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하나님의 특별한 가족, 교회

 

 

류호준 목사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은퇴교수

 

 

5월이 오기까지

 

5월이 오기 위해 우리는 지난(至難)3월과 4월을 지나야만 했습니다. 적어도 3월 한 달 동안 전 세계적인 역병(pandemic)으로 명명된 코로나바이러스19의 창궐로 인해 국가적으로는 전대미문의 공황상태를 지나야만 했고, “자가 격리사회적 거리두기와 같은 생소한 언어들이 일상화되었습니다. 마스크 대란으로 소동을 겪었고 때론 공포를 조장하는 악성 뉴스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극한지경까지 몰고 가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 정쟁(政爭)을 일삼는 파렴치한 정치인들의 행태들도 간혹 눈에 띠었습니다. 그럼에도 방역 일선에선 질병본부 관계자들과 현장의 의료진들은 연일 피를 말리는 역병과의 싸움을 치러내야 했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의 손길도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한 달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3월 중순에 나는 앞으로 한 달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4월을 생각해 볼 뿐입니다.

 

이어지는 4월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잔인한 달로 알려진 4월에 우리는 4.15총선을 치렀습니다. 총선 전 나라 전체는 권력을 잡으려는 자들과 놓치지 않으려는 자들 간의 치열한 싸움으로 심하게 요동쳤으며 그 결과를 지금 우리는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중입니다. 이념 논쟁이 때론 가족 간, 세대 간의 언로를 막았고 분쟁과 미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지낸 한 달이었습니다. 4월의 선거판과는 달리 우리는 4.16 세월호 참사 슬픔을 다시금 되씹어야만 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의 꽃다운 소년소녀들이 사악한 어른들의 욕심과 게으름으로 인해 차디찬 바다 한가운데 무참히 수장된 비극의 사건 말입니다. 피지 못한 붉은 카네이션 꽃들이 자녀를 잃은 당사자 가족은 말할 것도 없이 자녀를 갖고 있는 수많은 부모들의 가슴 속에 파묻혀 울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4월을 보내고 5월을 맞이합니다. 가정의 달로 명명된 달입니다. 하늘은 푸르고 뭉게구름은 덧없이 창공에서 소일하고, 어린이들은 시내물가에서, 어린이 대공원에서, 동네 놀이터에서 뛰어 놉니다. 보고 있는 부모의 마음엔 따스한 사랑이 차곡차곡 쌓입니다. 추억을 만들어봅니다. 가정의 소중함을 더없이 느껴봅니다.

 

신앙공동체에서도 5월을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어린이 주일, 어머니 주일, 청소년을 위한 주일, 때론 스승의 주일로도 지킵니다. 아마 5월에 부르는 찬송 중에 가장 많이 불리는 찬송은 작곡과 작시가 모두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국산 찬송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559)가 아닌지 추측해봅니다. 가정의 달입니다.

 

 

깨진 세상에서의 가정생활

 

어느 날 나는 성경에 나온 인물들의 가정들을 떠올리며 놀랐습니다. 상당수의 가정들이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가족은 선악과 문제로 아마 심한 부부싸움이 있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이 일어난 비극적 가정이었습니다. 아담 이후 새 인류의 대표가 된 노아의 가정 역시 쉽지 않은 역경과 험한 삶을 살았습니다. 매일같이 계속되는 대규모 방주건설에 가족들과 친척들의 지속적인 후원과 헌신이 매일 보장된 것은 아니었으리라. 우리네 삶처럼 회의와 의심, 권태와 두려움 등이 가족과 친척들 간의 보이지 않는 틈새를 보여주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족장들의 삶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요? 불임의 아내와 시종 하갈 사이에 심한 다툼과 갈등은 계속되었고 그 가운데 끼었던 불쌍한 아브라함을 기억하시겠죠? 때론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기까지 했던 아브라함의 가정 말입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잦을 날이 없다는 속담처럼 두 명의 아내와 두 명의 하녀 사이에서 낳은 열세명의 자식을 둔 야곱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한참 후대로 다윗 역시 가정생활이 순탄하지 않았음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불륜, 살인, 거짓, 도주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삶 속에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한 가정이란 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욥의 가정은 어떠한가요? 한때는 부유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했으나, 삶이라는 게 언제나 그렇듯이 예기치 않은 사건들로 인해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나지 않았던가요? 막대한 재산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10명의 자녀들은 자연재해로 비명에 갔습니다. 나중에 욥은 다른 열 자녀를 얻었다 하지만 그의 가정을 할퀸 상흔은 너무도 깊었습니다. 불행했던 가정이었습니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성경 첫 장의 가르침에 따르면 피조세계는 창조주의 축복아래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good creation)라고 부릅니다. 그럼에도 창세기 3장 이후에 사는 인류, 실낙원을 경험한 이후의 모든 인류는 선한 창조 세계 안에서의 행복이라는 상황보다는 불행과 재앙아래 살게 되었습니다. 가정생활도 학교생활도 사회생활도 교회생활도 신앙생활도 별반 다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과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가정도 구속”(救贖, redemption)이 절실하게 필요한 삶의 영역이 된 것입니다. 달리말해 창조질서에서 이탈하여, 깨어지고 왜곡되고 일그러진 세상(分唐, broken world)속에서 가정과 가족이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기억해야한다는 말입니다. 구속을 기다리는 가정, 온전한 회복을 갈망하는 가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론과 가정

