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호세아서 제2강 : 호세아 4-14장

2013.02.02 08:30

관리자 조회 수:3584

호세아서 제 2 강 : 호세아 4-14장

류호준 목사와 함께 하는 무지개 열린 신학강좌

(2012 02 12 오후 2시)

 

 

우리가 지금 주일 오후 시간에는 구약성경 가운데서 예언서에 대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복습을 좀 하겠습니다. 교육은 반복이기 때문에, 신앙은 반복적으로 교육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언자(預言者)라고 했습니다. 예언자라고 할 때 예언자의 ‘예’자는 무슨 ‘예’자라고 했지요? ‘맡길’ 예(預). ‘미리’ 예(豫)자라고 했지요? 아니요. ‘맡길’ 예(預)자라고 했지요. 즉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말씀을 남김없이 유감없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예언자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의 예언자들은 우리 신약 시대에 사실상 특별히 설교자들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설교자들로서 강단에 설 때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그럴 때마다 꼭 명심해야 할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하고 싶은 소리를 해야 하지요? 그렇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들이 무엇인가 그것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사람인지라 때때로 이런 일 저런 일들을 만날 때마다 목회자들이, 설교자들이 처한 그 위험한 일 가운데 하나가 강단을 삼아서 자기의 감정이나 자기의 이야기나 자기의 생각들을 말하고 싶어 하는 유혹이 많이 있습니다. 설교자가 어떤 일로 기분이 나쁘다. 그 기분 나쁜 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일을 이렇게 했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말했으면 좋겠고 하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언자들은 맡겨준 말씀을 전했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알고 내가 이해하는 것보다도 누가 더 잘 알지요? 하나님께서 더 잘 안다는 확신이 없으면 가짜 선지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할 때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 우리를 향해서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는가 하고 귀담아 듣는 연습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생활 가운데 여러분과 저의 삶에서의 경건생활, 경건생활이라는 것이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 가운데 경건생활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귀담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다 저것이다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실까하고 경청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그런데 이 듣는 것도 고도의 기술과 훈련이 필요하지요. 덮어놓고 들어서는 안 되고 저것이 무슨 이야기인가하고 귀담아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이제 성경을 읽어가면서 해야 할 첫 번째 임무이기도 합니다.

 

