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11 13:26
“유대인들과 예수”
로마서 8:31-9:5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2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로마서 8장의 마지막 절들과 로마서 9장의 첫 절들은 아주 이상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넘어가면서, 다시 말해 8장에서 9장으로 넘어가면서 분위기가 확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기쁨과 환희의 어조가 슬픔의 어조로 바뀌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의 마지막 절들에는 기쁨과 환호가 물씬 풍겨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 어느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다고 확신 있게 외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반면에 로마서 9장의 첫 절들에는 슬픔이 깊숙이 묻어 있습니다.
저에게 큰 근심이 있습니다.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제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원 받는 일이라면 저는 기꺼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겠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일이 있더라도 유대인들이 구원 받을 수만 있다면 저는 기꺼이 그 길을 택하겠습니다.
이 말은 그저 하기 좋은 말로 한 것이 아닙니다. 값싼 수사법도 아닙니다. 정말 가슴이 깨어지는 듯한 심경고백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 1절에서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강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구원받는 일이라면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되어도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금 로마서 8장의 후반부와 로마서 9장의 전반부가 얼마나 대조적인지를 보십시오. 로마서 8:38-39에서 바울은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로마서 9장은 이런 격정적인 절정을 갑작스레 꺾는 어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의 절정은 로마서 8장인 듯 보입니다. 8장에 사용되고 있는 고양된 언어와 문체가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의 바울의 입에서는 순수한 시어(詩語)가 쏟아져 나옵니다. 정말 아름답고 가슴 뭉클한 시라서 이 본문으로 설교하기가 망설여지는 장엄한 시입니다. 들어 보십시오.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 고난, 불행, 심적 압박, 박해와 핍박, 기근과 배고픔, 벌거벗음, 비참과
불행, 칼과 총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단
말입니까?
․ 아닙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을 힘입어 충분히 이기고도 남습니다.
․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넉넉히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는 정복자들입니다.
이 보다 더 아름다운 시가 어디 있습니까? 이 보다 더 강력하고 확신에 찬 고백이 어디 있습니까? 이 고백은 우리 속 깊은 곳에 들어있는 정서와 감정들을 흔들어 댑니다.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 울려 퍼지는 애수에 찬 확신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부분의 경험에서 볼 때, 이런 고백의 말들은
․ 장례식에서 흘리는 눈물이나 울음 보다 더 강력합니다.
․ 전쟁터의 폭탄들보다 더 강력합니다.
․ 우리가 견뎌내는 그 어떤 비극적 상실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을 증명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핵우산 밑에서 사는 사람들은 지금 이미 도래한 새로운 시 대(new age)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이미 ‘새것’이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 새로운 계명이,
․ 새 언어와 새 입술이,
․ 새 노래와 찬양이,
․ 새 피조세계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새것이 도래한 곳에는 어디든지
․ 우리를 쥐어 잡는 옛것의 통제력은 상실되었습니다.
․ 우리를 통제하고 휘어잡는 옛것의 힘은 상실되었습니다.
․ 옛 것은 사라졌고, 남아 있다 하더라도 맥도 못 추는 약한 세력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 그리스도의 영이 지금 우리를 통제하시고,
․ 우리 안에 거주하고 계시며,
․ 우리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닮아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사용하십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 하나님은 박해와 핍박을 사용하시어 그리스도를 행한 우리의 충성심을 강하게 하십니다.
․ 하나님은 기근과 배고픔을 사용해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그분에게만 의존하도록
하십니다.
․ 하나님은 위험과 칼을 사용하시어 우리가 그분을 피난처로 삼도록 하십니다.
․ 이것이 모든 것을 통하여 ‘선’(善)을 이루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자, 이렇게 우리의 유익을 위해 모든 것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계시다면,
․ 도대체 누가 무엇이 우리를 대적할 수 있단 말입니까?
․ 감히 누가 무엇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 로마서 8장의 끝입니다. 얼마나 힘차고 확신에 찬 고백이며 외침입니까?
로마서가 이렇게 완벽한 승리의 확신으로 여기서 끝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 이렇게 끝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덧붙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만일 여기에 무엇인가 덧붙인다면 그것은 김을 빼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 그런데 왜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끝을 맺지 않는 것일까요?
․ 바울은 왜 로마서 9장을 계속해서 쓰고 있는 것일까요?
․ 왜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울은 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합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양심이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으며 성령께서도 확증하시고 계십니다. 제 마음 속에는 큰 슬픔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내 민족 내 혈육과 내 친척들을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잘려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이 유대인들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많은 크리스천들이 충격을 받습니다.