 

따라서 가정/가족의 의미를 기독(그리스도)론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우선 기억해야할 사실은, “가족”(family) 제도는 첫 창조질서에 속한 제도로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결혼제도와 가족(가정)은 오직 이 세상에서만 존속하기 때문입니다. 장차올 세대에선 결혼도 가족제도도 없습니다(, 마태 22:30). 아마 이 말이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충격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가르쳐주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물론 결혼생활이나 가정생활을 함부로 해도 좋다는 말로 이해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성경은 가정의 신성성과 거룩성을 아주 강조합니다. 가정을 통하여 생육과 번성이 일어납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양육을 통해 도덕적인 힘과 삶의 지혜를 공급 받습니다. 그곳에서 사랑과 존경을 배워갑니다. 십계명 전체를 요약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반복해서 듣고 연습하는 곳입니다. 무엇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전수받는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법을 배우는 신앙교육의 전당입니다.

 

요즘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교회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것도 목사님의 설교에만 의존합니다. 물론 교회를 통한 신앙교육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오죽했으면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를 신자들의 어머니라고 했겠습니까? 그럼에도 신앙은 가정에서부터 싹을 피우고 자라게 해야 합니다. 그곳에 신실한 아버지와 경건한 어머니의 무릎에서 신앙의 양식을 먹고 자라는 자녀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더 넓은 의미의 그리스도의 가족인 교회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즉 가정의 주인은 혈육의 부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즉 그분의 주되심(Lordship)을 인정하는 가정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입니다. 좀 더 신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기독론(christology)적 도태 위에 건축되는 가정만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라 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인간적 혈연에 의해 구성된 가족은 자연적 가족이며, 첫 창조질서에 속한 가족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성된 가정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만드신 새 창조 질서에 속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인의 가정들이 모인 신앙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는 것이며, 성경은 종종 그리스도의 교회를 그리스도의 가족이라 부릅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교회를 신자들의 어머니라 부르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교회, 새로운 가족

 

요한복음의 끝부분에는 예수의 십자가처형 장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19:23-37. 평행구절 마 27:32-44; 15:21-32; 23:26-43). 다른 복음서들에는 기록되지 않는 독특한 장면묘사가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는 자기의 어머니와 그가 사랑하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세요, 아들입니다!”라고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27)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신비롭고 놀라운 일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자기의 어머니를 제일 먼저 생각하였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놀랍고 기이한 일입니다. 육신의 아들로서 예수는 자신의 의무와 도리를 잊지 않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아마 육신의 아버지 요셉을 일찍이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과 함께 살았을 것입니다. 중동의 풍속에 따라 장남으로서 예수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을 것이고, 그 효심은 십자가에 달린 극한 상황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알다시피 그에게는 육신의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남겨진 어머니를 그 동생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상례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는 자기의 어머니를 자기가 극진히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이 기막힌 광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줍니까? 요한복음 전문 학자들의 연구를 빌어 말하자면, 여기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새로운 가족의 창조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새로운 공동체로서 교회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혈연적, 육체적 공동체 너머에 있는 새로운 공동체, 하나님의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눈을 돌려 마가복음 3:20-4:9를 열어보십시오. 아마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본문이리라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3:20-35절과 4:1-9절입니다. 전자는 예수께서 오해와 의심을 받으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설교하는 기사입니다. 한편 후자는 그 유명한 씨 뿌리는 사람에 관한 비유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본문은 기막히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부싯돌 두 개를 가져다가 서로 부딪혀 보십시오. 어떻게 됩니까? 불꽃(spark)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이야기 두 개를 가져다가 서로 부딪혀 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번쩍하며 새로운 조명이 섬광처럼 떠오릅니다. 마가복음 3:20-4:9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첫째 이야기(3:20-35)누가 진정한 예수의 가족인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안에는 마치 네 가지 토양을 언급하고 있는 둘째 이야기(4:1-9)씨 부리는 자의 비유에서처럼, 첫째 이야기(3:20-35) 안에는 적어도 네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째로, ‘무리들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들이 다시 모여들었다고 마가 3:20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리들이란 현대판 실리주의(實利主義)자들로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예수를 이용하려 드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의 육신의 가족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예수를 소유하고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서, 예수의 공적 행위와 태도들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있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쓸데없이 관료들과 마찰을 빚어 화를 자초한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관해 마가 3:21이 잘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섰다.” 셋째로,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온 저명한 율법 선생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바알세불에 사로잡혔다, 바알세불 귀신에 들었다,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였습니다. 넷째로, 예수의 새로운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들에 관해 34절과 35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둘레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네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이 선포되고 전파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있는 네 종류의 사람들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있을지 모르는 네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부류에 속한 사람입니까? 4번째 부류에 속하지 않고서는 여러분은 예수의 가족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통해 개인적인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 자신의 소원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사람들, 언제라도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자기중심적 사람들은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원이 될 수 없습니다. 아니면 예수의 육신적 가족들처럼, 예수를 혈과 육으로 아는 사람들, 예수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의 취임설교를 듣고서도 아니, 저 친구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어려서부터 우리는 예수가 누군지 알고 있거든!”이라 말하는 자들, 이런 사람들은 결코 예수의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아니면 예루살렘 출신의 저명한 율법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들이 알고 있는 자그만 신학적 지식으로 예수를 재단하고 판단하는 사람들도 예수의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도 이상의 세 부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위에 언급한 마가복음의 본문이 큰 소리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들은 누가 참 예수의 가족인줄 아는가?” 그렇습니다. 예수의 가족원이 되는 자격 요건을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보십시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일입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몇 장 뒤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6:29).

