여사가 얼마나 못돼먹었느냐, 이것도 있겠지만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면, 성경은 누구의 마음 읽기라고요? 하나님 마음 읽기입니다. 성경은 거울과 같아서 아, 맞아! 이렇게 못돼먹었는데 그 고멜 여사의 이야기나 그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의 이야기로 들어야 합니까? 누구의 이야기지요? 네, 나의 이야기로 들어야 하는데, 아, 이것은 최 집사 이야기일거야, 저 누구의 이야기일거야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딱 한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하나님께서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좌우간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때, 딱 한 가지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이야기 하려고 하시는가 하고 마음을 열어놓으면, 그렇게 하다보면, 그것이 혹시라도 자신의 마음을 찌르는 이야기가 있으면, 왜 나를 쳐, 이렇게 하지 말고 어떻게 해야 하지요? 죄를 어떻게 해요? 회개하면 되지요. 맞아, 이것은 내가 잘못한 거야 하고 회개하면 되는 것이고, 그리고 나에게 힘을 주는 이야기이면, 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힘을 주시는구나 그렇게 해야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이 균형을 잡지 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신앙은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부복(仆伏)하고 엎드리는 일들. 교인들이 좋은 교인 되는 것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지요?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하고 경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개미숙제를 열심히 하면 된다 안 된다? 어떻게 해야 돼요? 네, 거미, 거미숙제를 제대로 해야 돼요. 거미숙제를 내주었으면 거미숙제를 해야 하는데 다른 것 붙잡고 아무리 해봐야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 이것이 호 목사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호(세아)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렇다면 우리의 삶 가운데 없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우리의 삶 가운데 없는 것을 삼무(三無) 육유(六有)라고 했습니다. 집에 가서 읽어보시면 세 가지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없는가? 우리에게는 ‘진실’도 없고, 우리에게는 ‘인애’(신실)도 없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 이것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오늘은 조금 건너뛰어서 이 네 명의 유명한 예언자들 가운데 세 번째. 세 번째 누구죠? 이사야. 이사야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지가 참 아름답고 멋있어요. 이사야서의 메시지,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지를 오늘 보겠습니다. 먼저, 이사야가 누구인가에 대해 조금 알아보겠습니다. 성경을 다 같이 펴시고 구약성경에 역대하(歷代下)라는 성경이 있습니다. 역대하, 생전 처음으로 역대하를 펴시는 분도 있을지도 모르는데 역대하. 역대기는 역대상하로 나뉩니다. 역대하는 690 페이지입니다. 구약성경 690 페이지를 펴보시면, 역대기(歷代記)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한국의 역사가 아니라 왜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했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그 이력서(履歷書)를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직장에 가거나 하면 제일 먼저 내는 것이 무엇이지요? 이력서를 내지요. 이력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이력. 한자로 이력(履歷)이라는 말을 보면, 이력이라는 말은 그 사람이 걸어온 발자국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이 걸어온 발자국을 보았는데 그 발자국이 똑바로 간 발자국인지 비뚤배뚤 걸어온 발자국인지 그 발자국을 보여주는 것이 이력서입니다. 역대기라는 말은 말 그대로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역사를 그냥 기록했느냐? 그것이 아니라, 한 번 따라서 해봅시다. 신앙의 역사. 신앙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지금 걷고 있잖아요.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걷고 있잖아요. 하지만 우리가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오겠지요. 언제 떠나지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에 떠나겠지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이 우리가 떠나는 날인데 그 날에 우리 가족들, 우리 친구들, 우리 동료들, 모두가 와서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장례식에 모일 거예요. 또 하관할 때 같이 가서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사람이 어떻게 걸어왔는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걸어왔을까?