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28 17:21
“우리의 신학자들, 우리의 설교자들”
마태 6:25-30
Dr. 마르틴 루터
류호준 목사 번역
[성경본문 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보다시피, 예수님은 하늘의 새(鳥)들이 우리의 교장 선생님이요 우리의 신학 교수님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보잘 것 없는 참새 한 마리가 가장 똑똑하고 지혜롭다고 하는 우리 사람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자요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설교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이요 끊임없는 수치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이 사실을 우리의 눈과 귀에 박히도록 계속해서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날마다 우리는 하늘의 새와 들판의 야생화를 보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설교와 노래와 신학 강의를 귀담아 듣지 않는 어리석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봐라! 너희 비참하고 초라한 인간들아! 집도 있고 가정도 있고 돈도 있고 재산도 있지? 매년마다 곡식으로 가득한 농장과 온갖 식물들과 나무들도 소유하고 있지? 아마 너희가 필요로 하는 그 이상으로 있을 것이야. 그런데도 늘 불안해하고 평안이 없어. 항상 죽는다고 걱정하고 불평하고 살지 않는가? 지금 너희 눈앞에 갖고 있는 것들을 봐. 있어 없어? 있잖아. 그런데도 그것이 보이지 않으면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것이야. 가진 것을 살펴보면 수없이 많이 있는데도 하루도 걱정하고 염려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없군.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매일같이 먹이시지 않는가?”
달리 말하자면, 하늘에 날아다니는 작은 새들의 숫자만큼 우리에게는 수많은 선생님들과 설교자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부끄러움과 당혹감을 느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늘을 향해 노래하고 새 소리를 들을 때 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우리의 수치를 선포하는 새 소리를 들을 때 마다, 우리는 마땅히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감히 하늘을 쳐다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돌처럼 마음이 딱딱하고 굳어져서 저렇게 매일같이 들려오는 수많은 설교와 노래를 들으면서도 그것들에 전혀 관심도 없고 눈 하나 깜작 거리지도 않습니다.
사랑스런 저 작은 새들이 무엇을 하는지 보세요. 새들의 삶은 완전 ‘걱정 무(無)’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양식을 기다립니다. 종종 사람들은 새의 노래 소리를 들으려고 새를 잡아 새장 안에 가둬 둡니다. 물론 먹이를 풍성하게 줍니다. 그러면 아마 새들은 이렇게 생각해야만 할 것입니다. “오, 이제 먹이가 많고 풍족하게 되었다. 양식이 어디서 올는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먹는 것 걱정 안 해도 되었어. 주인이 부자야. 내 창고는 가득 차있어.”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새가 새장에서 행복할까요? 창공을 자유롭게 날 때, 더 행복하고 더 풍족할 것입니다. 갈색제비나 파랑새가 아침 식사하기 전, 이른 아침에 그들의 주님께 드리는 노래가 더 탁월하고 더 멋지고 더 즐겁습니다. 그럼에도 그 새들은 그들을 위해 저축되어 있는 곡식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스럽고 정겨운 긴 축복 송(頌)을 노래하면서 우리의 주님 하나님께 그들의 모든 염려와 걱정들을 맡깁니다. 심지어 그들이 먹여야하는 어린 것들이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나이팅게일(지빠귀)의 노래 소리를 듣게 될 때가 있으면, 여러분은 그 때 탁월한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있는 중이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그가 이 복음서를 가지고 여러분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살아 있음 자체로서, 살아서 행동하는 자체로서 여러분에게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밤새도록 노래합니다. 