자, 주전 8세기에, 주전 8세기에 대표적인 예언자 네 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누가 있다고 했지요? 아모스, 호세야, 미가, 이사야. 여기서 학벌이 가장 좋고 스펙이 좋고 왕궁출신이고 서울출신인 사람. 누가 있지요? 이사야. 이사야 선지자입니다. 이사야. 그런데 공부를 많이 했는데도 하나님께서 저 시골에 가서 목회하라고 한 사람이 있습니다. 저 시골, 시골에 가서 목회하라고 한 사람이 있습니다. 시골에 가서 어려움 가운데 목회를 하면서 농부들과 함께 살면서 이 농부들이, 소작농들이 소작농으로서 지주들의 학대를 받는 것을 보고 너무 화가 난 사람. 그런 가운데서 사역했던 사람. 시골에서 목회했던 분이 누구지요? 미가입니다. 미가 맞습니다. 그런데 네 사람 가운데서 직업이 가장 빵빵했던 사람, 누구지요? 아모스. 아모스는 직업이 두 개였습니다. 하나는? 목축업. 목축업을 했고. 또 하나는? 염색 가공업을 했지요. 염색 가공업은 주로 그 뽕나무 있지요. 그 뽕나무를 가공해서 염색 가공업을 해서 괜찮게 살았던 사람이 아모스였습니다. 자, 이 네 사람 중에서 소위 말해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은 누구였지요? 호세야, 네, 호세야였지요. 지난 시간에 호세야, 네, 이 호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이제 이 호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호세아서를 보시면, 1장부터 3장까지의 내용은 이야기체로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호세야 선지자의 자서전적 이야기, 즉 자기의 스토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자신의 슬픈 이야기를 써내려간다는 것이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그렇지요. 어렵습니다. 우리는 다 우리의 생각들을 잘 표현하거나 멋있게 써 내려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게 되면 각 스토리마다 어두운 그림자가 내린 이야기가 더 많습니다. 다윗을 언뜻 생각하시면 다윗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멋있는 왕이냐에 대해 글을 쓰지 아니하고 그것보다는 그가 도망 다녔던 이야기, 그가 아주 못된 마음을 품었던 이야기, 죄를 지었던 이야기. 또 가정이 평안했어요, 안 평안했어요? 평안하지 않았지요. 자기 자식이 어떻게 해요? 압살롬이 자기 아버지를 향해 대들었던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아들이 아버지에게 대들고 왕궁을 나누고 국민들의 마음을 자기가 미혹할 때에라도 그래도 이 자식이 누구의 아들입니까? 다윗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그 아버지 군대하고 압살롬의 군대하고 마지막 전쟁을 하게 될 때 아버지가 무엇이라고 할까요? 자, 저 적군의 제일 두목이 누구지요? 압살롬이니 그 아들을 잡아 죽여라 라고 했지요? 아니지요. 내 아들은 절대로 죽이지 말아라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누가 죽였어요? 자기의 부하 장군이 죽였지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런 일들을 보면 위대한 인물들을 보면 밝은 면을 성경에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순종에 대한 이야기보다도 실패에 관한 이야기,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 슬픈 이야기, 깨어진 이야기. 그런 이야기가 곧 누구의 이야기라고요? 우리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우리가 들으면서 결국 우리의 이야기로 듣는 것이고.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런 깨어지고 일그러진 삶 가운데서 어떻게 자기의 일을 끝까지 이루어 가시는가 하는 것을 귀담아 듣는 것이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읽는 방식 중에 하나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 호세아서 1장에서 3장까지를 보면 호세아의 자서전적인 이야기입니다. 자, 우리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보, 집으로 돌아갑시다.” 제가 아모스서 주석을 거의 500 페이지 정도 썼어요. 호세아서 주석을 써 놓았어요. 호세아서도 해설서를 다 써놓았어요. 언제 써놓았는가 하면 10년 전에 다 써놓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겠지요? 그렇지요. 출판을 해야겠지요. 네, 출판을 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출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도대체 언제 그 책을 출판하실 것입니까 묻습니다. 그러면 항상 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까지 우리 마누라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 마누라가 집에 돌아와야 출간을 하지라고 대답합니다. 자, 여기 호세아서에서 “여보, 집으로 돌아갑시다”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해서 애걸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하나님께서 애걸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항상 강하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우리 앞에 무릎을 꿇고 사정하듯이 애걸하듯이 제발, 제발, 어디로 가자고요? 