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아, 그 사람.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이 자신의 이력서를 죽 보면서 어떤 사람으로 자신이 기억되면 좋을 것 같습니까? 어떤 사람으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기억되면 좋겠는가? 한 문장으로 자신이 자신의 비문을 쓴다고 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비문을 쓰잖아요?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는 이런 말을 했다 하잖아요?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어.” 그렇게 썼어요. 재미있지요. 자기 자신을 두고서 뭐라고요?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어.” 이 사람은 유명한 작가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유머리스트(humorist)예요.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사람이 정말 절박한 상황에서도 무엇을 잃지 말자고요?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우물쭈물하다가 이럴 줄 알았어.” 여러분과 저의 삶에 있어서 자기의 삶의 이력을 보고 어떤 종류의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을 것 같아요? 한국의 비문들을 보면, 한국 사람들은 비문을 많이 쓰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외국에 가서 비문을 보면, 재미있는 글들이 많이 있어요. 비문들 가운데 보면, 이런 말도 있어요. “의사 김 선생님 내가 이렇게 될 줄 이야기하지 않았느냐?”는 비문도 있어요. 의사가 너 죽는다고 했는데 그대로 되었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그렇게 쓴 사람도 있고, 별별 사람 다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은 “자, 여기에 하나님의 사람이 잠들다”라고 썼어요. 다양하게 쓰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쯤 생각해 보세요. 만약 자기의 비문에 자기가 비문을 쓴다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요? “나는 담배를 수천 번 끊었다.” 이렇게 쓸거에요? 비문에 별 것 다 쓸 거예요. 이것이 무엇이라고요? 역대기. 역대기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역대기는 남의 집의 비밀스러운 것을, 비밀을 보는 듯한 모습으로 보아야 합니다. 살짝 보니까 추한 것, 더러운 것, 별별 것 다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왜 보느냐 하면 여러분과 저의 삶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들여다보신다는 것입니다. 역대기는 비문을 쓴 것입니다. 비문을 썼는데 왜 썼느냐는 것입니다. 오고 오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지금 교훈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살아왔어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역대기 혹은 연대기(Chronicle)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역대기를 쓸 때 어떻게 썼느냐? 그냥 몇 월 몇 일 하고 쓰지 않았어요. 그냥 단순히 연대기만 쓴 것은 아니에요. 1960년대 태어났다. 그리고 1970년대에 뭐가 되었다, 뭐가 되었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무슨 관점에서 썼느냐 하면 신앙의 관점에서 썼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이 사람과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걸어갔는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역사기라고요? 신앙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한 번 같이 해 볼까요? 신앙사(信仰史)! 여러분이 동 주민 센터에 가면 무엇을 떼지요? 네, 주민등록이나 호적을 뗀다고 하지요? 몇 월 몇 일. 그런데 이것은 몇 월 몇 일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았다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라는 신앙의 관점에서 기록한 신앙의 역사입니다. 이것을 줄여서 무슨 사(史)? 신앙사라고 합니다.
시간이 혹시 있으시면, 시간이 혹시라도 있으시면, 분주한 가운데서도 여기 일기(日記) 쓰시는 분 있으세요? 아, 없군요. 그러면 경건일기(敬虔日記)라도 쓰세요. 아니면, 한 달이면 한 달. 두 달이면, 두 달. 반년이면, 반년. 일 년이면, 일 년.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면서 자신이 걸어왔던 길들을 성경말씀 혹은 하나님의 빛 아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평가해 볼 수 있는 짤막한 글을 한 번 써보세요. 길게도 말고 어떻게 해요? 한 페이지 정도로 한 번 써보세요. 자기가 어떻게 걸어왔는가? 아마도 요즘 우리 교회같이 11주년이 되면서 지난 한 달 동안 저도 지난 10년을 돌아봅니다. 어떻게 걸어왔는가? 비뚤배뚤 걸어 왔는가? 똑바로 걸어왔는가? 또한 오면서 친구를 놓친 일은 없었는가? 또 왜 친구들이 떠나기도 했는가? 등등. 우리의 역대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의 역사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을 반추(反芻)하거나 씹어보지 아니하면 그런 신앙은 발전이 없습니다.