․ 바울은 지금까지 집요하게 추적해 온 자신의 논증에서 스스로 빗나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 로마서 나머지 장들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에 일종의 각주와 같은 성격이
아닌가 한다는 것입니다.
․ 지금까지의 바울의 논조에서 벗어난 삼천포 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를 들어, 저명한 신약성경 번역자인 필립스(JB Phillips)와 같은 분은 로마서 9장을 바울 복음의 “향유 속에 있는 파리”와 같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그리 정당하지 못합니다. 로마서 전체를 유심히 살펴보면 오히려 로마서 9장과 10장과 11장이 바울 복음의 절정이요,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씀해야만 하는 모든 내용의 절정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로마서는 무엇에 대해 말씀하는 서신입니까? 로마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 로마서는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관한 것입니다.
․ 로마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그리고 있습니다.
․ 로마서는 유대인들을 도구로 사용하여 이방 나라와 민족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 당시 교회는 이방인들로 점점 가득하게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이방인들은 점점 많아지는데 유대인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바울은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바울은 이스라엘이 독자적으로 자기들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 민족 가운데서 태어난 바로 그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이 배척하고 거절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당시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사명, 즉 “이방 나라들에 빛이 되라”는 사명에 점점 신실하지 못하게 되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참담한 현실을 목격하고 있던 바울의 가슴은 찢어질듯 아프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들, 그들은 모든 것을 다 소유한 민족이 아닌가? 가족, 영광, 언약들, 계시, 예배, 약속들 등 모든 것을 다 갖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가? 더욱이 그리스도라 불리는 메시아를 배출한 민족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이 선택받은 이스라엘이, 남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호의와 배려와 혜택을 받은 이스라엘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단 말인가? 어떻게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위임된 그 역사적 사명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방인들에게 빛이 되라는 사명에로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 사명에서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 만일, 정말 만에 하나라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서 벗어나 곁길로 걸어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렇다면 그 뜻이 무엇입니까?
․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운명과 미래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 최종적 결심을 내리는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큰 소리로 외칩니다.
․ 이스라엘이 최종적 결정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 이스라엘은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사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그 사명, 이방인의 빛이 되라는 그 사명은 결코 무효화 되거나 철회될 수 없다.
․ 그 사명은 세상 끝날 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효력이 정지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거절했다고 해서
․ 하나님의 계획이 무산되는 것은 아니다
․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들을 모두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배척한 이스라엘의 행위는 하나님의 계획의 한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배척한 일에는 ‘비밀’이 들어있다.
․ 이 비밀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비밀이며 신비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쓰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비밀과 신비에 대한 것입니다.
로마의 교인들에게 쓴 편지 전체가 바로 이 신비와 비밀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비와 비밀에 대한 절정이 로마서 9장 10장 11장입니다. 바울은 이 신비와 비밀에 대해 고민하고 괴로워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그들의 혈통에서 태어난 자기들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배척한단 말인가 하는 수수께끼 같은 현실에 깊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의 말을 직접 들어보십시오.
저는 항상 제 가슴 속에 큰 슬픔을 간직하고 다닙니다. 너무도 심한 고통이 내 속에 있습니다. 한 번도 이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 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저는 기꺼이 그리스도의 저주를 받겠습니다. 제가 저주를 받아서라도 내 동족 이스라엘이 그리스도께 복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즉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들은 제 가족이며 혈육들입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 자랐습니다.
바울이 경험하고 있던 고통과 슬픔이 그 후 교회의 세기들에서도 계속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불행하게도 그의 고통은 그의 것으로만 끝나버렸습니다.
주후 70년경, 바울이 세상을 떠난 지 약 5년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은 로마의 군대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서서히 온 세상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 항상 따돌림 받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 이방인처럼 항상 경멸받고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 어디서든지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배척과 소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중세기에 유대인들은 영국과 스페인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수없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늘 쫓김을 받았고 박해와 핍박은 우리 시대에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소위 ‘대학살’(holocaust)이라 불리는 인류 최대의 비극적 사건 말입니다. 옛적부터 내려온 ‘유대인들 문제’에 대한 ‘마지막 해결’(the final solution), 즉 ‘조직적 말살’이 나치에 의해 실행되었습니다. 6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포로수용소에서 독가스 실에서 죽어갔던 것입니다.