 

요한복음의 장면으로 돌아갑니다. 예수께서 자기 어머니에게 여인이여라고 부르시고, 자기 제자에겐 그 여인을 가리켜 너희 어머니라 말씀하신 것은 새로운 공동체로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즉 믿음의 가족, 신앙의 식구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말입니다. 이 새로운 공동체, 예수의 가족, 믿음의 식구들, 그리스도인의 가족은 이 세상에 속한 혈연적 가족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공동체입니다. 새로운 창조세계에 속한 기관입니다. 영원히 지속될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가족”(God’s Family)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다양한 인종과 가족과 민족들로부터 불러낸 무리들을 통해 영원히 함께 살 한 가족”(One Eternal Family)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식구

 

교회 공동체를 가리키는 용어가운데 믿음의 식구(食口)”가 있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아마 한국교회에서만 사용되는 독특한 용어입니다. 성경의 배경이 되는 중동사람들처럼 동양 사람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함께 먹는 일을 중요시 합니다. 누군가를 만나는 표현을 밥 한 번 같이 먹읍시다.”라고 합니다. 만나자는 표현을 밥 같이 먹자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식구란 교회공동체를 통해 함께 만나는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교회공동체는 그냥 만남과 교제에 머무르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함께 먹습니다! 식구는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cum panis)입니다. 무엇을 먹는다는 말입니까? , 하나님의 말씀을 먹습니다! 그뿐 아니라 실제로 성찬식을 통하여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규적으로 주일에 교회당에 모여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습니다. 정규적으로 성찬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십니다. 이런 방식으로 영적 단백질을 공급받습니다. 영적 근력을 만들어갑니다. 영적 면역력을 키워갑니다. 마귀의 공격에 대해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영적 건강을 강하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믿음의 식탁을 통해서입니다. 믿음의 식구들과 함께 가능한 일입니다.

 

믿음의 식구들 가운데 누구도 과식/포식하거나 편식하거나 결식하지 않도록 서로를 격려하고 배려하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요즘 교회를 둘러보면 말씀을 먹는 일에서도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드러납니다. 누구는 너무 많이 먹어서 영적 비만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다. 듣기는 많이 듣고 배우기는 많이 배우지만 실제로 운동하지 않기에 비만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영적 비만에 빠지다보니 몸놀림이 둔합니다. 이른바 영적 둔감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하나님에 대해 굳은살이 박히다.”(God Callus)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참조, 30:6). 하나님과 말씀과 신앙과 이웃에 대해 둔감해지고 심지어 아무런 감각이 없어지게 되었다는 우회적 풍자입니다. 말씀의 식탁에서 영적 편식하는 사람은 어떠한가요? 자신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듣습니다. 싫어하거나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뱉습니다.