사실상 그의 폐부 깊은 곳에서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는 새장에 갇혀있을 때보다 숲에서 더 행복합니다. 새장의 새를 생각해 보십시오. 끊임없는 돌봄이 필요한 처지이고, 외롭고 쓸쓸하여 우울증에 걸릴지도 모릅니다. 아마 새장에서 그는 이렇게 중얼거릴 것입니다. “주님의 부엌에 있는 편이 훨씬 좋습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집의 주인인 동시에 요리사입니다. 매일 그분은 수많은 작은 새들을 일일이 먹이시고 기르십니다. 그분은 그저 모이를 담은 봉지 정도 하나만을 갖고 계신 주인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들판의 작은 새들을 어떻게 먹이시고 있는지 너희는 매일같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지 않는가? 그 작은 새들이 걱정 없이 사는 것을 보지 않느냐? 그런데 어째서 너희들은 그분이 너희를 먹여 살리실 수 있을까 하고 의심하는가? 그분은 너희 아버지가 아니냐? 너희를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지 않느냐? 그가 너희를 자기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의 말씀(그리스도)과 모든 피조물들을 다 주신 분이신데 어찌 너희를 걱정하지 않으시겠는가? 너희가 작은 새들보다 못하단 말인가? 너희는 그분의 자녀고 그 새들은 너희의 머슴들이 아닌가? 그런데 그분은 마치 그 새들이 그가 보살펴야할 유일한 대상이나 되는 듯이 매일같이 그것들을 먹이시느라 이리 저리 걱정하신다. 새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면서 근심걱정 없이 노래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즐거워하신다. 새들이 창공을 날아다니면서 뭐라고 노래하는 것 같더냐? 아마 이렇게 노래하지 않겠어? ‘나는 노래하고 즐거워합니다. 너무 신이 납니다. 그러나 내가 먹게 될 곡식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전혀 모릅니다. 아마 내가 먹을 빵은 아직 오븐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먹을 곡식은 아직 밭에 심지도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게는 부요하신 주인님이 계셔서 내가 노래하거나 잠을 잘 때에도 나를 돌보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모든 걱정들이나 내가 하는 걱정들 그 이상으로 그분은 네게 주실 것입니다”라고.
자, 새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온갖 근심 염려들을 하나님께 던져 맡기는 ‘신뢰와 던짐의 예술’을 너무 잘 배웠다면, 그의 자녀라고 하는 우리는 그 이상 더 그래야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주님의 이러한 탁월한 예화는 우리 모두에게 부끄러움을 줍니다. 그런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게다가 성경까지 갖고 있는 우리들이 새들을 본받을 정도의 충분한 지혜도 없다니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작은 새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당황하고 부끄러워하면서 그 노래를 들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서 멀리 떨어져 나간 후로부터 사람들은 이상하게 되었고 어리석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세상에 인간보다 지혜롭지 않는 피조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말할지도 못하고 읽을 줄도 모르는 작은 참새 한 마리가 우리에게는 위대한 신학자요 성경에 관한 탁월한 선생님입니다. 우리 인간이 문하에서 배워야할 그런 스승이요 신학자요 설교자란 것입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우리 인간이 누굽니까? 비록 그가 성경 전체를 갖고 있고 이성과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 해도 작은 새 하나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작은 새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쳐 주는 신학자요, 그분의 메시지를 몸소 실천해 보이는 설교자입니다.