바울이 경험했던 고통과 슬픔이 그 후의 시대들과 세기들에도 계속되었었더라면! 이런 일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고통과 슬픔은 바울의 것으로만 남았던 것입니다. 아, 정말로 통탄할 일입니다.
유대인들을 위한 바울의 고통과 슬픔 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들어가서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 있다면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 안에 들어가 비유 속의 아버지가 경험했던 고통과 슬픔을 묵상해 보는 일입니다.
․ 이 비유 안에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 두 아들들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입니다.
․ 큰 아들은 이스라엘이고 작은 아들은 이방인들입니다.
․ 큰 아들은 자기 동생 즉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라는 도전을 받습니다.
․ 큰 아들은 이방인들을 그의 아버지의 자녀들로서 받아들이라는 도전을 받습니다.
․ 큰 아들은 이방인들을 자기 동생으로 받아들여 같은 집에서 살라는 도전을 받습니다.
․ 큰 아들은 이방인들을 자기 동생으로 받아들여 그들과 함께 같은 식탁에서 식사 하라는
도전을 받습니다.
․ 작은 아들은 이방인들입니다.
․ 작은 아들 역시 큰 형님에게 감사하고 그에게 배우라는 도전을 받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두 아들들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 우리는 하나님이 두 아들 모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 두 아들 모두를 얼마나 똑같이 사랑하는지를 봅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두 아들을 한 지붕 밑에서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애쓰심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도 보게 됩니다. 두 아들의 행동이나 태도를 보면 아버지가 얼마나 고통하고 계신지를 느끼게 됩니다. 고통하시며 슬퍼하시는 아버지 말입니다.
․ 하나님은 작은 아들 때문에 고통하실 뿐 아니라
․ 큰 아들 때문에 괴로워하시고 고통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은 전능하신분이 아닙니까? 그가 무엇인들 못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작은 아들에게 ‘네가 달라는 유산을 못 주겠다! 재산을 나누어 네게 주지 않을 거다! 나는 네가 집을 떠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강하게 말씀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되게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실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아들에게 강하게 반대하고 나선다면 아들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을 말리지 못한 것입니다.
․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저 아무런 힘도
없이 무력하게 지켜만 봐야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아들을 사랑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단 한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집을 나간다고 했을 때 그저 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작은 아들이 자기의 자유 의지로 돌아올 날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이방인들을 다루시는 방식입니다.
작은 아들이 돌아오자 하나님은 이방인인 우리를 위해 큰 잔치를 준비하셨습니다. “자 우리 함께 먹고 축하하자” “이 나의 이방인 아들은 한때는 죽었었지만 이제 다시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한 때 잃어버린 자였지만 이제는 찾은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파티는 시작되었고 지금 오늘날까지 그 잔치는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찌된 것입니까? 큰 아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 비유의 끝부분에 가보면, 큰 아들은 집 밖에 서있습니다. 집에 들어가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절합니다. 이방인의 귀향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분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못된 자식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편 아버지는 어디에 계십니까? 집안에서 한창 진행 중인 잔치에 앉아 계십니까? 아닙니다! 아버지는 바깥 어두움 속에 서 계십니다. 왜요? 분노와 질투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큰 아들이 바깥 어둑한 곳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그를 참아내며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그는 휘슬을 불어 종들을 불러 큰아들을 강압적으로 끌어다가 잔치에 앉게 하라고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작은 아들을 사랑하던 똑 같은 방식으로 아버지는 큰 아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 가운데서 큰 아들이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로마서 9-11장이 끝나는 방식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즉 작은 아들은 먹고 마시고 춤추고 즐기고 있는 반면, 전능하신 아버지는 바깥 어둠속에서 큰 아들이 집으로 들어가 세상 어느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동생과 함께 잔치의 즐거움에 참여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어느 아들들에게도 그들이 하고 싶지 않는 일을 강요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인내하고 고통 하는 사랑으로 아버지는 두 아들을 자기에게로 이끄십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함께 자기에게로 이끄십니다.
․ 우리 이방인들이 한때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지만 이제는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받았던 것처럼,
․ 이스라엘이 지금은 불순종하고 있지만, 우리 이방인들에게 베푸신 동일한
긍휼과 자비로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얻게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둬 두신 것은, 마침내 모두에게 끝없는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서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 11:30-32). 아멘.
깨닫게 해주셨던 로마서 8:31-39은
절망에서 일어서게 했던, 은혜로 살았음을 깨닫게 했던 말씀인데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것들을 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제한이 있으려구요.
오늘도 귀한 글에 눈물로 답합니다.
감사합니다.
늘 평안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