자, 그 역대기 가운데 하(下)가 있습니다. 역대기 하 가운데 26장을 보면, 26장을 보세요. 맨 위에 누구에 관한 이야기라고 나와요? 웃시야. 웃시야라고 나오지요? 이사야 선지자와 웃시야 왕은 떼려야 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이사야서를 죽 보면, 이사야서를 우리 지난 금요일에 산상기도회로 모였을 때, 제가 말씀을 했는데 이사야 하면, 떠오르는 웃시야 왕이 있는 장은 몇 장이라고 했어요? 이사야 6장. 유명한 장이니까 그것에 대한 배경을 먼저 보겠다는 것입니다. 웃시야 왕은 어떤 왕이었는가? 1절에 “유다 온 백성이 나이가 16세 된 웃시야를 세워.” 김정은보다도 더 어릴 때, 16살이 되었을 때, 웃시야를 “그의 아버지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을 삼으니 아마샤 왕이 그의 열조들의 묘실에 누운 후에” 즉 아마샤가 죽은 후에 “웃시야가 엘롯을 건축하여 유다에 돌렸더라”(2절). 3절에 “웃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몇 세예요? 16세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52년간 다스리니라”(3절). 그렇다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16 더하기 52이면, 얼마지요? 68세. 68세에 죽었어요. 옛날에 그 당시에 68세를 살았는데 오늘날로 따져보면 상당히 오래 산 것이에요. 자, 52년 동안 유다를 다스렸는데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골리아요 예루살렘 사람이었더라”(3절). 요즘 말로 말하면 서울출신이라는 거예요. 서울출신이었다. 그러니까 서울 저 효자동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사대문(四大門) 안에 있는 집안 출신이라는 것이지요. 4-5절에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있을 때는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묵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르다가 스가랴가 죽었을 때에는 웃시야가 하나님을 어떻게 해요? 잘 안 찾았다.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 다음에 나옵니다. 6절에 “웃시야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고 가드 성벽과 야브네 성벽과 아스돗 성벽을 헐고 아스돗 땅과 블레셋 사람들 가운데에 성읍들을 건축하매.” 자,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 당시 유다의 왕이 누구였어요? 웃시야였는데 웃시야 왕이 유다 주변에 적국이 있었습니다. 그 적국의 이름이? 블레셋. 블레셋(Philistines)이 있었습니다. 그 블레셋에는 도시 왕국이었습니다. 도시 왕국이라는 것은 한 도시 자체가 하나의 왕국을 이루고 있었어요. 이 블레셋이라는 이 나라는 펜타폴리스(Pentapolis)라고 해서 다섯 개의 큰 도시(都市), 큰 성(城)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섯 개의 성. 다섯 개의 성들이 모여서 무슨 나라가 되었다고요? 블레셋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고대에 있어서는 성(城)이 무척 중요했는데 그 5대성(五大城)을 일컬어서 블레셋이라고 합니다. 블레셋에 5대성이 있었는데 그 성들 중에는, 따라 하세요. 이것은 시험에 안 나오지만 여러분이 성경을 읽다보면 나올 거예요. 아스돗, 에글론, 아스글론, 가드, 가사. 자, 얼마나 기억력이 좋은가 보겠어요. 아스돗, 에글론, 아스글론, 가드, 가사. 모두 몇 개에요? 다섯 개. 다섯 개의 도시국가들이 있었습니다. 이 다섯 개의 도시국가들이 합하여서 무엇을 이루었어요? 블레셋을 이루었어요. 그리고 이 블레셋이 어디서 온 사람들이냐 하면 주로 이 사람들은 Sea-people이라고 해서 지중해 연안 저 멀리서 배를 타고 왔던 사람들이에요. 배를 타고 와서 팔레스타인(Palestine)에 정착을 했기 때문에 무시무시했던 사람들이에요. 옛날에 저 유럽북극에 있던 사람들이, 저 북쪽에, 저 북쪽에 노르웨이, 스웨덴, 그쪽에 있는 사람들을 무슨 족이라고 하지요? 잘 모르시면 힌트를 드립니다. 저기 저 서울랜드에 가면 타는 것 있지요? 네, 바이킹. 바이킹(Viking)족이라고 하지요. 바이킹족의 후예들이 어디입니까? 노르웨이, 스웨덴, 그쪽 아니에요. 바이킹족들이 한자 동맹을 맺고 남쪽으로 밀고 내려온 것이 유럽의 역사 아니에요. 그래서 거의 20년전 노르웨이의 릴리하마에서 동계올림픽을 했을 때 Open Ceremony를 보면, 북극에 있는 바이킹족들을 모티브로 삼아서 멋들어지게 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스페인의 지중해 연안을 통해서 멋들어지게 Opening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바이킹족들이 밑으로 밀고 내려오면서 게르만(German)족들과 싸우게 됩니다. 게르만족. 여러분이 서구의 역사를 보면, 오스만트루크(Osman Turk) 제국도 있고, 무슬림(Muslim)도 있고, 터키(Turkey) 제국도 있고, 또 옛날에 흉노(匈奴, Huns)족들이라고 있지요. 