 

어렸을 적 가정 식사 시간을 기억합니다. 어머니는 종종 어린 자녀들에게 애들아, 편식하면 안 된다. 골고루 먹어야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영적 가족 식사시간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차려주는 목사님도 성경전체에서 골고루 싱싱한 재료를 가져다가 신선하게 음식을 만들어야 하겠지만, 믿음의 식구들 역시 차려진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영양분을 제대로 섭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가정형편상 정규적으로 교회에 나올 수 없는 연약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직장 일 때문에 간호사, 환경미화원, 버스 운전기사, 의사, 일용직 근로자 - 아니면 병약하여 집이나 양로원이나 요양병원 병원에 있어야 하는 분들은 결식(缺食)하게 되어 가족식탁에서 보이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을 위해 따로 음식을 만들어 전해 줘야하지 않겠습니까? 전통적 교회(ecclesiastical church)는 누구든지 교회로 와서 먹으라고 외쳤겠지만,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결식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음식을 먹여줍니다. 그들은 영적 영양 보충과 면역력 확보와 근력 형성이 누구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한 가족원들이기 때문입니다.

 

 

잘 먹고 건강해야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사이비 종교인 신천지의 어두운 면이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곳에 기숙하며 잘못된 사상으로 세뇌당하고 있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신천지는 그들이 속한 가정을 파괴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신천지뿐 아니라 우리 시대는 다양한 방식으로 가족으로서 교회를 해체하려고 합니다. 상대주의, 다원주의, 물량주의, 성공주의, 편의주의, 향락주의, 개인주의, 해체주의, 물질주의, 이기주의 등 온갖 이교주의(paganism)의 물살이 너무 거셉니다.

 

가정에도 가훈이라는 것이 있고 가정교육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가족으로서 교회(참조, 딤전 5:1-3; 살전 2:11) 역시 하늘나라 가치를 최고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교육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신천지가 젊은이들을 어떻게 교육시켰는지를 아셨다면, 식탁공동체로서 교회 역시 밥상머리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마음에 걸립니다. “가정에서 가장은 어느 자리에 앉나요?” 대답은 가장자리요!”입니다. 웃픈 대답입니다. 이게 오늘날 예수의 가족으로서 교회의 모습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예수의 가족의 가장(家長)은 분명 성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식탁공동체로서 교회가족에 가장자리로 밀려나 앉아계신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됩니다.

 

더 이상 설교만 들으러 가는 교회가 아니라 믿음의 식구들 간의 우애를 증진하고, 서로 격려하여 - 물론 싸움하면서 자라기는 하지만 세파에 휘둘리지 않을 강한 가족 같은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신자로서 우리는 이미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과 왕으로 고백하고 서약한 자들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예수의 가족원 됨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예수의 가족입니다. 교회는 이미 예수의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족 같은 교회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끄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Christ-Driven Church). 소비자가 이끄는 교회(Consumer-Driven Church)가 되기를 거절해야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여, 희망을 가지십시다. 믿음의 주인이시요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다. 교회의 주인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여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하나님 우편 보좌로 등극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민들레.jpg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성서교실이 http://www.rbc2020.kr 로 리뉴얼하여 이전합니다. 류호준 2020.08.24 5485
공지 "무재개 성서교실은 여러분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5] 류호준 2018.03.29 3435
828 신학 에세이: “유대교를 거울삼아 한국 개신교를 들여다본다.” file 류호준 2020.08.31 2130
827 신앙 에세이: “예배에 목숨을 건다고?” file 류호준 2020.08.30 1947
826 설교문: “힘겹게 노를 저을 때.”(마가 6:45-52) file 류호준 2020.08.26 2635
825 신학 에세이: “결혼의 성경적 의미” file 류호준 2020.08.10 1716
824 신학 에세이: “십자가에 대한 오해” file 류호준 2020.08.06 424
823 신학 에세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백성의 거룩함의 의미” file 류호준 2020.08.02 585
822 신학 에세이: “창조에 관하여” file 류호준 2020.07.24 577
821 신학 에세이: “인격적 신과 몰인격적인 신” file 류호준 2020.07.24 390
820 신학 에세이: “믿음이란” file 류호준 2020.07.23 549
819 일상 에세이: “흐르는 강물처럼” file 류호준 2020.07.22 715
818 “개정증보판《아모스서》출간에 붙여” file 류호준 2020.07.20 647
817 "앉고 섬" file 류호준 2020.07.14 4139
816 신학 에세이: “성경에서 말하는 악(惡)의 포괄성” file 류호준 2020.07.08 1386
815 “하나님이 우리 곁에 안 계시는 듯한 어둠 속에 있을 때” file 류호준 2020.07.03 858
814 기도문: "나를 생각해 주십시오." file 류호준 2020.07.01 899
813 신학 에세이: “오멜을 세다” file 류호준 2020.05.17 1690
812 일상 에세이: "NIV 성경 이야기" file 류호준 2020.05.04 821
» 신학 에세이: “하나님의 특별한 가족, 교회” [1] file 류호준 2020.05.01 995
810 회고담: 인생에서 만난 '하나님 너머의 하나님’ file 류호준 2020.04.20 7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