제발,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찬송가 가운데 제가 좋아하는 찬송이 있는데 그것은 Jesus is calling입니다. Jesus us calling softly and tenderly Jesus is calling, Jesus is calling for you and me. 부드럽고도 달콤하게. 어떻게? 잔잔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softly and tenderly. 부드럽고 아주 연하게. Jesus is calling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Jesus is calling for you and me. 여러분과 나를 부르십니다. 이 찬송가가 무엇이지요?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제가 전에 한 번 이야기를 했는데, 영화 가운데 Trip to the Bountiful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가 전에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보여주고 싶은데 보여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막이 없어요. 영어로만 되어 있기 때문에 보여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누가 자막을 다 만들어 가지고 이 영화를 보여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제목이 Trip to the Bountiful, 말 그대로 bountiful이라는 것은 ‘풍요’라는 말입니다. Bountiful이라는 도시가 있는데 옛날 옛날에 어느 할머니가 살았던 동네의 이름이 ‘풍요’라는 마을입니다. 풍요. 그 마을을 찾아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할머니가 며느리하고 아들하고 사는데 그 며느리가 조금 못된 며느리에요. 얼마나 못된 며느리인지. 이 할머니는 항상 심장이 두근두근거립니다. 이 할머니는 항상 아침에 일어나서 찬송을 불러요. 그 찬송가를 부르면 며느리가 시끄럽다고 합니다. 며느리가 내가 어제 밤늦게 일을 했는데 시끄럽게 해서 잠도 못 잔다고 막 야단을 쳐요. 내가 이렇게 살 수는 없다. 그래서 내 고향으로 가야지. 그 고향 이름이 Bountiful입니다. 그래서 나라에서 나오는 연금이 어느날 오는데 그 연금이 오는 날을 기다렸다가 우체부가 그 연금 수표를 주면 받으려고 기다랍니다. 그런데 며느리가 그 연금마저 빼앗습니다. 그래서 그 연금을 받아서 길을 나섭니다. 어렸을 때 살던 그 추억의 고향 Bountiful을 향해서 갑니다. 그런데 나가서 돈이 없으니까 기차를 타려고 수표를 좀 바꿔달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아무래도 이 노인네가 좀 이상하다고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저렇게 해서 결국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돈을 얻어가지고 기차를 타고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역장에게 Bountiful까지 가는데 얼마입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역장이 할머니에게 그런 역은 없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아니, 거기는 내가 살던 곳인데 없다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동네가 없어진 것입니다. 어쨌든 그 Bountiful 앞에, 또는 뒤에 있는 역까지 갔습니다. 그 영화의 전체 스토리가 결국 마음 속에 있는 그리운 고향,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Bountiful을 찾아가는 이야기인데 그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이 흐르는데 그 배경음악의 피아노 소리가 방금 전에 부른 Jesus is calling입니다. 아주 다양한 음악으로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부르는 소리, 부르는 소리.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찾아가 봤더니 무엇이 있었을까요? 찾아가 봤더니 폐허만 남아있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기다렸던 곳. 그런데 거기까지 누가 찾아오는가 하면 그 아들이 찾아옵니다. 실종신고를 해서 텍사스 그곳까지 찾아옵니다. 할머니가 거기까지 가는 도중에 버스를 타고 가다가 그 버스 안에서 거기서 젊은 여자를 만납니다. 그 젊은 새댁 옆에 앉게 됩니다. 그 할머니는 하나님의 말씀을 흥얼흥얼거리고 찬송을 부릅니다. 옆을 보니까 옆에 앉은 새댁이 안색이 안 좋아요. 그런데 이 할머니가 무엇을 부르고 있는가 하면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를 부릅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후렴이 멋있잖아요. 후렴이 This is my story, this is my song. 이것은 나의 노래요, 나의 찬송이다. This is my story하고 쫙 불러요. 옆에 있는 새댁이 이 할머니를 보니까 어디를 나가는 것 같은데 무엇이 그렇게 나의 이야기인가 궁금했어요. 이 할머니가 평소에 좋아했던 시편을 들려줍니다. 주님은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힘이시요. 그런데 새댁은 왜 그래? 하고 묻습니다. 아, 우리 남편이 저 멀리 전쟁터에 나갔는데요. 