돌궐(突厥)족이라든가. 이런 족들. 칭기즈칸(Genghis Khan, 1162-1227)을 통해서 천하를 통일하고 이런 큰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지중해에서 해적노릇도 많이 하고 뱃사람도 하고 무기도 많이 만들어냈던 족이 무슨 족이다? 블레셋 사람들이다. 블레셋 사람들이 지중해를 거쳐서 지금 있는 이스라엘 땅을 침공해서 그 해변을 중심으로 해서 세운 도시들이 어떤 도시들이라고요? 아까 말한 다섯 개 도시. 굉장히 강했어요. 블레셋의 5대 도시국가를 펜타폴리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펜타폴리스가 그렇게 강함에도 불구하고 웃시야가 왕이 된 후로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가장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해서 그 5대도시를 모두 깨부수는 거예요. 그 깨부수는 이야기가 거기 성경에 나옵니다. 자, 6절에 보면, 웃시야가 나와서 누구와 싸움을 했고? 블레셋 사람과 싸우고. 그 다음에 무슨 성벽? 가드. 가드가 나왔지요. 가드. 또 아브네 성벽, 또 아스돗. 또 아스돗 땅과 블레셋 사람 가운데 무엇을 건축했다? 성벽들을 건축했다는 것을 보니까 다 장악을 해서 성들을 다. 그런데 이 사람이 몇 년을 통치했다고요? 52년. 7절을 읽습니다. 7-8절에 “하나님이 그를 도우사 블레셋 사람들과 구르바알에 거주하는 아라비아 사람들과 마온 사람들을 치게 하신지라. 암몬 사람들이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치매, 웃시야가 매우 강성하여 이름이” 어디까지요? 애굽(Egypt) 변방. 그러면 세계사(世界史)를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중동지역에 있는 그 조그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저 동쪽으로는, 동쪽으로는 남쪽으로는 앗시리아. 앗시리아 있지요? 앗수르라고 하지요. 저 북쪽으로는 시리아. 남쪽으로는 이집트. 이 지중해 연안의 강대국 사이에서 조그만 나라들이 다 누구에게 조공을 바쳤느냐 하면 애굽 아니면 앗수르에 바쳤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나라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런데 유일하게 조공도 바치지 않고 가장 강력한 나라를 세웠던 사람이 누구냐 하면 웃시야다. 이것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변방까지 퍼졌더라.
그 다음 9-10절에 “웃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성 모퉁이 문과 골짜기 문과 성굽이에 망대를 세워 견고하게 하고 또 광야에 망대를 세우고 물 웅덩이를 많이 파고.” 요즘 말로 해서 기간산업 즉 고속도로를 내고 물도 파고 산업을 발전시켰다는 것입니다. “고원과 평지에 가축을 많이 길렀으며”(10절). 축산업서부터 온갖. 그 당시에는 구제역은 없었던 것 같아요. 10절에 “또 여러 산과 좋은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을 두었으니 농사를” 무엇했다고요? “좋아함이었더라.” 네, 농자지천하대본(農者之天下大本)이다. 뭐 이렇게 해 가지고 그 나라를 강력하게 만든 사람이 누구다? 웃시야다. 게다가 국방력도 장난이 아니었어요. 국방력. 11절에 “웃시야에게 또 싸우는 군사가 있으니 서기관 여이엘과 병영장 마아세야가 직접 조사한 수효대로 왕의 지휘관 하나냐의 휘하에 속하여 떼를 지어 나가서 싸우는 자라. 족장의 총수가” 몇 명이라고요? 2,600 명. 2,600이라는 숫자는 무슨 뜻이에요? 다시 말해서 최소한도 연대장급 이상의 두목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13절에 “그의 휘하의 군대가” 몇 만? 30만 7,500 명이라. 생각을 해보세요. 지금 대한민국의 군인의 수가 얼마나 돼요? 약 60만 대군이라고 하지요. 전(全)세계적으로 군사가 많기로, 우리나라가 굉장히 많아요. 거기에 비하면 엄청나가 많은 숫자이지요. 대부분의 나라가 군인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보통 5만 명의 군사, 뭐 그 정도입니다.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지금으로부터 거의 2,800년 전에 그 당시 웃시야의 휘하여 군대가 몇 만이라고요? 30만 7,500 명이고 “건장하고 싸움에 능하여 왕을 도와 적을 치는 자이며, 웃시야가 그의 온 군대를 위하여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매 돌을 준비하고”(13-14절). 요즘 말로 해서 기갑사단(機甲師團)도 있고 여단(旅團)도 있고 별별 것을 다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15절에 “또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 요즘 말로 이것이 무엇입니까? 국방과학연구소. 그렇지요. 