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6.25 11:58
“평안과 걱정과 자유”
류호준 목사
I
개인적으로 나는 찬송을 부르고 듣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찬송 중에 렘브란트적인 명암의 대조로 ‘평안과 걱정’을 노래하는 찬송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적이 놀랐다. 다음 찬송을 음미해보자.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 없었구나. 이 세상에 죄악 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 내 주 예수 날 오라 하시고, 사랑하시고, 건져주시니 나 곧 평안이 쉬리로다.”(486장) 이것은 곤고하고 근심, 걱정 많은 삶에 평안이 없음을 노래하고 있는 찬송이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또 다른 찬송은 이렇게 탄식한다.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 자 누군가?” 그리고 이어서 “피난처는 우리 예수, 우리 주께 맡기세.”라고 권고한다(369장). 이 또한 세상에서는 어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근심, 걱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산다는 이야기다. 시편의 한 시인도 “날마다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시는 여호와 우리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시 68:19)라고 노래하는 것을 보니, 그도 어깨를 짓누르는 짐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나 보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영적 짐들과 정신적 짐들과 육체적 질병이나 고통들이, 또한 생계에 대한 재정적 부담들과 가정적 짐들이, 더 나아가 교회적⋅사회적⋅국가적 짐들이, 그리고 각종 관계들로부터 오는 무거운 짐들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만성 두통거리들이다. 주름살의 골만큼이나 걱정과 근심의 골 역시 깊어만 간다. 과연 이 가운데서 우리가 평안을 노래할 수 있을까?
위에서 잠시 말한 바와 같이 찬송가의 상당 부분이 탄식조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자못 놀란다. 예를 들어,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그러나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게다가 시편의 상당 부분이 탄식시라는 것을 알면 다시금 놀랄 것이다. 사람들은 질병, 고통, 소외, 죽음과 같은 비극적 일에 직면할 때 탄식한다. 아니, 그런 일을 만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걱정하며 두려워한다. 역시 찬송가 가사인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 자 누군가?”가 삶 속에서 후렴처럼 반복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오히려 하늘의 평안을 노래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중 하나가 찬송 413장의 고백이다. 내가 이 찬송을 좋아하는 이유는 개인적으로 한 신앙고백이 그 찬송의 내용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글 번역에는 정확하게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1절에는 다음과 같은 고백이 들어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슬픔이 큰 풍파처럼 소용돌이 쳐 밀어닥치든지
하늘이 내게 준 삶의 몫이 어떠하든지
주님은 내게 이렇게 말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후렴) “평안해. 평안해, 내 영혼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 본 사람이라면 ㅡ 그것이 불치의 병으로 고통받으며 죽음의 문턱에서 절규하는 여인이든, 혹은 경제적 파산으로 인해 축 처진 어깨를 추스를 수조차 없어 내일 아침 햇살 보기를 거절하는 중년의 남자이든, 혹은 십 대 자녀의 탈선과 방황으로 수많은 밤을 애타게 보내는 부모이든 간에 ㅡ 이 찬송의 후렴을 확신 있게 부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안다. 누가 이 찬송가의 가사처럼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그렇게 고백한 사람들이 있다. 이 찬송가의 작사자가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그는 자기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를 분명히 밝힌다. 한글 번역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영문 찬송가에는 그 이유가 명시되어 있다. “주님께서 나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가 말하는 뜻은 이것이다. 내가 너를 붙들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내게 가르치셨기 때문에, 나는 그 가르침에 의지하여 이제 확신 있게 내 스스로에게 “괜찮아. 괜찮아, 내영혼아!”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멋진 고백인가! 그런데 이런 고백을 한 작사자에게는 그럴만한 애달프고도 깊은 사연이 있었다.
그는 호레시오 게이츠 스팻포드(Horatio Gates Spafford)다. 시카고의 변호사였다. 부지런히 일하여 그곳에서 많은 재산을 쌓았다. 그러나 1871년 시카고에 대(大)화재가 발생하여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렇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는 시카고 시의 복원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다. 가난한 사람, 집을 잃은 사람들을 구제하였고 그들의 재활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그해에 그는 급성 전염성 피부 질환인 성홍열(scarlet fever, 猩紅熱)로 첫아들(1남 4녀 중)을 잃게 된다.