지금 소식이 어떻게 오는지 가는지도 모르는 가운데 제가 너무 불안해서 지금 내가 친정집에 가는데. 결국 자신이 살던 집이 있는 곳에 왔어요. 폐허가 된 집에서 산책을 합니다. 바로 그때에 아들하고 며느리가 잡으러 온 거예요. 그 황폐된 넓은 들판에 보라색 꽃이, 이름을 잘 모르겠는데 그 보라색 꽃이 활짝 피어 있어요. 저 멀리서 보안관들도 오고 경찰서장도 오고 자기 아들하고 며느리가 도착합니다. 가자고 합니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동물처럼 끌려갑니다. 그러면서 음악이 다시 나옵니다. softly and tenderly Jesus is calling. 부드럽고 자비롭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그 음성을 듣고 그 평야를 넘어 죽 가는데 황혼녘에서 끝나요. 그 영화의 이름이 Trip to the Bountiful이에요. 어디로 가는 여정이라고요? 풍요로 가는 여정. You can not go home. 당신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이 음악을 통해서, 찬송을 통해서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다양한 음악을 통해서 다양한 mention을 통해서 그 음악을 들을 때에 생각나는 것은 아,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고향을 떠나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통해서 어디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요?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태어나서 자란 고향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고향이 있지요. 우리가 본래 속해야 하는 고향, 어디엔가 있어야 하는 그 집에 대한 그리움. 그 그리움을 전해 주는 찬송이 softly and tenderly Jesus is calling입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부르고 있는 음성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호세아서에서 보면 호세아서의 마지막 종착이 이 스토리 가운데 마지막 종점이 자기 부인을 찾아가서 여보, 어디로 가자? 집으로 돌아갑시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집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가 오늘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반복적으로 집에 오는 연습이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죠.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온다는 그리움으로 사는 것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이 사방에서 공중에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부르시는 음성. 자, 돌아가야 하는 그 집, 그 집이 고멜 여사에게 있어서는 어떤 집인가? 네 자녀가 있는 곳입니다. 첫째로는 아들이요, 둘째로는 딸이요, 셋째로는 딸이요, 넷째로는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무엇이죠? 이스르엘. 그 이름의 뜻은 무엇이죠? ‘하나님이 흩으신다.’ 둘째 딸의 이름은 무엇이죠? 로-루하마. 본래는 성이 어떻게 돼요? 본래는 호-루하마지요. 그 이름의 뜻은 무엇이죠? ‘긍휼을 받지 못하는 계집애.’ 셋째도 아들인데 이름은 로-암미, ‘내 백성이 아닌 녀석.’ 결국 이 자식들의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호세아서 1-3장에서 살펴보았던 호세아의 자서전적 이야기입니다. 다른 예언서들, 다른 선지서들과는 달리 이 호세아서에는 맨 앞에 스토리가 나와요. 이 스토리를 통해서 결국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관계를, 즉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호세아 목사님의 불행한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려주고 있고 알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4-14장의 내용 가운데서 직접적으로 메시지가 나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성경 한 절을 펴보겠습니다. 자, 성경 호세아서 4:1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이것이 설교지요? 예언자가 여러분과 저에게 설교를 하는 설교문이라고 전에 말씀 드렸습니다. 이제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을 해서 읽어보겠습니다. 무엇이라고 했으면 좋을까요? “무지개 교인들아” 이렇게 하겠습니다. “무지개 교인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여기서 우리가 두 가지만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이 땅의 주민들과 무엇 한다? 논쟁한다. 논쟁이라는 말이 있지요. 이 논쟁이라는 말은 전문적인 용어로 법정에다가 고발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법정에다 고발한다. 그래서 이런 말을 썼어요. 이스라엘을 향한 메시지가 4-14장까지 인데 제일 먼저 이스라엘을 어디에다 세운다? 법정에다 세워서 고발하는 것입니다. 법정에다 세워서 고발한 것이 그 고발한 내용이 있어요. 