국방과학연구소에 기술자들과 과학자들을 엄청나게 많이 투입하여서 최신식 첨단의 무기를 개발하게 하고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화살과 큰 돌을 쏘고 던지게 하였으니”(15절). 자,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영화를 보면, 돌들을 쏜다는 것이 뭐에요? 새총 있지요? 마치 그 새총을 쏘듯이 새총을 엄청나게 크게 만들어서 사극을 보면 나오잖아요? 돌들을 쏘아 올리면 30m, 50m까지 날아갈 수 있는 그런 무기들을 발명을 하게 되어서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15절). 여기에 역대기를 쓰면서 웃시야가 이렇게 된 것은 하고 반복적으로 나오지요. 자, 누구의 덕분(德分)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덕분이라고 매번 나오잖아요. 앞에 5절에 나왔지요? “그가 여호와를 찾는 동안에”는 어떻게 했다고요? 형통하게 했다. 15절에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무슨 도우심?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그렇듯이 16절이 전환점입니다. 16절에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자, 16절을 한마디로 하면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웃시야에게는 무엇이 없었더라? 뵈는 게 없었더라. 그렇지요? 그때서부터 무엇이 무엇인지 뵈는 게 없는 것이지요. 자,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게 되었다. 이 말은 우리 모두가 묵상해볼 말입니다. 틀림이 없어요. 뭐가 좀 잘나거나 잘되거나 잘나가게 되면 틀림없이 무엇해질 가능성이 높다? 교만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틀림없어요. 그래요. 잘나가는 사람은 집에 돌아오지 않는 법이에요!
그랬더니 그 다음에는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16절). 이것이 무슨 말이에요?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릴 때 누가 예배를 드립니까? 제사장이 예배를 집전하잖아요. 그런데 그때부터는 안하무인(眼下無人)이에요. 자기가 이렇게 되었으니까, 내가 최고이니까 목사고 제사장이고 뭐 뵈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게 해서 자기가 이제 분향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 내가 직접 예배를 하면 되지 하면서 예배를 인도하려 합니다. 그래서 17절 보면, 17절에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용맹한 제사장 80 명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웃시야 왕 곁에 서서 그에게 이르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그랬어요. “성소에서 나가소서.” 이 정도 이야기 한다면 이 사람이 무엇을 걸고 이야기 하는 것일까요? 네, 목숨을 걸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웃시야가 최고인데.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18절). 이 말은 지금 당신이 영광을 얻기 위해서 당신이 자랑하기 위해서, 당신이 지금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내가 이 나라의 무엇이다? 내가 이 나라의 왕이다. 내가 이 나라의 통치자다. 최고다 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아니요! 라고 말을 했어요. 그래도 19절을 보면 고집을 부립니다. 19절에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무엇을 했을까요? 화를 내는 거예요. 화를. 왜 화를 냈을까요? “야, 이것들아, 니들이 뭔데 나를 막아. 내가 이 나라의 왕이거든. 뭐야” 하면서 하나님의 면전 앞에서 무엇을 해요? 화를 내고 분노했습니다. 화내고 분노했어요. 19절에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무엇이 생겼어요? 나병이 생겼어요. 여기서 말하는 질병은 일종의 피부병입니다. 이것은 현재의 나병이라고 보기보다는 일종의 피부병입니다. 현재의 나병하고는 좀 다른 피부병과 같은 것입니다. 20절에 “대제사장 아사랴와 모든 제사장이 왕의 이마에 나병이 생겼음을 보고 성전에서 급히 쫓아내고.” 부정한 사람을 성전에서 어떻게 해야 해요? 내보내야 하지요. 내보내야죠.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왕도 속히 나가니라.” 21절에 “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었고 나병환자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별궁에 살았으므로 그의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백성을 다스렸더라.”