첫아들과 재산을 잃은 호레시오는 2년 후인 1873년 추운 겨울 11월에 아내와 남은 네 딸을 데리고 영국으로 가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그는 시카고에 급히 처리할 일이 생겨 아내와 네 딸만 먼저 보내고 나중에 합류하기로 한다. 그녀들은 대형 프랑스 여객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간다. 그러나 배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급한 전보 한 장이 날아왔다. 아내 애나(Anna)에게서 온 전보였다. 여객선이 바다 한가운데서 대형 화물선과 충돌하여 바다에 침몰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대형 사고로 딸 넷은 모두 죽었고 자기 홀로 살아남았다는 것이었다. 애나의 전보에는 이렇게 단 두 마디만 적혀있었다. “Saved Alone.”(혼자 살았음.)
사고가 난 지 한 달 후 그와 아내는 다시 배를 타고 영국으로 간다. 항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장은 기내 방송을 통해 지금 1개월 전에 사고가 난 바로 그 지역을 지나가고 있다고 하였다. 그날 밤 호레시오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기에게 찾아온 불행과 재앙들, 잃어버린 다섯 어린 자녀들 생각에 밤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그 마음 속 깊은 곳 그 어디선가 형언(形言)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확신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내 영혼 평안하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런 고백이 입속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강한 기도였다. 두 손을 불끈 쥐고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 영혼아, 괜찮아. 괜찮아.”
이 부부는 3년 뒤인 1876년에 다시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그도 4살이 되어 죽는다. 2년 후인 1878년에 그들은 벌사(Bertha)라고 이름을 지은, 또 다른 아이를 낳는다. 이 아이가 자라서, 후에 이 모든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 것이다.
호레시오와 그의 아내 애나는 모두 6명의 자녀를 잃었다. 그러고도 그들은 계속해서 “내 영혼 평안해. 평안해.”("It is well with my soul.")라고 노래하였다. 얼마나 눈물겹고 장엄한 간증인지! 1876년에 블리스(P. P. Bliss)는 이 구절에 곡을 붙였으며, 그 후로 전 세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애창하는 찬송 중 하나가 되었다. 어느 경건한 할머니는 딸에게 자신의 장례식에 이 찬송을 꼭 불러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나머지 절들을 직접 번역하여 싣자면 이렇다.
사탄이 우리를 삼킨다 해도 수많은 고난이 닥친다 해도
우리에겐 흔들리지 않는 복된 확신이 있도다.
“내가 애쓴다 해도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오, 내 죄여, 아니, 이 얼마나 영광스런 생각인가!
내 모든 죄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나 더 이상 짊어지지 않으리!
주님을 찬양하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라!
주님, 주님 오시는 날 급히 이를 때,
구름이 두루마리처럼 공중에 펴질 때
트럼펫 소리 울리며 주님 강림하실 때,
‘그때에도’ - 내 영혼 평안해!
환난과 고통 중에서 두 손을 불끈 쥐고 평안을 노래하는 이 찬송과 잘 어울리는 구약의 본문들은 상당히 많을 것 같다. 그러나 그 본문들 속 신앙인들은 아마 시편의 한 시인과 함께 이런 확신의 노래를 불렀으리라 생각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심이로다. … 내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II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치고 걱정, 근심 없이 평안하게 살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 또한 족장들의 가족인 아브라함⋅사라, 이삭⋅리브가, 야곱⋅레아⋅라헬, 요셉. 또한 출애굽의 영웅인 모세 그리고 여호수아. 또한 이스라엘의 사사들인 갈렙, 옷니엘, 에훗, 드보라, 기드온, 입다, 삼손 등. 그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걱정, 근심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그들의 개인적 삶과 그들이 속한 나라와 민족의 삶을 엮어간다. 그러므로 평안과 걱정은 언제나 짝꿍 단어다. 평안할 때도 걱정스럽고 걱정스러울 때도 평안하다. 삶이란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다. 온전한 평안과 온전한 걱정이 있을 수 없다.
우리가 평안이나 근심, 걱정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일반적으로 개인적⋅가족적 차원에서 말하는 경우가 많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혹 속을 썩이는 자녀 때문에, 혹 부부지간이나 고부간의 갈등 문제로, 혹 재정적인 위기가 닥쳐왔을 때, 혹 건강에 위험 신호가 왔을 때 사람들은 근심, 걱정을 한다. 긍정적 측면으로 바꿔 이야기하자면 가정에 행복이 있고, 형제자매가 우애하고, 모든 가족 구성원이 활기에 차고, 자녀들이나 남편이 좋은 직장을 얻게 되고, 건강검진을 받으면 그 결과가 모두 좋은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면 그 개인이나 가정에는 평안이 있다. 그러나 개인적⋅가정적인 평안을 넘어 사회적⋅국가적 평안도 있다. 이념 간의 갈등도 없고 빈부의 차이도 적고 노력한 만큼 대가도 얻을 수 있는 공정한 사회고, 서로를 배려하고 경제 상황도 좋고 천재지변도 없고, 이웃 나라와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면 평안하다고 한다. 달리 말해, ‘평안’(well-being)이란 개념은 개인을 넘어 사회와 국가적 차원에서 온 피조물들이 공존하는 샬롬의 상태를 가리킨다. 히브리어 ‘샬롬’은 단순히 전쟁과 분쟁이 없는 상태만을 말하는 소극적 개념이 아니다. 샬롬은 피조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성(creational intention)에 맞추어 움직여갈 때 찾아오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동시에 인간의 노력의 대가다.