논쟁한다는 말은 전문적인 용어로 법정에다 세워서 법정에 고발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고발한다면 누가 검사일까요? 누가 검사노릇을 하지요? 여기 보면 예언자가 검사노릇을 하지요. 예언자가 검사노릇을 하고. 그렇다면 피고는 누구입니까? 피고는 이스라엘 자손들이지요.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사람들을 피고로 세우고 검사는 예언자고 그리고 판사는 누구일까요? 하나님이겠지요. 그렇지요. 하나님하고 예언자가 판사와 검사 일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법정에 세우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고발 내용을 보겠습니다. 고발 내용. 고발 내용은 두 가지가 있데요. 삼무(三無)가 있고 육유(六有)가 있습니다. 삼무, 즉 세 가지가 없으면 고발을 당한다. 첫 번째로, 진실. 두 번째로, 인애. 세 번째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 여기 있는 단어들이 어렵기 때문에 먼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 또는 오늘날 백성들이 고발하고 고소하고 항변을 하느냐? 여기서 세 가지가 없다는 것이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고발당하는 이유들입니다. 첫째로는 진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실. 이 진실이라는 말을 보시면 이렇게 썼습니다. 히브리어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에메트. 진실이라는 말인데 보통 이 에메트라는 단어를 신약성경에서는 무엇으로 번역하는가 하면 진리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진리로. 진리라고 하는 말은 번역으로 좋은 말이 아닙니다.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백성의 삶 속에 참이라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참. 그 참의 반대말은 무엇이지요? 거짓이지요. 거짓이 있다는 것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 그런 뜻입니다. 진실하다는 말은 믿음직스럽다, 믿음직스럽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가운데 믿을 만한 요소들이 너무 많다는 뜻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누구와 누구 사이 즉 사람과 사람 사이, 인격과 인격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사람이 가슴이 제일 아플 때가 언제지요? 배신당할 때입니다. 배신당할 때. 믿었던 사람한테 등을 돌린다거나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당할 때, 그때가 가장 상처가 깊지요. 아예 믿지 못할 사람한테는 관계없어요. 나와 십년에 한 번 만났던 사람, 그 사람이 배신을 했다고 해도 별로 문제가 안 되는데 예를 들어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 의해서 배신당했을 때 상처가 깊습니다. 여기 진실이라는 말이 반대로 믿음직스럽지 못할 때 그럴 때, 혹은 거짓될 때. 자, 여기 벽이 있어요. 이 벽이 단단할 줄 알고 제가 그 벽에 기대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유능한 건축업자가 여기에다가 종이로 벽을 아주 완벽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 피곤해서 그 벽에 기대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지요? 네, 넘어지지요. 그것을 갖다가 성경에서 거짓이라고 말하는데 거짓이라는 말과 믿음직하지 못하다는 말, 그리고 신뢰하지 못하다라는 말. 그래서 그 단어를 예레미야서에서는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우상이라는 말의 본래의 뜻은 무엇이지요? 믿을만한 것이 안 된다. 신뢰할만한 것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성경에서는 그 믿음직하지 못한 것이 모두 마귀 즉 사탄이다. 누가 역할 면에서 마귀냐 사탄의 새끼들이냐 하면 마귀의 자식들의 특성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 없다고요? 진실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직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늘 변하는 것.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도덕적인 성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품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진실이었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덕(德) 즉 virtue가 있다면 무엇이라고요? 진실성입니다. 진실성은 변할까요, 안 변할까요? 진실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지요. 마치 결혼을 하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함께 살기로 작정을 하고 나서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약속을 했으면 그 약속을 간직하는 것, 이것을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하지요? 진실이라고 합니다. 마치 하나님과 약정을 맺었으면 그 약정에 관해서 끝까지 가는 것, 그것을 진실이라고 합니다.

