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10 23:51
[소록도 이야기: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39년 전 6월 어느 따스하고 화려한 날 갓 결혼한 나는 젊디젊은 아내와 함께 서울서 고속버스를 타고 전남 순천으로 향했다. 어둑해진 저녁에 순천의 허름한 한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일찍이 시외버스를 타고 전남 고흥반도 끝자락까지 갔다. 녹동 항에서 다시 배를 타고 눈에 보이는 아주 가까운 섬에 도착했다. “작은 사슴들이 사는 섬”, 소록도(小鹿道)였다. 신혼여행지로 선택한 소록도는 천혜(天惠)의 아름다운 섬이었지만 동시에 천형(天刑)의 땅이기도 했다. 지금은 한센 씨 병이라 불리지만 당시만 해도 문둥병, 혹은 나병 이라 불렀던 저주스런 스티그마(stigma)를 몸과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야만 했던 슬픈 사람들의 거주지였다. 아니 격리된 추방의 외진 곳이었다.
당시 섬은 두 구역으로 나눠져 있었다. 나병을 관리하고 치료하고 보살피는 의료진들이 사는 구역과 나병 환자들이 거주하는 구역으로 나눠져 있었다. 경계가 분명했다. 사람과 사람이 아닌 사람으로 구별 짓는 경계선 말이다. 당시 소록도 중앙교회의 목사님(고 김두영 목사님)의 배려로 경계선을 통과하여 소록도 중앙교회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먼저 교회 사무실에서 장로님을 만나 신혼여행으로 그곳까지 오게 된 사정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의자에 앉기 전에 먼저 장로님과 인사차 악수를 건네게 되었다. 장로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악”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숨을 죽이고 얼떨결에 악수를 청했는데, 내미는 손을 보니 도무지 만질 수가 없었다. 손가락 두서너 개가 절단된 것처럼 보였고, 고름이 굳어진 자국이 건드리면 껍질 떨어질 듯했다. 행색이 소록도로 신혼여행을 결심한 사람인데 하면 장로님의 손을 잡았다. 참 이상했다. 그렇게 따듯할 수가. 뭔가 따스한 물에 손을 담근 듯 했다.
유월의 따사한 햇살이 교회당 창문을 타고 교회당 바닥에 내려앉는다. 인생의 첫발을 디딘 두 젊은 남녀가 경건하게 기도하기 위해 교회당 문을 열고 들어간다. 당시만 해도 교회당 바닥은 마루였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햇살에 교회당 마룻바닥이 환하게 드러나 보인다. 여기저기 고름이 굳어진 자리들, 그 위에 먼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 어느 곳 하나라도 자리 잡기에 참 힘들었다. 기도하기 위해 까치발을 들도 괜찮은 지점을 이리저리 건네 뛰듯이 방석하나 들고 앉았다. 뭐라 기도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경건하게 기도했다고 믿는다.
기도드린 후 나와 아내는 교회당을 나와 교회당 왼쪽 모서리를 돌았다. 양지바른 교회당 벽면에 할머니들이 따스한 햇살에 살갗을 데우기 삼삼오오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나가는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조금 앞으로 가니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교회당 뒤쪽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무엇인가 하고 있는 듯 했다. 아아, 장례식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관위에는 교인들 손수 만든 하얀 종이꽃으로 온통 덮였고, 관 위에 십자가 문양은 빨간색 종이꽃으로 수를 놓았다. 몸이 성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 중년과 노년의 교인들이었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지팡이를 의지해서 서 있는 분들이 의외로 많았는데, 그 장례식을 약간 거리를 두고 쳐다보고 있는 나와 아내는 말을 잃었다. 모두 흰색 옷을 입은 무리들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들의 모임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만치 찬송 소리가 들려온다. “해보다 더 밝은 저 천국~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마치 요단강 선착장에서 거룩한 무리들이 지그마한 배 한척을 미카엘 천사의 손에 맡겨 띄워 보내면서 부르는 합창이었다. 이보다 더 거룩한 순간, 신성의 임재를 느껴본 그 순간은 그 이후로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 희망을 가슴에 품고 부르는 노래, 비록 여린 어린 사슴들 같은 사람들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순백의 노래, 희망의 찬송을 부르고 있었던 셈이다.
이제 인생의 첫 걸음을 시작한 젊디젊은, 생명으로 충일한 젊은이 부부와 고단하고 굴곡진 인생을 마감하며 새로운 땅으로 떠나는 어느 이름 모를 성도, 그들에겐 생명과 죽음의 경계선이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였다. 그 유월의 어느 날은 내 인생에서 가장 애잔하고 찬란한 날이었다. 생명과 죽음이 하나라는 사실을 가르쳐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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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나와 아내는 39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했다. 그때 그 날을 기억하면서 서울서 전남 고흥반도 끝자락 까지 달렸다. 더 이상 녹동 항에서 배를 타고 들어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소록대교가 시원하게 섬을 이어주었다. 아직도 섬은 두 구역으로 나눠져 있었다. 39년 전에 소록도에서 인상적으로 내 기억 남는 이름이 있었다. “구라병원”과 “구라공원”이었다. 지금은 각각 국립 소록도 병원과 소록도 중앙공원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알다시피 구라(救癩)는 “나병에서 구원하다”는 한자어다. 이번 방문에 한센 씨 거주구역에는 들어갈 수 없게 되었는데 천만다행으로 길거리에서 소록도 중앙교회 장로님을 만나 사정을 이야기하니 중앙교회당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셨다. 경계선을 넘어 성전에 들어갔다! 39년을 복기하는 소중한 추억 여행이었다.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간만에 들어와보니 가슴 따뜻한 글이 있어 족적을 남깁니다. 저도 올해 25주년이라 어떤 이벤트를 해야하나 고민중인데 여기를 한번 다녀오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영감을 밝혀주시네요~ 감사드리고.. 늦게 나마 스승의 날 인사드립니다. 크신 가르침에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