자, 시작은 좋았으나 어떻게 되었어요? 끝이 안 좋았지요. 자, 시작은 안 좋았으나 무엇이 좋아야 해요? 그렇지요. 끝이 좋아야지요. 사실 우리가 죄인으로 시작해서 의인으로 끝나야 되는데 이것이 거꾸로 되었어요. 그러게 인생을 사는 방식 중에 가장 바보 같이 사는 사람이 있어요. 아무리 50년 동안 그렇게 잘 했어도 끝이 이렇게 되었어요.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말이 있어요. 어디에서 끊어져? 거기 줄을 치셔야 돼요.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21절).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어디에 살았다? 별궁에 살았다. 이것이야 말로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하나님의 면전에서부터 떨어져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가인(Cain)이 가서 살던 동네이지요. 가인을 알지요? 가인을 표현할 때 성경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인이 어디에서, 무엇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말하지요? 여호와의 면전에서. 여호와의 면전에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면전(面前), 하나님의 전(殿),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둠 가운데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것인데 우리의 마음들이나 우리의 생각들이 하나님과 멀어지기 시작하면 그것이 무엇이다? 가장 큰 불행이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불행이에요. 자, 여기에 별궁에서 살았데요. 별궁. 그러니까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에게 잊혀진 존재가 되고, 다음으로, 누구에게 잊혀질까요? 네, 사람들에게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따라해 볼까요? 우리는 다 곱게 늙읍시다. 어떻게 늙자고요? 네, 곱게 늙읍시다.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려고 노력을 해야지요. 보면 이 끝이 안 좋아요. 끝이.
그런데 오늘 사실상 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22절 말씀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22절 “웃시야의 남은 시종 행적은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하였더라.” 52년 동안의 웃시야에 관한 모든 시종 행적.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모든 행적 즉 웃시야의 모든 발자국은, 시종(始終)이라고 하는 것은 웃시야의 시작부터 웃시야의 마지막까지의 발자국은 누가 기록했다고요? 여기 이 아모스는 지난번에 이야기 했던 그 아모스가 아닙니다. 다른 아모스예요. 이것은 ‘아모츠’예요. 본래 히브리어로는 ‘아모츠’예요. 그런데 아모스라고 쓴 것입니다. 같은 이름이 아닙니다. 성씨는 ‘아’ 씨라는 같은 성인데 하나는 ‘모스’이고 다른 하나는 ‘모츠’예요.
자, 그것을 누가 기록했다고요? 이사야가. 그 이사야 앞에 보면 선지자라는 말이 나와요. 이사야가 선지자인데 왕궁에 왕의 역대지략이 있어요. 왕의 모든 것을 기록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누구예요? 요즘 말로 하면 대통령의 기록실장이라고 볼 수 있지요. 대통령의 기록실장이라고 한다면, 가장 최측근에서 그를 보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예요? 언제라도 왕을 만날 수 있고 왕이 가까이 부를 수 있고 왕을 가까이에서 보필하고 왕의 이야기라면 다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왕과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직책이, 직급이 높을까요 낮을까요? 엄청나게 높은 사람이에요. 우리가 뭐 우습게 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지금으로 볼 때는 장관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사야의 직업이 무엇이다? 왕실 기록 서기관이에요. 거기에서 몇 년을 살았어요? 왕과 함께 평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편 직책이 무엇이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직책은 무엇이지요? 선지자. 선지자이면서 그의 일반직장의 직급은 무척 높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이사야를 만나려면 무엇을 해야 해요? 예약을 해야 할까요 안 해도 될까요? 이사야는 미리 예약을 해도 만나기 힘든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사야 알기를 우습게 여기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사야가 웃시야의 처음서부터 마지막까지의 모든 것을 즉 사소한 것에서부터 큰일까지 다 무엇했다? 다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지금부터 우리가 배우려고 하는 누구라고요? 이사야입니다. 이러니 첫째로, 요즘 말로 해서 이사야의 스펙(spec)이 좋아요 나빠요? 스펙이 좋아요. 이 정도 취직하려면 공부를 많이 했을 것 같아요 안 했을 것 같아요? 공부를 엄청나게 많이 했지요.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지요. 또 국제정세에 대해서도 알아야지요. 요즘 대통령 비서실장과 같은 사람입니다. 엄청나게 높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이야 뭐 정가에 진출했다가도 6개월이면 잘리고 대통령 비서실장 했다고 해도 잘리는데 이사야는 몇 년 동안이에요? 평생. 이사야가 웃시야와 함께 살면서, 웃시야 대통령, 웃시야 왕의 볼 것? 그 다음에? 못 볼 것. 다 보았다는 것입니다. 볼 것 못 볼 것 다 봤다. 자, 그런 상황 가운데 살았던 사람이 누구다? 이사야다.