이런 의미에서 ‘평안’을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이나 심리적 차원으로 환원시켜서는 안 된다. 앞서 말했듯이 신약을 포함하여 성경 전체가 말하는 평안은 매우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샬롬’이다. 원래 샬롬이란 용어는 ‘가득하다’, ‘풍성하다’, ‘넉넉하다’, ‘모자람이 없다’는 단어다. 보통 ‘평화’, ‘평안’으로 번역되지만 ‘번성’, ‘번영’으로도 번역된다. 영육 간에 건강할 때, 나라가 강성하고 번영할 때, 온 피조세계가 단순히 평온할 때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부여된 신적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때, 오는 풍요와 번영과 즐거움을 히브리적으로 ‘샬롬’이라고 부른다. 이런 세계는 진정으로 자유로움을 누리는 곳이다. 자유는 숨 쉬는 호흡이며 마시는 공기다.
삶의 평안과 안녕을 해치는 치명적 바이러스가 있다면 아마 걱정과 근심일 것이다. 걱정과 근심은 좀과 같아 영혼을 갈아먹는다. 걱정과 근심은 사람의 영혼을 쇠잔하게 만든다. 사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평안한 날보다 바람 불며 비 내리는 궂은 날들이 훨씬 많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첫 조상과 그의 후손들은 에덴의 동편에 머물면서 미움과 살인, 반항과 분쟁으로 얼룩진 삶을 살고 있다. 화목하고 사이좋게 사는 일보다 나누고 분리하고 분쟁하고 담을 쌓는 일에 능숙한 기술자들이 되어갔다. 더 이상 천당(天堂)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분당(分堂)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 분당(分堂)이 우리의 현주소라는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갈라지고 분열하고 깨어지고 일그러지고 왜곡된 데라는 말이다. 따라서 창조주의 창조 의도대로 작동하기를 거절하는 이 추락한 세상은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두통거리를 안겨주었다. 개인뿐 아니라 교회와 사회와 국가 그리고 온 피조물들이 고통을 겪으며 탄식하는 가운데 있다(참조, 롬 8:22).
생각해보면 걱정과 근심만 없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살기 좋은 낙원일까? 이미 우리의 주님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이것은 모두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니라.”(마 6:25)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늘 이런 것들에 - 의식주, 사회적 신분, 물질과 권력과 명예에 - 집착함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포기하듯이 살아간다.
초기 이스라엘의 예
크리스천들은 자유인들이다. 자유를 향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참조, 갈 5:1). 모든 얽매이기 쉬운 죄들과 무거운 근심, 걱정에서 자유로워야 하는 사람들이다(히 12:1). 무엇인가에 종노릇하는 노예 생활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 출애굽의 이야기는 진정한 자유로 가는 길이 얼마나 험한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형론적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던 자기 백성들의 고통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이끌어내어 홍해의 물을 가르시고 구출해내신 후, 그들이 시내산 밑자락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진정으로 자유인들이 되었는가? 진정으로 해방되었는가? 이 도망 나온 노예들은 홍해를 통과한 후 그들의 지도자 모세가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대로(大路)로 자기들을 인도해줄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실제적으로 ‘불레셋인들의 길’(The Way of the Philistines)이라는 대로가 있었다. 이 길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난 240킬로 정도의 길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었다. 이 대로 주변에는 먹을 양식과 물이 풍부하였다. 이 길은 당시 국제무역을 하던 대상(隊商, caravan)들이 다녔던 길이었다. 아마 스타벅스와 같은 커피숍들도 간혹 있었을 것이고 먹을거리와 볼거리를 제공하는 휴식 공간과 휴게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추정하기를 애굽에서 나온 히브리인들이 이 길로 갔더라면 아마 몇 주 정도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도착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쉬운 지름길을 택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하나님은 남쪽 길을 선택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로 내몰았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남쪽 길이란 시내 광야, 사막으로 들어가는 방향이었다. 물도 없고 먹을 양식도 없는 곳이었다. 무장한 베두인 유목민들이 사막을 지나는 행인들을 강탈하는 일이 흔히 일어났던 곳이다. 광야가 어디던가? 온통 죽음이 지배하는 절망의 땅이요 어디서도 도움이 올 수 없는 비극의 영역이 아니던가? 광야가 어디던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근심, 걱정하기에 너무도 적합한 곳이 아닌가?(참조, 마태 6:25) 광야 생활 중에 그들은 너무도 자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이 광야에 식탁을 베풀어주실 수 있을까?”