[성경본문 2]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여기에 또 다른 보기(實例)와 유추(類推)가 있습니다. 이 실례에 따르면 가축들이 밟고 다니면서 먹어치우는 들판의 작은 꽃들이 우리의 신학자들이요 스승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우리에게는 당황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생화들이 자라는 것을 눈여겨보십시오. 모두 사랑스런 색깔로 치장한 야생화들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어떻게 잘 자랄 수 있을까, 어떤 색깔로 옷을 입을까 하며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모두 그런 걱정일랑 하나님께 밀어둡니다. 아무런 근심이나 걱정도 없이, 더 잘 입어야지 하고 애쓰는 일도 없어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스럽고 멋지고 아름다운 색깔로 옷을 입히시니 솔로몬 왕이 아무리 영화롭게 치장하였다 하더라도 이 들꽃 중 하나만도 그 아름다움이 더 하지 못하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니 그 어떤 왕비도 온갖 금과 은과 진주와 보석으로 치장하여도 이름 모를 들꽃 하나의 아름다움을 능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알려진 대로 역사의 그 어떤 왕도 솔로몬보다 더 부요하고 영화롭고 찬란하고 아름답게 치장한 왕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장엄한 위용과 찬란함이 하늘을 찌를 듯 하여도 들녘의 빨간색이나 분홍색이나 보랏빛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 주 하나님께서는 그가 옷 입혀 주시고 치장해주겠다고 선택한 자는 누구든지 그렇게 꾸미고 덧입혀 주실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따라 할 수 없고 능가할 수도 없는 장식과 색깔로 치장해주는 것이야 말로 진짜 장식입니다. 순금과 수자(沽子) 공단으로 치장했다 하더라도 “적은 새들을 치장해 주시는 하늘의 우리 주인님께서 직접 치장해주시는 것이 이 땅의 그 어떤 일류 재단사가 해 주는 것보다 더 좋습니다.”
자, 그분께서 그 많은 꽃들을 온갖 형형색색으로 입히시고 치장해주시며, 제 각기 각자에 맞는 멋진 코트를 입고 있는 꽃들의 아름답고 우아한 자태는 세상의 그 어떤 장식과 치장으로도 견줄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잘 입히실 것이라고 믿지 못한단 말입니까? 어떻게 우리와 들꽃과 풀을 비교한단 말입니까? 들꽃이나 풀들이야 기껏해야 하루 이틀정도 그곳에 있다가 시들어 잡초가 되는 것 외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대로 “아궁이 던져 태워지거나 화덕을 뜨겁게 하는 목적 외에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 주 하나님께서는 이 작고 일시적인 것들을 너무도 귀하게 여겨 그분의 선물들을 그 위에 아낌없이 헤프게 쏟아 부어 이 세상의 어떤 왕이나 왕비들보다 더 아름답게 치장해 주십니다. 사실 들풀이나 들꽃들은 이런 치장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낭비입니다. 헤픈 낭비입니다. 왜냐고요? 곧 시들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간 있다가 없어질 것에 그런 엄청난 치장을 한다는 것이야 말로 낭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헤픈 낭비를 가리켜 우리는 ‘은혜’라고 부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최고의 걸작입니다. 최상의 피조물입니다. 우리를 위해 그분은 모든 것들을 만드시고 우리에게 하사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너무도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이 생(生)이 우리의 끝이 아니라 그분은 이 생(生) 이후에 있을 영원한 삶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십니다. 자, 그러므로 수천수만 가지의 색깔로 들의 꽃들을 입히시고 멋진 깃털로 하늘의 새들을 장식하시는 그분께서 그의 자녀들인 우리를 입히시고 먹이실 것이라고 신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는 지금 비꼬는 어투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즉 우리의 불신앙이 얼마나 혐오스럽고 얼마나 말도 되지 않는 억지인지를 묘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 새들과 꽃들이 노래하며 우리에게 설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제발 그분은 믿으라”고 부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노래하고 설교하는데도 그러려니 하고 건성으로 흘려듣거나 지나쳐 버리면서, 이전보다 더 탐욕스러워지고 이기적이 되어 갑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영원한 수치와 부끄러움이 되게도, 각각의 꽃들은 최후의 심판의 날까지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들 앞에서 우리를 대항하는 증인이 될 것입니다.
[2009년 3월 28일에]
[사순절에 자신을 살피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도록 촉구하는 설교다]
아름답고도 명쾌한 설교에 마음이 저립니다.
그런데 루터 박사님의 설교에
류교수님 옷이 너무 강렬하게 입혀져 누구의 설교를 읽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설교자 번역자가 마치 한몸이 된것같은....
'신뢰와 던짐의 예술'이 곧 삶의 예술과 지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