 

자, 두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없는 것이 있었어요. 그것이 무엇이지요? 인애. 인애라고 했는데 이 인애라는 번역이 좀 그래요. 히브리어를 써놓았어요. 무엇이지요? 헤세드. 헤세드라는 말은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돌보는 마음. 세월이 가고 시간이 가고. 세월이 간다고 하면 좋은 일, 나쁜 일 다 있을 수 있어요, 없어요? 네, 다 있지요. 좋은 일이 있고 나쁜 일이 있고 해도 시간이 흐름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그 상대방에 대해서 약속을 지키고 그를 돌보는 것을 가리켜서 친절이라고 합니다. 그 친절을 가리켜서 무엇이라고 한다고요? 헤세드.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성품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품. 그래서 이 성품을 영어로, 한국말로 인애라고 했는데 어질 인자에 사랑 애자라고 했는데 지금 제가 설명해 드린 것처럼 무엇이라고요?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고 한결 같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영어에서 unfailing love라고 합니다. 실패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하지요. 실패하지 않는 사랑. steadfast love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지요? 네, 견고한 사랑. 단단하다는 것은 무엇이 공격해 온다고 해도 변치 않고, 변치 않고 끝까지 가는 것.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사회에 결핍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즉 진실과 인애, 에메트와 헤세드는 짝꿍 단어입니다. 다 같이 한 번 해보겠어요. 짝꿍 단어. 숟가락 그러면? 젓가락. 젓가락 그러면? 숟가락. 이것들이 항상 같이 가는 것처럼 성경에서도 에메트가 나오면 무엇이 나와요? 헤세드가 나오고 헤세드가 나오면 무엇이 나와요? 에메트가 나오고. 진실과 인애, 인애와 진실은 항상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의 성품. 우리가 그리스도인을 볼 때, 이분은 진실해. 또 무엇해요? 이분은 성실해. 이 인애라는 말은 성실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성품들은 누구의 성품이에요? 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성품은 진실해. 하나님의 성품은 신실해. 우리는 이 에메트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헤세드를 떠올려요. 하나님은 어떤 분? 진실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분이다. 우리를 결코 속이지 않는 분이시다. 비록 사람은 우리를 속여도 그분은 절대로 우리를 속이는 분이 아니다. 또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신다? 끝까지 사랑하신다. 히브리어로는? 헤세드.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의 성품이라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언약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세 번째로 보겠습니다. 그들에게 또 무엇이 없을까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했는데 영어로 무엇이라고 썼는지 누가 읽어보시겠어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러면 보통 knowledge of God이라고 하는데 제가 knowledge라고 하지 않고 acknowledgement of God이라고 썼어요. 자, 하나님을 안다는 것.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고 표현하잖아요? 자, 이제 마지막으로 갑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많아야 합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렇다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 교회에 나오면 정말 하나님을 많이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죽음에 이른다는 뜻이에요. 호세아서를 1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보면 하나님을 알아라, 하나님을 알아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는 말이 얼마나 나오는가? 호 2:20을 누가 먼저 찾은 분이 빨리 읽어주세요.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이 마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가들듯이 결혼을 하는데 하나님의 지참금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결혼하시는데 가져가는 결혼 지참금. 진실 맞지요. 열쇠 세 개 가져가고 자동차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결혼을 할 때 결혼 담보물로 가져가는 것이 무엇이다? 진실. 진실 하나밖에 없어요. 진실함으로 네가 장가를 갈 것이니 그러므로 너는 진심으로 무엇 하라? 여호와를 알라. 하나님을 안다는 말을 써요. 안다는 것은 지식인데 그것이 무엇일까? 호 4:6을 누가 읽어 보세요. 이 백성은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고 했어요. 호 4:6을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데요. 신지식이 없어서 망한다, 일반적으로. 호 5:4을 누가 읽어 보세요.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하나님이 부르면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는데 Jesus is calling. 하나님이 부르면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갈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다. 그렇게 본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무식하면 돼요, 안 돼요? 안 됩니다. 덮어놓고 믿어서는 돼요? 절대로 안 됩니다. 덮어놓고 믿거나 무식하게 믿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믿어라. 그것입니다. 호 6:3을 보겠습니다. 자, 시작.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그러므로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여기 무척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어떻게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힘써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자. 그 다음 말이 더 멋있어요. 그의 나타나심은 무엇과 같다. 새벽빛과 같다. 네, 여명이와 같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여명과 같이 어김이 없다. 여러분,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새벽 여명이 밝아왔지요? 어저께도 왔고 그저께도 왔지요. 새벽녘이 일정하게 정규적으로 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어떻게요? 변덕스럽지 않다는 그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방식이 변덕스럽다, 아니다? 아니다. 일정하고 정규적이다. 그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무엇하자? 알자. 안다는 말이 호세아서에 몇 번 나왔지요? 다섯 번 나왔습니다. 호세아서의 가장 핵심적인 말이 무엇이다. 여호와를 알자.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공부를 많이 안 해서 하나님을 몰랐을까요? 