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요한 칼빈과 그 후예들"
류호준 목사
                                                        


요한 칼빈은 1509년 프랑스의 노용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시절에 인문학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24세에는 학문적 정상에 이르게 된다. 마르틴 루터와 같은 개혁자들의 가르침에 영감을 받은 그는 성경을 심도 깊게 연구하였다. 철저하게 준비된 인문학 공부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에 대한 탁월한 이해는 칼빈으로 하여금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숨겨진 책이었던 성경의 내실에 들어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에 가장 탁월한 학자로 만들었다. 성경연구로 시작된 그의 성경 사랑은 한평생 성경의 모든 부분을 연구하고 주석하는 작업에 불길을 당기었고, 그가 남긴 방대한 성경 주석은 아직도 기독교 역사상 가장 탁월한 주석서로 남아있다. 물론 그가 요한 계시록에 대한 주석을 집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 당시 요한 계시록은 어두움을 밝히는 빛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사변적 논쟁의 열기를 발산하였기 때문에 칼빈의 생각에는 계시록 주석을 집필하지 않는 것이 여러모로 더 유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 그는 성경주석뿐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절묘하게 요약해놓은『기독교강요』라는 책을 썼다. 교회에서 교인들의 신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교육하기 위해서 집필된 이 저서는 처음부터 상아탑에서 읽혀지고 논의되는 조직신학 저술로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일상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길에 대해 가르치기 위하여 의도된 목회적이며 교육적인 산물이었다.


그는 로마 천주교에 의해 심한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프랑스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그가 걸어가는 길은 외로운 길만은 아니었다. 스위스의 제네바에서는 파렐(Guillaume Farel)과 같은 또 다른 개혁자들을 만나 개혁운동을 힘 있게 전개해 나갔다.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설교자로서, 성경교사로서, 신학 선생으로서, 개혁주의 가르침의 열정적 전파자로서 칼빈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임을 충실하게 감당하였다. 여러 면에서 칼빈은 그 시대의 사람이었지만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고 성경이 요구하는 신앙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하게 만든 하나님의 나팔수였다. 우리가 서있는 개혁주의 신학은 이러한 칼빈의 성경적 신학적 가르침들에 상당한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고귀한 역사적 유산이다.


개혁주의 신학의 내용들은 요한 낙스(John Knox)와 같은 인물에 의해 스코틀랜드에 소개되었는데 그는 본래 종교개혁운동의 한 주류인 루터파의 신학적 영향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의 선생이었던 패트릭 해밀톤(Patrick Hamilton)은 신앙을 지키려다가 화형을 당하였는데, 낙스 역시 프랑스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중노동을 하기도 하였다. 석방된 후에 낙스는 제네바에서 칼빈의 밑에서 공부하였으며 1559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당시의 교회와 국가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지만 마침내 후에 ‘장로교회’로 불리는 개혁주의 전통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성공하였다. (계속)