(시 78:19) 하며 하늘을 향해 냉소적 질문을 내뱉었다. 그러나 광야에서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 됨이 무엇을 뜻하는지 온몸으로 경험해야 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 학교에 입학시켜 신앙의 걸음마부터 배우도록 하신 것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어깨 위로 내리누르는 모든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들, 즉 먹고 사는 문제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새롭게 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누가 목숨과 생명의 주인이며, 누가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고 유지하는지를 배우는 데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해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으로서 광야 여정 내내 “나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Credo in Deum)라는 신앙고백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워가야 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 모든 걱정, 근심에서 진정으로 자유롭게 되는 길이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Creator) 하나님으로, 애굽의 폭정에서 종노릇하던 그들을 구출해내신 구속주(Redeemer) 하나님으로 믿는 일이다.
아주 가까이 있는 약속의 땅
그렇다. 남쪽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죽음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죽으러 들어간다는 말이다. 히브리인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광야 사막으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출애굽 한 직후 그들은 거리적으로 약속의 땅에서 아주 가까이 있었다. 몇 주 정도만 행진하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날씨가 좋은 날이라면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지척의 거리였다. 그렇다. 약속의 땅은 아주 가까이 분명히 보이는 곳에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의 삶과 인생을 위한 약속의 땅, 그것에 대한 꿈을 식별하고 알아차리는 데 별로 어려움이 없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꿈꾸는 이상들과 생각들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아주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코앞에, 턱밑에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우리가 바라고 꿈꾸는 곳에 이르기를 원한다. 좋은 직장, 좋은 건강, 좋은 인간관계 등과 같은 약속의 땅에 이르기를 바란다. 자녀들은 모두 건강하고 잘 자라고 공부도 잘하고, 가정에는 근심, 걱정이 없는 그런 삶의 고원(高原)에 이르는 것이 우리가 꿈꾸는 약속의 땅에 대한 기대다. 이처럼 꿈은 분명하다. 바라는 곳이 분명하다.
광야 길, 갓길과 우회 도로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 삶과 인생은 남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아, 이건 아닌데!” “어어, 방향이 이쪽이 아닌데.” 아니면 “나는 지금 어디론가 방황하고 있어.” “이리저리 부대끼며 떠내려가고 있어!” 아무리 앞을 향해 힘껏 노를 저어도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 말이다. “아아, 뒤로 떠내려가고 있어! 뒤쪽에 천 길 낭떠러지 폭포가 있는데!” “아아, 이제는 끝장이야!”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에서 종종 적대적이고 비우호적인 광야 속으로 방향을 선회하실까?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하나님을 계속해서 따라간다면 반드시 놀랍고 장엄한 그 무엇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고 장엄한 그 무엇은 궁극적으로 오직 ‘힘든 길’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힘들고 고된 길에서만 발견되는 놀라운 그 무엇이 무엇일까? 변혁과 변형과 변화다.
변혁과 변화! 그 광야 속에서 형태가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미용적인 성형이 아니라 본질적인 정형이다. 구조와 틀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정형적 변화다. 어디에서 그런 일이 가능한가? 광야 길, 고단한 길, 힘든 길에서만 발견되는 놀라운 선물이다. 우리가 운전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 울퉁불퉁한 갓길로 가면 그 갓길이야 말로 갓(God) 길이라는 말이다. 광야는 약속의 땅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갖고 도망 나온 백성이 그들이 걷게 되는 길이 어떤 길이든지 그 길에서 하나님과 동행 하는 것을 배우며 신앙의 백성으로 ‘변형’되는 곳이다. 이것만이 자유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 주를 더욱 의지합니다.
밝은 때에 노래와 어둘 때에 기도로
위태할 때 도움을 주께 간구합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뿐일세.