신학교가 있는데 신학교에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신론입니다. 신학교에 가면 배우는 것이 아주 많은데 신학교에 가면 3년 동안 많은 것을 배우는데 그중에 조직신학이 있습니다. 조직신학은 조폭들이 배우는 신학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신학을 배운다는 것인데 조직신학 안에 이런 것들이 있어요. 서론도 있고 신론도 있고 인간론도 있고 기독론도 있고 구원론도 있고 교회론도 있고 종말론도 있고, 이것저것 다 배우는 것에요. 제일 먼저 무엇을 배운다고 했지요? 서론.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가? 그 다음엔 무엇을 배운다고요? 신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 다음엔 무엇을 배운다고요? 인간론. 사람은 누구인가? 그 다음엔 무엇을 배운다고요? 기독론. 예수가 누구신가? 그 다음엔 구원론이 있어요.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받는가? 교회론도 있어요. 교회란 무엇인가? 종말론. 마지막엔 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개인적으로 개인의 종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것들을 배우는 것이 무엇이라고요? 조직신학. 조직신학입니다. 조직신학 가운데 하나님에 관해서 배우는 분야가 무엇이라고 했어요? 신론. 그렇다면 신론을 안 배웠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를까요?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교회를 얼마나 많이 다녔겠어요? 열심히 교회당에 다니고, 열심히 신학교에 가서 배우고. 신학교가 그렇게 많은데도 너희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렇다면 신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하면 신학이란 무슨 뜻이지요? 신학이란 신에 대한 학문이라는 뜻이지요. 신학은 어디에서 배우나요? 신학교에서 배운다고 하면 큰 오산입니다. 어디서 배우지요? 지금 여러분이 여기서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한자로 신학을 하나님 신자에 배울 학자를 썼어요. 영어로 신학을 theology라고 하는데 theos와 logos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그런 뜻입니다. 신학에 대해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74)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는 로마 가톨릭에서 가장 존경받는 신학자입니다. 이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사람이 신학에 대해서 멋들어지게 말했습니다. 라틴어를 빼버렸는데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신학이란 하나님에 의해 가르쳐지고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고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이것이 신학이라고 했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에 의해 가르쳐진다는 것은 누가 가르친다는 의미이지요? 네, 하나님이 가르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의 본질은 하나님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첫 번째 구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리고 다음에 무엇이 나오지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하고 나오지요. 그러므로 신학과 신앙의 본질은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무엇한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신학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보면 듣는 일과 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하면 무엇해야 해요? 들어야지요. 특히 교회에서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요? 잘 들어야 해요. 이 일에 실패했던 사람이 누군가 하니 바로 마르다였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 알지요? 예수님이 어느 날 그 집을 방문하셨을 때, 즉 심방 가셨을 때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이분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서 아주 부지런을 떨었지요. 주방에 들어가서 음식을 장만하고 청소도 하고 요란을 떨었어요. 좋은 일이에요, 나쁜 일이에요? 좋은 일이지요. 절대로 그것은 좋은 일이지 나쁜 일이 아니에요.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둘째 동생인 마리아는 무엇을 했어요? 마리아는 예수님이 말씀을 하실 때 맨 앞에 나와서 아이들 말로 어떻게? 턱 받치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 꼴을 누가 못 보겠어요? 마르다가 그 꼴을 못 보겠지요. 이 철없는 것아, 지금 예수님이 오셨으니 대접해야 하고 예수님을 대접하고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데 하루 종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르다가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마르다가 마구 투덜대니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께 네가 한 일은 정말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더 좋은 일을 선택하였으니 결코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니, 우선권의 문제입니다. 무엇이 우선하는가?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을 마구 할 것인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를 듣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보는 일이 중요하지요. 왜냐하면 신학과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를 무엇 한다고요? 가르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퀴즈 나갑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그런가 하여 잘 귀를 기울였던 교회, 그 교회 이름이, 그 교인들이 누구였지요? 그렇죠. 베뢰아 교인들. 베뢰아 교인들은 어디 교인들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보다 옛날 성경에는 신사적이어서, 개역개정에는 너그러워서라고 나와 있어요. 너그러워서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니 품격이 있어서라는 뜻이에요. 그리스도인들이 누가 좀 품격이 있고 품위가 있는가? 품격이 있고 품위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 즉 잘 듣는 사람들이지요. 아, 이것이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디 출신이라고요? 베뢰아 출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자세를 보시면 먼저 귀담아 듣는 일이에요. 저것이 무슨 말씀인가? 말씀이 올 때 어떻게 해요? 이가탄 선전대로 자, 시작.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마지막이 무엇이지요? 즐기다. 마치 스테이크를 잘라서 입에 넣고 씹으면 어떻습니까? 육즙이 입안에 확 번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해요? 하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는 것이 신앙에 핵심입니다.