그런데 바로 그분이 언제 깨어졌는고 하니, 언제 자신의 세계관이 깨어졌는고 하니 누가 죽었을 때? 바로 그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관료적인 것, 자기가 알고 있던 세상. 자기가 알고 있던 세상 자체가 어떻게 돼요? 무너진 것입니다. 마치 추락하는 것은 무엇이 없듯이요? 날개가 없듯이 자기가 알고 있었던 모든 것, 모든 안전장치, 그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린 순간이 언제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6장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 왕, 자신의 삶을 바치고 자기의 삶에서 가장 중요했던 그 웃시야와 같은 그 관료적인 온건함이라는 것이 있어요. 이 이사야는 평생을 cage. cage가 뭐지요? 새장. 즉 가장 안정된 상태로 안전보호망 가운데서 살았던 사람이 누구예요? 그러나 이것이 깨어집니다. 깨어지면 정말 세계가 바뀌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얼마나 불안해요. 한번 저를 따라서 해보세요. 관료적(官僚的) 온순성(溫順性). 관료적 온순성이란 한마디로 잘 길들여진 삶이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세상, 그 종교에 잘 길들여졌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했다? 그것이 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므로 바뀌어야 한다. 관료적 온순성이라는 것은 우리 사람들 대부분에게 있습니다. 여러분과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세상이 있어요. 우리의 종교라는 틀이 있어요. 내가 믿는 신앙의 틀들이 있어요. 그 안에서 이렇게 가만히 가만가만 있으려고 해요. 변화도 별로 싫어하고. 왜? 확 뒤집어지면 자신이 뭐가 될까요? 불안하잖아요. 어찌 될지 모르니까. 그런 상황에서 잘 길들여진 것을 무엇이라고요? 관료적 온순성. 이것은 이사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어떤 종교적인 틀, 교회라고 하는 어떤 고정적인 틀, 그것을 즐기고 무엇이 나오지요? 이 사람의 고집이 나오잖아요. 걱정을 해요 안 해요? 걱정을 안 하지요. 어디에 붙어있는 한? 웃시야에게 붙어있는 한, 그 틀 가운데 붙어있는 한 그 사람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요. 그렇게 하다가 이것이 깨어지는 순간이 오지요. 그때 비로소 신앙의 야성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발견한다고요? 신앙의 야성(野性)을 발견한다고요. 야성. 야수성 말고요. 야수성(野獸性)은 물어뜯는 것이잖아요. 뭐라고요? 야성을 발견한다고요. 잘 길들여진 신앙이 아니라 이제 비로소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 높이 올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뭐라고요? 이사야서 6장의 내용입니다. 이 관료적인 온순성, 이 관료적인 안전장치가 깨어지는 그 순간에 그는 정말로 자신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이가 하나님 한분밖에 없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런 일을 경험합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변화(transformation)된 사람이 누구지요? 이사야라는 사람입니다. 그 과정들을 보면 이렇게 해서 그분이 그 이사야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보면서 그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상황을 죽 보면서 영적인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써 내려간 책이 있으니 이름 하여 무슨 책요? 이사야서라고 부르지요. 이제 아시겠지요?