무슨 일을 당해도 예수 의지합니다.” (찬송 543장 1,3절)
자유로(自由路),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
이런 이유 때문에 십계명은 매우 중요한 서문(序文, prologue)으로 시작한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달리 말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누구인지 기억하라! 내가 행한 일들을 기억하라. 내가 너희를 해방시켰다. 내가 너희를 자유의 몸이 되게 하였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 말씀은 그 다음에 나오는 열 가지 계명들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해석학적 열쇠다. 달리 말해, 십계명을 올바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는 전망대다. 이 계명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성격을 묘사한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위한 자유를 억압하거나 막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실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우리들처럼 분명한 비참함과 불행을 보고도 그냥 넘어가거나 못 본체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우리가 싫어하는 직장에 매여 오가도 못하고 그저 있을 수밖에 없을 때, 돈만 아니라면 언제라도 훌훌 털어버리고 떠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 “왜 내 팔자가 이 모양 이 꼴이야!”라고 하지 말라. 우리의 각종 인간관계들에 딱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노예처럼 매여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말라. 사명도 없고 열정도 없고 희망도 없고 자유도 없는 삶에 익숙해서 그냥 그대로 살고 있다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말라. 왠가?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을 그런 상태로 부르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와 시작한 그분과의 인연의 역사는 우리가 무엇엔가 노예처럼 얽매였을 때, 그분이 우리를 ‘발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분은 우리의 신음 소리, 부르짖음, 외침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를 구출하시려고 작정하셨다. 이것이 출애굽기가 이야기하는 바다. 이것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의미하고 있는 바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출하시려고 일을 시작하셨는지를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진정한 해방, 진정한 자유에로의 부르심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크리스천들은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크리스천들은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크리스천들은 매 주일 십자가 밑에 모이는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자유를 상징한다. 십자가는 자유와 해방에 대한 위대한 상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세상 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가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지만 함께 살고 있는 우리의 죄들에 종노릇하는 우리들을 ‘발견’하신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죽으셨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여정(旅程)
이 광야 길을 걸어가면서 우리는 자유에 이르는 길이 무섭고 두렵고 수많은 위험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막과 광야에는 무서운 전갈들과 날짐승들이 숨어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은 우리가 끈으로 묶어둘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또한 그분의 현존과 임재가 항상 분명하게 보이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광야 여정은 언제나 힘들고 고단하다. 광야 여정에서 우리는 좀 더 다루기 쉽고 언제라도 부르면 올 수 있는 다른 신들이나 우상들을 찾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받게 된다. 대표적으로 출애굽 후 광야 시절에 있었던 비극적 ‘황금송아지’ 사건이나 예수님의 광야 40일 기도 기간이 이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다.
그러나 모든 우상은 우리를 다시 노예 상태로 끌어갈 것이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 생각했던 우상들은 결국 우리를 속박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십계명을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너희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여러분을 속였던 우상들을 내버리라는 것이다. 어떤 우상들인가? “하나만 더 사!” “우리 자신을 개발하고 자아실현을 하게 하는 프로그램 하나만 더 해봐!” “한 번만 더 승진해봐” “비 오는 날을 위해 돈 한 푼이라도 더 쌓아야 해.” 이렇게 아우성치는 우상들이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여러 해 동안 섬겼지만 결코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던 우상들이 아닌가? 우상들은 우리에게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을 약속했다. 그러나 우리를 다시 애굽으로 데리고 갔을 뿐이지 않은가? 다시 노예 생활을 하게 한 것이다.
자유는 우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그 무엇을 발견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얽어매고 노예처럼 부리게 될 것이다. 자유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내맡기고 신뢰할 때 온다. 진정한 자유인은 이런 환상과 비전을 꿈꾸고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다.
자유의 목적
상투적으로 말하자면, 크리스천의 자유는 “…부터의 자유”를 넘어 “…에로의 자유”롤 지향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렇게도 우리가 자유롭게 되기를 바라실까?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자유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심지어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참된 평안이 어디 있나?”라고 자주 질문한다. 근심, 걱정이 밀물처럼 들어온다. 때로는 그것들이 쓰나미가 되어 삶을 파멸로 몰아갈 지경이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근심, 걱정이 끊일 날이 없다. 아울러 불평과 불만이 하늘을 찌른다. 때로는 허망한 우상들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들기도 한다. 유혹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데서 들려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하늘을 우러러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어떨까?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주님 곧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말이다(시 68:19). “지게꾼 하나님, 감사합니다.”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짐들을 대신 짊어지는 자발적 지게꾼이 되는 것이야 말로 제자도(道)로 입문하는 첫걸음일 것이다.
** "목회와 신학"의 부록인 [그 말씀] 2011년 8월호에 실리는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