 

둘째로 신학이 무엇이에요? 하나님에 대해 배우는 것입니다. 신앙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누구인지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하나님이 먼저 자신에 대해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내가 이런 분이야 하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우리가 어떻게 해요? 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구나 하고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 뜻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이렇게 신학을 배우고 예배를 드리고 그렇게 하는가? 세 번째로 무엇이지요? 하나님께로 가기 위함이다. 신앙은 무엇이다? 신앙은 여정이라는 의미이지요. 신앙은 여정입니다.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단순히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지요?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바람이 부는데도 불구하고 똑바로 걷는 것입니다. 똑 바로 걷되 우아하게 걷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똑 바로 걷되 우아하게 걷는 것, 그것이 제자도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따라서 사는 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호세아서에서 저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하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들에게 신학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신학이 무엇인가? 신학이란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르치는 것을 귀담아 듣고 그 다음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신가? 하나님의 마음이 지금 세모난가? 아니면 네모난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거예요. 하나님의 그 음성이 지금 화난 음성인지, 아니면 우리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애걸복걸하시면서 얘야, 집으로 가자, 집으로 와라 하는 소리인지, 분노하는 소리인지, 하나님도 때로는 꽈배기 공장처럼 빡빡하게 꼬는 소리를 하세요. 지난번에 우리가 아모스서에서 봤지요? 많이 가봐. 많이 예배 드려봐. 많이 해. 잘 해. 이런 식으로 해요. 하나님께서 때로는 어떻게 하신다고요? 꼬기도 해요. 따라서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문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무엇을 읽을 수 없어요? 억양을 느낄 수 없지요. 톤(tone)을 느낄 수 없잖아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설교할 때에는 톤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지요. 아, 저렇게 톤이 셀 때 이것이 꼬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이것이 직설적인 이야기인지 아니면 호소하는 이야기인지를 느낄 수 있어요, 없어요? 느낄 수 있지요. 그런데 글자로 쓰여 있으면 톤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 톤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아, 여기서 하나님이 화를 내시는구나. 엄마가 무엇이라고 쓰느냐 하면 얘야, 공부 그만해라 이렇게 썼어요. 아, 지금 엄마가 공부를 그만하라고 하시는구나 하고 가방을 싸서 그만 갖다 두면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누가 필요할까요? 그래서 설교자가 필요한 것이고 목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구나.

 

결론을 맺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너희 삶 속에 세 가지가 없다. 무엇이 없다고 했어요? 진실이 없다. 그 다음엔? 인애가 없다. 인애가 무엇이라고 했어요? 성실. 성실이 없다. 그 다음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 이 지식은 단순히 머리로 배우는 지식이 아니지요? 지식이 무엇인가? 지식은 신학이라고 했습니다. 신학이 무엇인가? 신학은 먼저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것이고, 두 번째로,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고, 그 다음엔, 하나님께로 가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제일 클라이맥스다. 이것이 특별히 호세아서를 통해서, 특별히 신지식에 관해서 여러분들이 배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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