오늘은 여기까지가 이사야서 서론입니다. 이러한 배경적인 내용을 보면, 그렇다면 그 다음서부터는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그 유다 백성의 내부 즉 속이 얼마나 곪아터졌는가 하는 것들을 해부도처럼 자세히 보여주는 것이 무슨 서(書)? 이사야서예요. 이사야서를 1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읽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 이것이 곪아터진 우리의 내부이구나. 예루살렘이 이렇게 썩게 되었구나. 그럴듯하게 외부에는 화장을 했는데, 겉은 멀쩡한데 회(灰)칠한 무덤처럼 아주 그럴듯한데 속을 들여다보니까 이것은 아니구나 하는 것들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이사야서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는 그렇게 끝납니다. 희망을 가지시고 잘 들어보세요. 이사야서는 1장에서 39장까지, 그리고 40-66장까지의 내용이 아주 다릅니다.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아주 대조적입니다. 앞부분은 이 속이 곪아터진 것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헤집어놓습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겉으로 볼 때는 어떠해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아주 그럴듯한데 속을 들여다보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야기가 앞부분에서는 여러 각도에서 쓰입니다. 그리고 뒷부분은 희망으로 가득한 미래를 보여주는 그런 메시지가 이사야서입니다. 우리가 몇 주 동안 이사야서를 공부할 것인데 참고서적이 있어요. 참고서적을 이미 여러분이 가졌을 것입니다. 버렸겠지만. 작년 9월 10월 11월 그리고 12월 1월 2월 6개월 동안 배포된 『매일양식』있지요? 그 『매일양식』에 이사야서 1장에서부터 66장까지의 내용을 제가 다 썼어요. 그것을 집에 가셔서 자세히 읽어보시면 됩니다. 버리신 분들은 다시 그것을 찾아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출판사에서 그것을 다시 책으로 좀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저에게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그 내용을 교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여러분이 큰 그림을 보시고 이사야서의 outline을 보시게 되면 이 이사야서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성서교실이 http://www.rbc2020.kr 로 리뉴얼하여 이전합니다. | 류호준 | 2020.08.24 | 3699 |
1003 | Clean Joke: "하나님도 슬라이스를 내시는군요." [8] | 류호준 | 2013.04.03 | 3197 |
1002 |
교수님! 기도부탁드립니다.
![]() | 서동진 | 2013.04.02 | 1 |
1001 | 못난 제자 인사드립니다. [1] | 장명진 | 2013.03.28 | 2800 |
1000 |
교수님! 서동진 인사드립니다.
![]() | 류호준 | 2013.03.27 | 1 |
999 | "이런 사람 어디 있나요?" [3] | 류호준 | 2013.03.23 | 2519 |
998 |
존경하는 교수님
[1] ![]() | 김기영 | 2013.03.16 | 1 |
997 | 샬롬~ 교수님 반갑습니다. [1] | 코헬레트 | 2013.03.09 | 2681 |
996 |
하사 서동진 인사드립니다.
[6] ![]() | 서동진 | 2013.03.05 | 7 |
995 |
왔다 갑니다.
[10] ![]() | 성훈 | 2013.03.02 | 10 |
994 | 인사드립니다. ^^ [2] | 그사랑 | 2013.03.02 | 2407 |
993 | 교수님, 여기서.. [1] | 김보숙 | 2013.03.01 | 2198 |
992 |
이종석 드림: 류 박사님 녹취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서요
![]() | 이종석 | 2013.02.02 | 3070 |
» | 이사야서 제1강 : 배경적 서론(녹취록, 이종석) | 관리자 | 2013.02.02 | 3423 |
990 | 호세아서 제2강 : 호세아 4-14장 | 관리자 | 2013.02.02 | 3584 |
989 | 양창삼의 [달의 유래] | 류호준 | 2012.12.29 | 2732 |
988 | 나의 자리~ [1] | 대한민국정보 | 2012.12.27 | 2243 |
987 | 교수님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답니다. ^^ [1] | 박애란 | 2012.12.25 | 2669 |
986 | [Clean Joke: 혼란스런 성정체성] | 류호준 | 2012.12.07 | 2840 |
985 | [Clean Joke]: "문안 유감" | 류호준 | 2012.12.07 | 2742 |
984 |
"대학살과 은혜의 사면"(류호준)
![]() | 류호준 | 2012.11.23 | 287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